543화 싱가포르행 (3)
싱가포르 심장 내과 학회 학술회가 소란스러워지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세상에 이현종이 자기 제자이자 아들인 이수혁 교수를 보내겠다고 한 지 이제 막 1시간 정도 되었을까 말까 한데 대뜸 초록이 날아올 줄이야.
그것도 구색만 맞춘, 그러니까 제출은 이렇게 했지만, 막상 발표날이 되면 아예 다른 내용이 되는 그런 초록도 아니었다.
이미 하나의 완성된 논문이었다.
“이거 미리 써 놓은 거지. 뭔 소리들을 하는 거야.”
“그…… 그렇겠죠?”
“당연하지, 멍청아. 이런 걸 한 시간 안에 어떻게 써?”
학술이사는 그 논문을 보며 성질을 부렸다.
안 그래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니 뭐니 하면서 대한민국과 같이 도매급으로 묶일 때부터 기분이 나빴는데 이제는 아예 국가 위상이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벌어져 버리지 않았나.
딱 그 세대를 거쳐 온 이사에게 대한민국이라는 키워드는 일종의 열등감 작동 버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지 않나.
아무것도 없던 나라에서 태화가 나오더니 아선에 칠성 그룹까지 튀어나오는 바람에 이제 대한민국은 전 세계 스마트폰, 자동차, 철강, 조선 등 굵직한 사업의 주요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니, 저 친구가 이상한 말을 해서.”
“뭔 이상한 말?”
학술이사는 자기 앞에 있는 주니어 스탭의 말에 일단 인상부터 썼다.
그래도 우리가 대만보다는 신세가 좀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주니어 스탭은 그런 학술이사의 얼굴을 곧장 마주하는 대신 비서를 가리켰다.
말이 비서지, 학회 전반에 걸친 실무를 관장하는, 아주 주요 직원이라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도 그렇지만 원래 학회라는 곳이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회원들이 내는 돈으로 굴러가는 곳이다 보니 많은 돈을 주지 못하기에 주요 직원은 다시 말해 귀한 직원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었다.
즉 학술이사조차 함부로 대하기는 어렵다는 얘기였다.
‘그래, 표정 좀 풀어지셨지?’
예상대로 애써 화를 억누르는 것이 보이는 학술이사를 슬쩍 살피곤 주니어 스탭은 아까 들었던 말을 했다.
“문서 작성 이력을 보면 언제 쓴 건지 나오나 봐요. 근데 이거…… 자동저장 문서로 쓴 건데 전화하고 열고, 보내기 직전에 저장했다나 봐요.”
“복붙 아냐?”
“복붙이 한 시간 가까이 걸리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이걸 지금 1시간 만에 썼다고?”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죠……. 이현종 교수님은 천재잖아요.”
“이수혁이 썼다며?”
“그건 모를 일이죠.”
주니어 스탭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방금 정독했던 논문을 돌아보았다.
모든 글에는 지문이 있다는 말이 있다.
글만 봐도 이건 누가 썼겠단 싶단 생각이 든다는 말이기도 한데, 논문은 예외였다.
특히 영어로 된 논문은 대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써야 하는 상황인지라 더더욱 그러했다.
‘이현종이 썼다고 해도…… 대단한 일이지.’
이현종이 대체 언제 적 이현종이란 말인가.
눈앞에 있는 학술이사보다도 더 위였다.
한데 주니어 스탭이 아직 학생이었던 시절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주제에 여전히 그 명성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태화 의료원은 그런 인간이 있는 병원이니만큼 세계적으로 잘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수혁이라는 친구까지 그 수준이면 어떨까?
‘이제 진짜 연수를 한국으로 가는 시대가 오는 건 아닌가?’
주니어 스탭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동안 학술이사는 화가 났다.
“뭔 개소리야. 이걸 어떻게 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아유, 왜 그러세요. 얘기도 못 합니까?”
“학자가 되어 가지고 말야,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면 안 되지.”
“알겠습니다, 교수님. 알겠어요.”
학술이사가 그린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주니어 스탭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치밀하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 뒤로 흉계를 꾸미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부드러운 인간은 아니지 않나.
적어도 눈앞에서는 일단 미안하다 어쩐다 하면서 넘어가는 게 상책이었다.
효과는 있었다.
“아무튼, 보냈으니 뭐 어째. 시간 잘 맞춰서 넣어.”
“네. 음……. 오후 2시 세션으로 넣겠습니다.”
“오후 2시가 비어 있었어?”
“네.”
“음.”
어차피 리홍이 의원을 통해 들어온 부탁이기도 하지 않나.
이현종 단독으로 한 부탁이라면 본인이 직접 오는 것도 아니니만큼 까 버렸을 텐데, 리홍이가 있어서 거절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후 2시에 넣는 건 좀 그랬다.
“너무 황금 시간이잖아?”
“메인 홀은 아니라서요, 괜찮지 않을까요?”
“에헤이, 그래도 1시간 만에 한 건데 그걸 그 시간에 해 줘?”
“으음……. 그럼 그 세션 중에 제일 끝으로 밀까요?”
“그래, 그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해서 오후 2시 세션에서 맨 뒤로 밀어 버렸다.
3시가 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나름 수혁의 발표를 최대한 머리 써서 민 건데 정작 그 말을 전해 들은 수혁은 전혀 생각이 없었다.
“어, 받아 줬네요.”
“당연하지. 누구 말인데 안 들어.”
“오후 2시 세션인데 마지막이라 세 시쯤이네.”
“딱 좋네. 원래 밥 먹고 수다 떨다가 들어오는 놈들도 많아서. 특히 싱가포르는 너무 더워 가지고 애들이 밥 먹고 바로 못 움직이더라.”
“아……. 그래요? 근데 이거 뭐 많은 사람 앞에서 강연할 만한 거리는 되나 모르겠네.”
“그냥 케이스 리포튼데 뭐. 관광 편하게 하려고 넣었다고 생각해. 어차피 너 아직 외국에서는 그렇게 유명인이 아니라…… 그렇게 관심도 없을 거야. 애비랑은 다르지.”
“하긴 그렇네요.”
애초에 뭐 싱가포르에 한국 의학의 훌륭함을 보여 주겠다, 이런 목표도 없지 않나.
그저 휴가처럼 학회 써먹기 위해 낸 것일 뿐이었다.
그걸 저쪽에서 오버해서 대응한 것이다 보니 이현종 이수혁 부자에게는 전혀 타격이 없었다.
다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조태진은 엄청 아쉬워했다.
‘아! 그런 학회 있는 줄 알았으면 나도 낼 것을!’
만약 학회에 초록 냈으면 수혁과 무려 주말을 한 번 더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았나.
퍽.
물론 그 소리를 입 밖에 낸 순간 아내에게 등짝을 얻어맞았다는 설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자기 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과 함께 있으려고 자기 가족은 내팽개쳐 두고 외국에 더 있겠다고 해?
등짝이 아니라 뺨을 때려도 용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해서 조태진은 싱가포르로 가는 날 아침 최대한 어두운 얼굴을 하고 나섰다.
“여보, 그럼 다녀올게.”
“어. 근데 뭔 일 있어?”
“당신이랑 떨어지는 게 싫어서 그렇지.”
“지랄. 우리 수혁이, 우리 수혁이 난리 칠 땐 언제고.”
하지만 그간 해 놓은 짓거리가 있어서 별로 소용이 있진 않았다.
조태진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서선 짐을 차에 싣고 병원으로 향했다.
“와……. 아무리 그래도 남편한테 지랄이라니…….”
아침부터 당한 게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넋두리가 나왔다.
내가 지랄을 했어도 대놓고 지랄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쁜 게 인지상정 아닌가.
따르릉.
그 와중에 병원 전화번호로 전화까지 오니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나.
이미 전날 급한 환자들은 싹 다 정리해서 따로 말까지 했는데 병동 전화로 전화를 해?
누군지 몰라도 잘 걸렸다 싶었다.
“어, 왜? 누구지? 나 오늘 휴간데?”
해서 조태진은 그로서는 꽤 드물게 날 선 목소리로 받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시뿐이었다.
“어, 형. 저요.”
“어……. 수혁아!”
정말 신기하게 아까까지 짜증 났던 마음이 눈 녹듯 슉 사라져 버렸다.
늘상 떠들어 댄 것처럼 심장이 고장난 건지 뭔지 알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아내에게 미안해졌다.
‘그래, 내가 지랄이다.’
이건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남의 자식 목소리만 듣고도 이렇게 들뜨는데 그럼 뭐라 한단 말인가.
“오늘 병원에 차 두고 같이 가시는 거죠? 버스로 간다는데.”
“어, 어! 그렇지!”
사실 조태진은 태화 주식에 사 둔 게 오르기도 했거니와 장인어른이 중진 의원이다 보니 여윳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해서 인천 공항 앞에 있는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의 회원권이 있어 거기에 차를 두고 가려는 계획이었다.
회원 카드도 따로 챙겨 나온 참이었다.
공항까지 고속도로 타면 금방인 데다가 차도 좋고, 짐도 많아서 이렇게 가는 게 훨씬 편한데 뭐 하러 출장 가는 날 아침까지 병원에 간단 말인가.
딱 여기까지가 수혁에게 전화를 받기 직전 상황이었다.
“지금 병원 가고 있어.”
하지만 수혁의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고, 차는 유턴하고 있었다.
빵.
‘야, 이 미친놈아!’
너무 돌연 벌어진 일이다 보니 뒤에서는 난리도 아니었다.
“응?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아, 몰라. 사람들이 매너가 없네.”
“운전 험하게 하는 사람 많죠. 저도 운전하다 보면 참…….”
“그러니까 말야. 준법정신이 없어. 아무튼, 나 한…… 20분이면 도착해.”
“차 막히나 봐요? 원래 삼촌 집에서 가까울 텐데.”
“어? 어어. 그렇네. 오늘. 하하. 금요일이라 그런가.”
매너도 없고 운전도 험하게 하고 있는 조태진은 있는 변명 없는 변명 다 해 가며 재빨리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혁이 버스를 잡아 둔 덕에 출발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솔직히 수혁이 버스 떠날 수도 있다고 빨리 오라고 했을 땐 이게 다 뭔 일인가 싶었는데, 딱 도착해서 수혁을 보자마자 그런 마음 따위는 눈 녹은 듯 사라졌다.
“오, 수혁아!”
“네, 형. 와……. 짐이 왜 이렇게 많아요?”
“담주 수욜까지 있어야 되잖아. 정장도 입어야 되고 하니까 많이 챙겼지.”
“아……. 아무튼, 짐 싣는 데는 제가 확보해 놨어요.”
“고맙다. 역시 넌 최고야.”
“아니, 뭐 이런 걸로.”
게다가 수혁이 짐 넣을 데뿐 아니라 자리도 자기 옆자리로 맡아 놨다 보니 자못 흐뭇해져서 껄껄 웃고야 말았다.
그의 기분은 비행기에서 최고조로 치달았는데, 교수치고 이런저런 루트로 돈을 꽤 버는 수혁이, 동시에 달리 쓸 일도 없는 수혁이 당연히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할 것을 예측했던 것이 딱 맞아떨어졌을 뿐 아니라 거기서도 옆자리가 되어서였다.
“으하하.”
덕분에 싱가포르 창이 공항에 내렸을 때는 술이 꽤 취해 있었다.
얼굴이 붉다 못해 거무죽죽해 보일 지경이었다.
“형, 이거 입국 될까요?”
“관우라고 하자.”
“네?”
“어때, 형 드립 좋지?”
“그런 소리 하면 못 들어갈 거 같은데…….”
아닌 게 아니라 싱가포르는 법이 좀 엄격한 편에 속하는 나라였고 때문에 입국도 까다로울 수 있었다.
물론 조태진이야 신원이 확실하기도 하거니와 대한민국이 여권 파워가 워낙에 강한 나라긴 하지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태화 의료원 분들이시죠?”
그때 혹시 형 못 들어갈까 봐 걱정하는 수혁 일행을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정장을 입은 공무원이었는데, 외교부 직원이었다.
“리홍이 의원 부탁이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덕분에 빠르게 입국 심사를 마친 일행에게 아까 그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 멀리 서 있는, 처음 보는 듯한 사람을 가리키면서였다.
“이수혁 교수님 혹시 저분 아시나요?”
“네? 그게…….”
“닥터 양이라고 하는데. 교주님이랑 친분이 있다고 자기가 모셔야 된다고 거듭 주장을 하고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