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화 반드시 되갚아 줘야겠는데? (2)
신현태는 바루다 얘기가 나오자마자 일단 수혁의 눈치를 봤다.
사실 수혁은 별생각이 없지만, 그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바루다가 수혁의 머리에 박혀서 마치 빙의한 것처럼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머지 전부는 그저 그 사건 때문에 수혁이 다리가 다쳤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인마. 수혁이 복수해야지.”
이현종 또한 신현태의 시선을 따라 수혁을 바라보고는 더없이 진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말이 진중하다는 거지, 신현태는 딱히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약간 무협지에 나오는 사람 같은데.’
그중에서도 마교나 사파 쪽 사람 같았다.
이를테면 지금 이현종이 짓고 있는 표정에 어울리는 대사는 ‘네 말이 거슬리는구나. 혀는 두고 가거라.’ 정도가 될 거 같았다.
이게 이현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모르겠는데 상대가 이현종이다 보니 덜컥 걱정이 됐다.
‘설마 가서 칠성 원장 다리 자르는 건 아니겠지?’
원장 다리만 자르는 게 아니라 연루된 사람 모두 자르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형,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내가 무슨 생각하는 줄 알고?”
“다리 자를 생각.”
“오.”
“오 하지 말고!”
예상대로 이현종은 지금 원장 다리를 슥삭 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도 딱히 분이 풀릴 거 같지 않았다.
수혁이 어떤 아들인가.
비록 생물학적으로는 전혀 연관이 없는 애긴 하지만 피보다 진한 정신적인 유대가 있는 아이였다.
평생 외로운 천재로 살아온 이현종에게 같은 수준에서 아니, 심지어 어떤 데는 더 높은 수준에서 토의가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반가웠나.
그런 수혁의 다리를 다치게 해?
“칼 내려놔. 어차피 그 칼로는 빵밖에 못 잘라.”
“어유, 이게 왜 내 손에 있어.”
“왜 있긴. 방금 저쪽 테이블에서 집어 왔어.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아니, 좀 더 앉아 있다 가시지, 왜.”
이현종은 저도 모르게 빵을 먹고 있던 테이블에서 칼을 집어 왔고, 그렇지 않아도 계속 뭘 자른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어서 겁을 집어먹고 있던 손님들은 우르르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현종은 그런 손님들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내가 성질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고 자르고 싶지. 근데 일단 참는다.”
“일단이 아니라…… 그러면 안 돼.”
“왜.”
“그…….”
신현태는 이현종의 왜냐는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런 걸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도와줘, 수혁아!’
해서 신현태는 애처로운 얼굴이 된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법에 저촉돼요, 아빠. 다리 자르면 감옥 가.”
“아, 감옥 가?”
“네.”
“그럼…… 그건 좀 그렇지. 어쩌지?”
다행히 이현종은 수혁의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편이었다.
해서 감옥 간다는 말에도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어쩌긴…… 아까 프락치 활용하겠다며.”
“응, 그렇지.”
“근데 지금까지 형이 데리고 있던 애들은 어쩌고?”
“야, 박국진 교수 뭔 일 당하는지도 몰랐던 애들이야. 아니면 알았어도 말을 안 해 주거나. 뭔 쓸모가 있냐? 폐기해야지.”
“으응. 그렇긴 하네.”
물론 여전히 약간 무협지스러운 말투를 고수하고 있기는 했다.
세상에 사람을 두고 폐기라니.
마교처럼 어릴 때부터 키워 준 것도 아니면서 저런 말을 한다고?
‘뭐……. 그래도 다리 자른다는 소리 하는 것보다는 낫지.’
신현태는 이미 텅 비어 버린 2층 카페를 둘러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이현종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일부 양보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이 양반하고 모든 대화를 다 일반인처럼 나누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지는 건 자기뿐이었다.
“근데 박국진 교수님도 겨우 심증만 갖고 있을 정도로 은밀히 벌어진 일이라면……. 박국진 교수님 밑에 있는 사람들이 알까요?”
그때 수혁이 말을 덧붙였다.
신현태는 그 말이 반가워서 죽을 거 같았다.
드디어 박국진이 간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얘기가 나와서였다.
“그러게. 걔들도 모르겠지.”
“그럼 프락치로 활용한다고 해 봐야 병원 분위기 정도나 파악할 수 있지……. 바루다 관련 일은 모를 거예요. 게다가 오래된 일이잖아요. 벌써 4년 됐어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렇죠. 이후로 미국에서도 왓슨 폐기하면서 아예 얘기가 쑥 들어갔잖아요. 원래 개발하던 곳도 이런데, 굳이 칠성에서 말을 꺼낼 거 같진 않아요.”
“그것도 그렇네. 흠……. 그럼 어쩌지. 이대로 덮어?”
“음.”
수혁은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가며 대화를 이어 가다가 입을 다물었다.
현실적으로는 이대로 덮는 게 맞았다.
하지만 감정이 그렇지가 못했다.
복수하는 건 차치해 두고서라도, 정말로 칠성이 관여한 건지가 너무 궁금했다.
“역시 다리를 자르자.”
“아니, 그건.”
“그건 아녜요, 아빠.”
덩달아 입을 다물고 있던 신현태는 수혁과 더불어 이현종을 말렸다.
“자르다 보면 다 불 거야. 그렇게 되어 있어. 사람 몸이 얼마나 통증에 약한데.”
“그런 얘기가 아냐…….”
“네, 아빠. 감옥 간다니까요?”
이번엔 아까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원래 이현종은 답답한 걸 싫어하는 사람인데, 지금 이 상황이 딱 그래서 그랬다.
“감옥…….”
“일단은 박국진부터 병원에 들이고, 그다음에 생각하자.”
“네, 그게 좋겠어요. 그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은밀하게 처리했을 거고……. 또 입을 다물고 있을 텐데 여기서 떠들어 봐야 소용이 없죠.”
다행히 감옥이라는 키워드가 의외로 이현종에게 꽤 잘 먹혀들어 갔다.
그 이유를 들이파 보면 어제 이기자 교수와 같이 본 프리즌 브레이크 때문인데, 그거까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처럼 매력 있는 사람은 가면 당할 거야, 아마.’
이기자 교수가 그러지 않았나.
자기는 귀여워서 저런 데 가면 큰일 난다고.
옛날 같았으면 그럴 리가 있나 싶었겠지만, 무려 이기자 교수와 사귀게 된 지금은 자신의 매력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감옥을 되게 무서워하네?’
‘아빠가 감옥을 무서워했었나?’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둘로서는 그저 감옥이라는 키워드가 잘 먹힌다는 데 대해 감사할 따름이었다.
덕분에 셋은 우선 나중을 기약하면서 카페를 나올 수 있었다.
그래 봐야 따로 어딜 간 건 아니었다.
갈라면 갈 수 있었지만, 신현태는 원장이라 박국진을 빨리 업어 와야 했고 이현종은 이기자가 회식이라 어차피 할 일이 없었다.
그리고 수혁은 늘 그렇듯 약속이 없었다.
“원장실이 되게 깔끔해졌네요?”
해서 수혁은 자기 소관도 아니면서 원장실에 들어갔다.
원래 같은 공간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법인데, 이현종과 신현태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보니 아예 다른 곳같이 보였다.
“응? 아, 여기 원래 이렇게 넓고 좋은 곳인데……. 현종이 형이 막 쓴 거지.”
“막 쓰긴 뭘 막 써. 다 혼돈 속에 질서가 있었던 거야.”
“그런 사람이 정리하는 날 양말을 다섯 켤레를 넘게 찾아?”
“험험. 메일 왔어?”
“어휴.”
신현태는 이현종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메일에 접속했다.
박국진은 정말로 급했는지 이미 메일을 정성껏 보낸 참이었다.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되는 정보, 그러니까 칠성에서 받는 연봉도 공개되어 있었다.
“와……. 얘 보직에서 잘린 거 아냐?”
“응. 근데 꽤 높네?”
“나보다는 낮아도……. 어지간한 분과장보다는 높겠는데?”
“칠성이 이거 돈 많이 푸는구나. 하긴 원래 저기는 보너스 나오는 달에 충성심이 올라가는 기업이라고 했었어.”
“우리도 그렇긴 한데……. 기본급이 높네. 허 참.”
덕분에 셋은 칠성의 연봉이 살짝 태화보다 높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현태는 그냥 같은 경력의 태화 교수랑 똑같이 맞춰 줄 수 있다고 할걸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연봉 차이를 가늠했다.
이현종은 대체 왜 태화는 연봉을 짜게 줄까에 대해 고민했고, 수혁은 그냥 있었다.
할 일 없어서 온 거라 여기서도 할 일이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부우웅.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다.
“응? 환잔가?”
본래 이 시간에 걸려 오는 전화는 짜증 나는 법인데 수혁은 이상한 사람이다 보니 약간 신이 났다.
“아……. 비서분이시네.”
한데 번호를 보니 병원은 아니고 이기원 의원의 비서였다.
생각해 보니 오늘 이현종에게 말을 꺼낸 것도 다 이 사람 때문 아닌가.
일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으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왔을 터였다.
‘아마 그렇겠지?’
[그렇겠죠. 이런 것까지 조언을 해야 합니까?]
‘그럼 뭘 물어.’
[괜히 한번 말해 봤습니다. 아직 저녁을 제대로 못 먹어서 신경이 날카로워서 그래요.]
‘아, 이거 받고 시키자.’
[콜.]
수혁은 생각을 정리한 후 전화를 받았다.
“네, 이수혁입니다.”
“아, 교수님. 저 이기원입니다.”
“어, 어. 의원님.”
비선 줄 알았는데 이기원이었다.
“응?”
“의원님이야?”
이기원이란 이름이 갖는 무게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이현종조차 수혁에게 들러붙었다.
딱히 상대가 원내 대표라서는 아니고, 그냥 종친이라서가 더 크긴 했지만.
하여간 다들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네, 아이고……. 이것 참. 원래 도움을 드리려고 시작한 일인데 오히려 또 도움을 받았습니다. 민망해서 이현종 교수님께 전화드리기 전에 먼저 이수혁 교수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 이기원 의원은 늘 그렇듯 공손하기만 했다.
수혁은 이현종처럼 권력 앞에 초연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야합하는 사람이라 수혁도 공손하게 나갔다.
“아닙니다.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들어 보니까 칠성 쪽이 너무 이상하게 나왔더라고요.”
“그렇긴 합니다. 그 병원 그거 좋게 보고 후원도 억대로 했었는데…… 이제 보니까 아주 몹쓸 병원이에요.”
이기원은 평소 그답지 않게 꽤 세게 말을 했다.
어차피 수혁이 녹음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화가 나서이기도 했다.
언제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그러니까 정말 실권을 쥐게 되면 한 번쯤 손을 봐줘야 하는 그룹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하지만 병원에서조차 이래?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야야. 그러고 보니까 이거 이기원 의원이 엮였잖아. 말을 살짝 흘려 볼까?”
“응? 뭔 소리야, 형.”
“우리는 바루다에 이놈들이 연루됐는지 어쨌는지 절대 알 수 없겠지. 근데 이기원 의원도 그럴까?”
“칠성이 작정하고 감추면…….”
“시작도 하기 전에 초치지 말고. 이기원 의원이 우리 집안사람이야, 인마.”
“그게 뭔 상관…….”
“한산 이씨라고. 한산 이씨는 다들 잘났어. 그런 사람이 정치인이니 적어도 우리보단 나을 거라는 거야.”
“음……. 그건…… 근데 그래도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