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480화 (480/1,303)

480화 도와주세요, 교주님 (4)

수혁과의 통화를 끝낸 신현태는 우선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엔 언젠가 이현종이 샴페인 따다가 뚜껑을 날려 먹는 바람에 생긴 자국이 선연히 남아 있었다.

‘형은 어째 나이가 들어도 사고를 쳐요?’

원장 되고 꽤 시간이 지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임기 첫날 그랬다.

‘야, 나처럼 실력 좋으면 정치질 안 하고도 원장이 될 수 있는 거야!’

기분이 정말 좋아 보이긴 했다.

이현종이 뒤에서 제일 많이 들은 말이, 저 양반은 학회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병원 내 보직 맡을 일은 없을 거란 소리였으니까.

하지만 태화 생명 이사회는 원내 정치에 매몰되어 있던 교수들에게 신물이 났는지 어쨌는지 원장 자리는 대뜸 이현종에게 주었다.

그것도 친정이라 할 수 있는 내과 과장에 신현태가 임명되었을 때에 맞춰서였다.

그런 날일수록 축하는 직접 해야 한다고 하더니만 바로 천장에 구멍을 냈다.

‘그때보다 4살이나 더 먹었는데…….’

지치지도 않나?

이 시간에 아선 병원 병동에 몰래 들어갔다고?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조태진, 이수혁, 우하윤까지 대동하고?

심지어 우하윤을 제외하면 다들 최소 한 잔씩은 한 상황이었다.

이를테면 술 먹고 라이벌 병원에 침입했다는 소리였다.

‘어후.’

신현태는 회의에 참석하느라 여태 차고 있던 넥타이를 벗어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그리곤 원장 자리에 곱게 놓여 있던 차에 올라타고는 액셀을 밟았다.

걸리기 전에 빼 와야 했다.

‘아, 아직 환자 상태를 몰라서요.’

믿었던 수혁마저 이따위 개소리를 하고 있는 실정이지 않은가.

‘안 그래도 요새 아선, 칠성이랑 껄끄러운데…….’

기업끼리의 경쟁은 사실 서로 정면에서 얼굴 붉힐만한 일이 생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예전에야 네거티브 선전이 먹혔다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시대가 아니어서였다.

오히려 너무 흑색선전을 일삼는 기업은 욕 들어 먹기 딱 좋았다.

만약 욕을 하고 싶으면 자연스레 커뮤니티를 통해 얘기가 돌도록, 정말 세련된 방식을 사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태화나 칠성 그리고 아선 모두 도가 텄다.

모태가 되는 기업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뛰는 대기업들이다 보니 마케팅에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기에 그랬다.

‘그래도 이번엔 그 새끼들이 선 넘었지……. 분명 둘 중 하난데…….’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번엔 태화가 당했다.

칠성과 아선 모두 외래 동을 올리는 둥 몸집 불리기에 나선 상황 아닌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어차피 서울에서 올 환자들 다 정해져 있는데 그러다 적자 보는 거 아니냐는 시선이 있었으나, 이제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 상황이었다.

일단 외국에서도 환자가 몰려올 정도의 의료 강국이 되었고, 또 전국이 일일생활권으로 묶이면서 지방에 있는 환자들도 얼마든지 서울에 있는 큰 병원 진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와중에 태화만 밀리면 안 되니 병원 옆 부지 매입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막판에 어그러졌다.

거의 맹지나 다름없는 땅임에도 값을 쳐주는 거라 사실 태화가 손해를 보는 입장이었는데도 그랬다.

‘그걸 임대해? 미친 새끼들이.’

뒤를 캐 보니 누군가 그 땅을 임대했더랬다.

그것도 제대로 된 강남 빌딩 임대할 수 있는 만큼이나 커다란 돈을 주고서였다.

용도는 주말농장이라는데, 누가 봐도 개소리였다.

태화 의료원 엿 먹어 봐라 딱 이거였다.

‘복수하긴 해야지. 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전임 원장이 술 먹고 병원에 쳐들어가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아직 배후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더더욱 그랬다.

부아앙.

자연히 신현태의 발에 힘이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자동차가 툭 하고 튀어 나가 아선으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 위안이었다.

‘부신은 깨끗해. 그렇다면……. 뭐가 원인일까?’

[갑상선도 드물지만, 고혈당의 원인이 될 수 있죠.]

‘했나?’

[했을 겁니다, 근데.]

그사이 수혁은 바루다와 토론 중이었다.

이현종과 조태진도 그 옆에 서 있었는데, 딱히 의미 있는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있었다.

내분비내과 전공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였다.

그나마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데다가 마스크도 두 개나 끼고 있어서 술 냄새가 풀풀 난다거나 하는 불상사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굴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우. 물 어딨나.”

“저깄네요.”

“떠와 봐.”

“제가요?”

“그럼 내가 떠?”

“하윤이 있잖아요.”

“아, 그래. 하윤아…….”

여느 술 취한 사람들이 그렇듯 그저 민폐만 끼치고 있었다.

쓸 만한 인력인 하윤도 무력화시켜 버렸다, 이 말이었다.

다행한 일은 아직 수혁이 바루다와의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만 해도 바쁘단 점이었다.

아무리 하윤이 보내 준 자료가 꽤 상세했다고 해도, 병원에서 직접 기록을 검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했네. 일단 초음파 정상. 갑상선 호르몬은……. 아직 결과 안 떴네.’

[입원한 지 4일째인데요?]

‘일단 밤에 했고, 당뇨라 생각했겠지. 나라도…… 인슐린 사용하면서 이런 문제 발생한 적이 없었으면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야.’

[하긴. 음…….]

우창윤은 나름 내분비내과 학회에서 인정받는 사람답게 사려 깊게 케이스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수혁이 생각하는 검사는 이미 다 해 봤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슬슬 짜증이 났다.

왜 우창윤이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알겠단 기분이 됐다, 이 말이었다.

‘일단 했던 검사 다 리뷰 하자.’

[음, 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가 있는 한 우창윤보다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우창윤이 뛰어난 의사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현종만 하겠는가.

몇 번 유튜브 나와서 떠드는 것도 봤는데 수재 소리는 들어도 천재 소리 듣기엔 무리가 있는 양반이었다.

분명 허점이 있을 터였다.

‘혈액검사……. 음…….’

[CT……. 음…….]

‘흉부 엑스레이…….’

[거기 뭐가 있을까요?]

‘혹시 모…… 응? 이거.’

[이거? 어…… 애매한데요. 그냥 정상 음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종괴일 수도 있지.’

[종괴라.]

고혈당이 주된 문제가 되는 환자에서 흉부 엑스레이는 정말이지 전혀 쓸모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통은 그랬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애초에 흉부 엑스레이를 왜 입원할 때 루틴으로 찍겠는가.

워낙에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동시에, 문제가 있는 경우 치명적일 수 있어서였다.

수혁은 기관지 쪽에 위치한 희미한 음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판독 결과에는 이미 정상이라 판정된 엑스레이임에도 그랬다.

[음……. 충분히 가능성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상만으로는 판독이 불가합니다.]

‘음, 측면 뷰라도 있으면 좀 다를까?’

[도움은 되죠. 하지만 CT를 찍는 게 훨 낫죠.]

‘여기 남의 병원인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수혁은 의산데.]

‘어. 돼. 의료법상…….’

그렇게 수혁이 CT를 강행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 병동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신현태였다.

“어, 오셨네.”

“쟤는 여기 웬일이래?”

“글쎄요? 문안 왔나?”

“미쳤나? 지인이면 태화에 입원시켜야지. 원장이 돼 가지고……. 프락치야?”

“허……. 이거야 원. 제가 따끔하게…….”

수혁과는 달리 이현종과 조태진은 주정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 수상쩍은 두 사람 때문에 시큐리티를 부를까 말까 고민하던 간호사는, 그나마 찾아온 사람의 행색이 멀쩡하다는 것에 안도하며 인터폰을 눌렀다.

“누구세요?”

“그…….”

신현태는 친절한 나이트 번 간호사의 말을 들으면 대체 나를 누구라 소개하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태화 의료원 원장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높은 확률로 시큐리티가 달려올 터였다.

안 그래도 방금 전에 하나 따돌리고 올라온 참 아닌가.

이제 병동 관리법이 강화되어서 8시 이후론 병문안이 금지된 탓이었다.

그나마 아선에 꽤 와 봐서 길이 익어 망정이지, 화물용 엘리베이터 위치를 몰랐다면 1층에서 컷 당했을 터였다.

“아, 교수님.”

그때 물 한 잔씩 떠다 주고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된 우하윤이 기지를 발휘했다.

사실 기지랄 것도 없고,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교수님이라고 하면서였는데, 간호사는 추호의 의심도 하지 못했다.

신현태의 행색이나 생김새 등이 누가 봐도 의대 교수 그 자체여서였다.

“어.”

심지어 말투도 그래서 이내 관심을 껐다.

‘오늘 외과 계통 교수님들이 여기서 정모라도 하나……?’

그리곤 아직도 내가 얼굴을 아예 모르겠는 교수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워낙 병원이 크다 보니 무리도 아니었다.

3,500병상이라니.

다른 병원 다 죽으라는 얘기 아닌가.

실제로 아선 병원 증축할 때 2차 병원장들이 모여 시위했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신현태는 자연스레 안으로 들어와 수혁 앞에 섰다.

한숨을 쉬면서였다.

“수혁아, 가자……. 왜 여깄는 거야. 이거 누구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아, 근데 삼촌.”

“어.”

원장이라고 했으면 그냥 목이라도 졸라서 나가려고 했는데, 삼촌 소리를 듣자 어쩐지 힘이 빠졌다.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심장도 두근거렸다.

‘안 돼……. 안 된다, 신현태. 너는 원장이야. 얘는 교수고.’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다독여 봤지만 별 소용도 없었을뿐더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수혁에게 설명할 시간을 줬다는 얘기였다.

“우창윤 교수님이 진단을 못 한 환자가 있어요. 고혈당인데 경구 혈당 강하제는 물론이고 인슐린에도 안 듣습니다.”

“단순히 용량이 안 맞는 거 아냐?”

“그렇다고 하기엔 단기적인 저혈당이 너무 잘 와요. 인슐린에 대한 반응은 있어요. 아니, 좋아요.”

“그럼…….”

“무언가 다른 게 있어서 당을 끌어 올리는 거죠.”

“부신?”

“부신하고 목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음…….”

신현태도 원장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천생이 학자 스타일 아닌가.

흔한 케이스가 아니라는 감이 딱 오자마자 흥미가 동했다.

저도 모르게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았을 지경이었다.

“근데 여기 한번 보세요.”

“여기? 이게 뭐지?”

수혁은 거따 대고 엑스레이를 보여 주었다.

뒤에 있던 이현종과 조태진 그리고 우하윤도 집중했다.

그래 봐야 짙은 술 냄새만 풍길 뿐 별 소용은 없었지만.

“음영이 있잖아요, 여기. 이거 종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관지 종괴……? 좀…… 억측 같아 보이는데.”

“네. 지금은 그래요. CT를 찍어 보면 확실할 거 같습니다.”

“어? 남의 병원에……. 아니.”

신현태는 소리를 높였다가 근처에 있는 간호사들을 의식하고는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CT를 야……. 어떻게 찍어. 그리고 종괴가 맞다손 치더라도, 고혈당하고는 상관없잖아?”

“상관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유암종이라면 어떨까요?”

“유암종……?”

신현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신 조태진이 앞으로 나섰다.

“아, 유암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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