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국시 (1)
‘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이 선생 들어와.’
이정민을 살린 것은 응급 충수돌기염, 즉 맹장염으로 흔히 알려진 질환이었다.
프락치에 민감하긴 하지만 증거를 잡지 못한 이현종은, 그저 외과 의사가 심전도 공부한 것이 대견하다는 말만 하고는 그를 보내 주었다.
물론 이런 지령은 내렸다.
‘혹시라도 다른 병원에 수혁이 강의 들었다는 놈 나오면 이정민이라는 새끼 원장실로 올려 보내.’
태화 안에서 공유하는 건 얼마든지 오케이였다.
아니, 사실 밖으로 나돌아도 괜찮았다.
수혁의 뛰어남을 어필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국시 전에는 안되었다.
‘솔직히 그거에 그렇게 목매다는 게 이해는 안 간다만…….’
전문의 시험이라고 해 봐야 교과서 수준 아니던가.
교과서라면 본과 2학 때 벌써 졸업하고 실습 학생 시절부터는 논문과 케이스 리포트로 실력을 쌓아 온 이현종으로서는 따로 전문의 시험을 위해 공부하겠답시고 설치는 꼴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하지만 신현태의 신신당부가 있었기에 일단 그 뜻에 따르고는 있었다.
‘형……. 다 형같이 천재가 아냐. 다 그랬으면 왜 사람들이 형을, 그리고 수혁이를 주목하겠어.’
기분 좋으면서도 설득력 있는 주장 아닌가.
‘하긴 뭐……. 나나 수혁이가 워낙에 뛰어난 사람들이긴 해?’
이현종은 그만 신현태 앞에서 자못 흐뭇해 보이는 미소마저 보이고 말았더랬다.
수혁의 강의가 생각보다도 더 훌륭해 기분이 좋았던지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수혁의 존재가 모두에게 즐거움만 선사하는 건 아니었다.
“이게 진짜 레지던트 강의라고?”
이현종이 싯누런 이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있을 때쯤, 우창윤은 침음을 흘렸다.
“네. 근데 저…… 의심을 받고 있어서요. 이거…… 어디 돌면 안 됩니다.”
이정민 또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유는 달랐다.
우창윤이 제아무리 아선의 실세라 해도 태화에서 펠로우 밟고 있는 외과 후배를 끌고 올 만한 끗발이 있지는 않지 않겠는가.
이정민이 수혁만큼 뛰어나다면야 굳이 우창윤이 나설 필요도 없겠지만.
이정민은 어떻게 봐도 수재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본인도 그걸 알기에 필사적이었다.
“응? 아, 당연하지. 그냥 확인 차원에서 한번 보자고 한 거야. 무리한 부탁은 안 하지. 내가 후배들한테 그런 짓이나 할 사람으로 보여?”
“아뇨, 아닙니다. 아니죠.”
솔직히 안 들켰으면 빼돌렸을 거 같았지만.
이정민은 연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창윤이 실제로 자신의 삶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야 미미할 거 같아도 어찌 되었건 한참 윗사람이지 않은가.
게다가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엇나가 봐야 손해는 자기 몫일 뿐이었다.
누군가 해 주었던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무튼, 이 녀석 이거 진짜 물건이네……. 이만큼 설명한다는 건 아예 심장 생리를 꿰고 있다는 건데……. 순환기 쪽 펠로우도 아니고 어떻게 이러지.”
혹 레지던트가 4년제였던 시절에는 정말 전국 다 뒤져 보면 한 명쯤은 이런 놈이 있을 수도 있었을 터였다.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은 많지 않은가.
특히 의대에는 공부 열심히 하는 외골수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내과가 좀 더 심했다.
그렇다 보니 남들이 볼 때는 정말 재미는커녕 짜증만 나는, 심지어 이미 A.I.가 부분적으로 이식된 기기가 있어 어지간히 정확한 진단을 잡아내는 분야를 들이파는 놈도 있다, 이 말이었다.
물론 이런 경우엔 다른 분과에 대한 지식은 현저히 떨어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다른 것도 교수 뺨치게 잘하면서 이것도 잘했다.
“확실히…… 직접 들어 보니까 잘하더라고요. 솔직히 학회나 학생 때 가서 들었던 어떤 강의보다 좋았어요. 저는 사실 그냥 찍으러 들어간 거잖아요……. 그런데도 지금 심전도에 대해 좀 알겠다니까요.”
“음……. 아, 이거…… 우리 애들도 좀 쫘야겠는데.”
“쫘요?”
“응, 뭐. 아무튼, 수고했어. 다음에 한잔하자고. 내가 맛있는 거 살 테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태화에서 영 길 안 보이면 이쪽으로 오고. 알지? 아선이 태화보다 수술방 더 많은 거. 외과 키우려고 재단 차원에서 노력 중이야.”
태화에 있는 사람을 아선으로 오라고 하는 건 몇 안 되는 특이 케이스 아니고서는 죄 인사치레라고 보면 되었다.
말하는 인간도 듣는 인간도 피차 다 아는 사항이란 얘기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이정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빠져나갔고, 우창윤은 의자에 기댄 채 고뇌에 빠졌다.
‘지금도 시니어들은 국시 따위에 목맨다고 난리들인데…….’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었지만 아선은 사실 태화나 칠성에 비해 3년 차 업무 배제마저도 2주 정도 먼저 실시한 참이었다.
그때 어찌나 반발이 심하던지.
대외 홍보에 열심인 원장까지도 그렇게까지 해야 되냐는 말을 해 왔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3년제로 줄면서 레지던트 숫자가 확 날아가 일이 늘어난 마당인데, 2주나 먼저, 그것도 제일 우수한 놈들을 뺐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걱정 마십쇼. 제가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때는 이렇게 호언했더랬다.
수석이야 태화에 이수혁이라는 걸출한 괴물이 있으니 포기한다손 쳐도, 전체적인 합격률에서는 압도할 수 있을 거라 믿어서였다.
하지만 이 강의를 보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싶었다.
수능으로 치면 저쪽은 대치동 족집게 강사가 전 과목에 붙어 있는 데 반해 이쪽은 의무 방어전에 나서는 교수들이 나선 모양새이지 않은가.
“나라도…… 열나게 해야겠구만…….”
해서 우창윤은 3년 차들을 조이는 방향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선이 기존의 9시에서 6시까지 이루어졌던 의무 자율 학습 시간을 8시에서 10시까지 늘렸다더라는 소문은 금세 다른 병원에도 번졌다.
태화야 이미 수혁을 동원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었고, 그 이상의 노력은 오버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지만.
칠성은 달랐다.
칠성 측 또한 금세 8시에서 10시까지 의무 학습 시간을 부여했고, 동시에 3년 차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고3도 아니고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냐는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두 병원의 실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일각에서는 대체 이번 시험이 얼마나 어려우면 저 병원들이 저렇겠냐는 소문이 번졌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이번 시험 난이도는 극악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우리도 최초로 의무 학습 시간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렇다 보니 각 병원들에서도 앞다투어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고스란히 국시 위원장 및 출제 위원들의 부담이 되었다.
“미치겠네……. 왜들 이렇게 공부를 하는 거야?”
“어렵게 냈는데 애들이 잘해서 합격률이 높으면…… 우리도 보건복지부에 할 말 있는 거 아닐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거기가 그런 거 감안해 주는 곳이야? 오로지 결과만 보는데……. 그딴 거 없지.”
“아니, 그럼…… 아, 나 이거 애들 수준을 모르니까 답답하네. 어떻게 내야 해?”
“더 어렵게 내야지.”
“여기서 더요? 벌써 한 번 수정했잖아요?”
내과 출제 위원으로 선정되는 바람에 벌써 1주일 넘게 집에도 못 가고 있던 조교수 하나가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계속 중얼거리진 못했다.
정교수급인 국시 위원장이 그를 노려보았기 때문이었다.
핏발이 서 있어서 그런가 평소보다도 더 무서웠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전반적인 문제를 훑어보고 난이도를 수정하는 데 있어, 저 양반이 굵직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였다.
“일단…… 수정합시다. 쉬운 문제가 아예 없게 만들어 버려.”
“그러다…… 합격률이 85%보다도 밑으로 떨어지면 어쩌죠?”
“내년에 쉽게 내면 되지.”
“남자애들은 군대 갈 텐데요?”
“아니, 그럼 어쩌라고? 학회장님도 그렇고 보복부도 그렇고 맨날 앵무새처럼 85% 밑으로 맞추라고 하잖아. 이 미친놈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하루 종일 공부만 한다는데……. 이러다 진짜 95% 나와 봐. 그 문책을 어찌 들으려고.”
“하긴……. 하아……. 아니, 이 새끼들이 왜 갑자기…… 저희 병원도 그런답니까?”
“자네? 자네 어디지? 아, 무언 대학 병원? 말도 마. 거기는 합숙이야.”
“일을 좀 그렇게 하지. 속이나 썩여 놓고서 갑자기 또 엉뚱한 효도를 하네.”
조교수는 본인이 붙잡고 공부하자고 할 때는 죽자고 도망만 치더니.
왜 갑자기 미쳐 가지고 공부를 한단 말인가.
교수 된 입장으로서는 당연히 좋은 일이었지만, 문제를 내야 할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하여간…… 다시 냅시다.”
“아……. 네.”
불만을 토로해 봐야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국시 문제는 어려운 것을 넘어 어떻게 이런 문제를 내나 싶을 정도의 난이도로 조정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만큼 출제 위원들의 골머리가 썩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어렵게 내라는데 어렵게 내야지.
하다 보니 또 재미가 있기도 했다.
‘와 이건 내가 봐도 심했다. 나도 답 모르면 못 맞히겠는데?’
내면에 숨어 있던 변태 같은 심보가 속속 모습을 드러낸 탓이었다.
이런 문제를 봤으면 누구라도 걸러줘야 했는데, 지금 출제 위원들은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심지어 누구보다 중립적이어야 할 국시 위원장마저 비슷했다.
“좋아. 이렇게 가죠.”
“네!”
“그래, 정말 어렵게 내자고!”
예년 같으면 합격률 85%는 고사하고 50%도 힘들 정도로 어려운 난이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이들만 몰랐다.
그 참혹하다고까지 할 만한 결과물이 공개된 것은 당연하게도 국시 당일이었다.
2월 3일.
추운 날이었다.
“어우, 날씨가 씨.”
과장 된 몸으로서, 또 차기 원장이 될 몸으로서 응원차 나와 있던 신현태가 말을 동동 굴렀다.
다들 텐트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해도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일단 텐트라는 거 자체가 낯설어서였다.
‘아니……. 우리가 언제 국시 때 응원을 왔다고…….’
이건 마치 수능 날 같지 않은가.
하지만 안 할 수도 없는 게, 각 병원의 국시 경쟁에 불이 붙어도 너무 붙은 탓에 다른 병원들은 버스까지 대절한 곳도 있었다.
안에서 몸 녹이고 간식까지 먹고 들어가라고 만들어 둔 것.
‘누가 의사들 아니랄까 봐 지기 싫어 가지고…….’
하여간 이놈의 경쟁의식이 문제였다.
그 덕에 대한민국에 유독 일반의가 적고 죄다 전문의를 따는 바람에 전반적인 의료 수준이 미친 듯이 끌려 올라가 있긴 하지만.
피곤한 건 피곤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 차량 하나가 들어섰다.
전공의가 몬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차량이었다.
‘검정 제네시스……. 왔구나.’
신현태는 추위도 잊고 한달음에 달려갔다.
차 또한 신현태 가까이에 멈추어 섰다.
“삼촌!”
“어어! 수혁이!”
“추운데 여기서 기다리셨어요? 그냥 같이 오시지.”
“아냐, 아냐. 난 미리 와서 저거 봤지.”
“와……. 텐트가 있네.”
“들어와 들어와. 들어가기 전에 간식이랑 이것저것 준비했으니까 받아 가.”
“아…….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동기들과 같이 온 마당이었다.
그러니까 수혁만 있는 건 아니었다는 건데 신현태는 오직 수혁만 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야속하다거나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국시 준비하면서 또다시 뼈저리게 느낀 탓이었다.
수혁은 보배였다.
“아, 참. 수혁아.”
신현태는 따뜻한 물을 쥐여다 주면서 수혁을 불렀다.
“네.”
“너 자신 있지?”
“네? 아, 합격이요?”
“아니, 그거 말고.”
“그럼요. 만점으로 수석 하겠습니다.”
“좋아. 네가 우리 조커 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