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귀국 (2)
김다현 사장에게도 과분한 대우를 받은 건 굳이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계약서에 도장 찍을 때가 조금 긴장이 된다면 되는 순간이었으나 그것조차 혼자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삼촌을 자처하는 이현종과 신현태가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든 까닭이었다.
[이미 저희 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조정된 겁니다.]
보다 못한 김다현 사장과 남지연 사장이 말렸음에도 그랬다.
덕분에 수혁은 정말로 별생각 없이 도장만 찍으면 되었다.
‘잘한 거겠지?’
[거기서 손해가 나 봐야 돈이 좀 줄어드는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걱정할 거 없죠. 오히려 그다음에 있었던 논의가 더 중요했다고 생각됩니다.]
바루다는 이미 맛있는 거 먹을 정도는 벌게 되었다고 판단한 참이었다.
여기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건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적어도 바루다가 수혁의 기억을 통해 습득한 바에 따르면, 인간은 너무 많은 부를 얻었을 때 일보다는 그 돈을 쓰거나 지키는 데 심력을 소모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거야 어떻게든 수혁을 조종하면 해결이 가능할 것도 같긴 했지만.
애초에 그런 일이 없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해서 너무 수혁이 돈돈 거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 자식이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이 안 되네.’
수혁으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언제는 자본주의의 화신처럼 굴더니만.
갑자기 선비가 되다니.
[국제 진료소까지 한 번에 진행이 될까요?]
‘응? 아니, 그건 어렵지. 센터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던데. 그거 원장님이랑 다 알아서 하라는데……. 이게 어디 쉽겠냐?’
[설마 그거 하다가 전문의 시험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뭔 소리야, 인마. 지금 당장 시험 봐도 만점이야.’
[음……. 하긴 그런 거 걱정할 수준은 한참 지났죠.]
입을 삐죽이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화제를 바꾸었다.
아주 효과적이었다.
지금도 수혁은 아까 사장단이 전해 준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기에 그랬다.
통합진료센터 개소를 위한 서류였는데, 조감도가 주를 이루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검진센터로 쓰고 있어서 그런지 환자를 뺑뺑이 돌리는 데 유리하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이제 소수의 어려운 환자를 받아 진료하기 위한 센터로 탈바꿈해야만 했다.
[와, 딱 보기만 해도 머리 아프네. 수혁아, 이거 어쩌냐.]
수혁에게만 쥐여다 준 건 당연히 아니었다.
명색이 센터장인 이현종에게도 전달되었다.
하지만 수혁과 바루다 그리고 신현태 등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현종이 그렇게 커다란 도움이 되지는 않을 거란 건.
환자 보는 것 말고는, 정말이지 수혁을 위한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아닌가.
특히 행정적인 일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센터 꾸미는 데 도움이 될까?
[수혁아……. 내가 도와줄게. 저 인간은 심지어 심혈관 중재 센터 만들 때도 딱 기계만 고르고 도망간 사람이야. 그때 밑에 있던 사람들 죽어났다, 진짜.]
온전히 자기만을 위한 센터를 만들 때도 도망갔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이었다.
신현태가 이런 일로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거니와 수혁이 알고 있는 이현종이라면 필시 그럴 거 같았다.
‘도와주시겠다고는 해도 내가 많이 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보면 잘된 거 아닙니까? 예산도 굉장히 많이 책정되어 있던데요?]
‘그건 그래.’
대우를 달리해 주겠다는 남지연 사장의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수혁 개인에 대한 대우만이 아니라, 센터에 대한 대우도 달라져 있었다.
어렴풋이 들었던 예산이 인테리어까지 다 해서 20억 정도였던 거 같은데, 무려 다섯 배나 늘어나 있었다.
내년도 인건비도 포함된 금액이긴 했지만, 적은 돈은 결코 아니었다.
세상에 백억이라니.
이현종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망간 탓에, 이는 거의 온전히 차기 부센터장인 수혁의 몫이 되었다.
‘통합진료센터…… 이게 어디랑 비슷할까?’
의욕이 넘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란 얘기였다.
바루다도 그랬다.
이 센터 내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또 쓸데없이 이동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뿐만 아니라 온전히 자리 잡게 되면, 케이스를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알아서 모일 게 뻔했다.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아무래도 응급실 아닐까요?]
‘그렇지?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어. 그럼…… 응급실처럼 공간을 빼야 할까?’
[처음엔 환자가 많이 몰리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북적북적하게 될 겁니다. 적어도 열 개 정도의 병실은 빼야 할 거라 판단합니다.]
‘근거는?’
[수혁이 평균적으로 처리 가능한 협진의 개수는 하루 서른 개가량 됩니다.]
‘흠.’
서른 개의 협진이라.
외래를 떠올리면 별거 아닌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협진은 기본적으로 입원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형태의 진료고, 또 주치의와 지정의가 잘 모르겠는 환자를 보는 것이란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하지만 수혁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바루다가 말을 이었다.
[센터가 구비되고 이현종이 가세하게 되면, 그리고 더 많은 인원이 충족되면 두 배까지 가능할 겁니다.]
‘하루 60명. 엄청 많은데?’
[네, 하지만 그중에서 실제로 전과를 받아서 진료해야 할 인원은 많지는 않을 겁니다. 확률상 매일 1건에서 2건 정도겠죠. 태화 의료원의 의료진 역량을 고려하면 그렇습니다.]
‘아……. 하긴. 힌트 주면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어디 동네 병원에서 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앞으로 수혁에게 협진 의뢰를 하게 될 사람들은 다 태화 의료원의 의료진들이었다.
각기 자기 분야에서 최고 또는 최고에 근접한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아무리 바루다를 탑재한 수혁이라고 해도 그들을 너무 무시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얘기였다.
[아마 전과를 받게 되고 치료 방침이 확실해지거나 환자 상태가 좋아지거나 아예 안 좋아지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1주일 내외가 될 겁니다. 그럼 열 개 정도의 병실로 충분하겠죠.]
‘그렇군. 각 병실은 모두 2인실?’
[네. 격리가 필요한 환자가 절반은 될 테니 실제 가동 가능한 병상 수는 15개 내외가 되겠군요.]
‘15명의 환자라.’
지금 보는 환자 수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적었다.
하지만 저 15명은 이를테면 고르고 고른 환자들일 터였다.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수혁의 입꼬리가 수혁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려 올라갔다.
어느새 수혁은 바루다에게 세뇌당한 나머지, 어려운 환자 보는 일을 고대하게 되었다.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바루다는 그런 수혁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엔 완전히 다 안 돌아갈 겁니다. 어쩌면 태화 의료원만의 환자로는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열 병실을 충분한 공간 두면서 만들려면……. 벌써 3분지 1은 날아가는 거 같은데?’
[수혁, 리홍이와 알 왕자를 떠올리십시오. 거기서도 환자가 올 겁니다.]
‘아……. 외국인들.’
[거기에 더해 지금 태화 바이오의 목표는 국내 최고의 병원입니다. 아마 다른 병원에서도 문의가 오겠죠? 그렇게 만들 겁니다.]
‘가능한 얘기지.’
수혁은 더없이 자신에 찬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곳 태화에서도 최고로 통하는 실력이지 않은가.
심지어 외국에서도 그렇다는 걸 확인한 참이었다.
미국에서도, 두바이에서도 싱가포르에서도 그랬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도 당연히 그럴 것이었다.
[나머지는 검사 장비들로 채우시죠. 인테리어에 얼마만큼의 돈이 들지는 모르겠지만……. MRI, CT, 초음파 정도는 두어도 좋을 겁니다.]
‘그럴 거 같아. 100억이라니. 어마어마하네.’
태화 의료원 1년 수익이 20~30억이 될까 말까 하다고 들은 바 있었다.
이것도 심지어 태화 의료원에서 운영 중인 식당이나 주차장, 장례식장을 제외하면 곧장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칠 터였다
실제로 그런 해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태화 생명이 메워 준다고 들었다.
이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금액이 기부되고 있었다.
덕분에 태화 의료원은 대한민국의 대학 병원들 중에는 실로 드물게 상황이 여의치 않은 환자들도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인 동시에 의료진들 또한 삭감에 너무 민감하게 굴지 않아도 되었다.
다 태화 그룹에서 출혈을 감수하고 있는 덕인데 거기에 100억을 더 준다니.
겉으로야 사회 환원을 표방하고 있지만, 아마도 수혁은 알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네. 우리는 돈 주면 좋죠. 자, 여기에 촬영실 만들고……. 중환자실에 준하는 처치실도 두 개 만들면 좋겠군요.]
‘어휴 이거 비용 장난 아니겠는데. 아까 대강…… 병원 재정팀한테 카탈로그 받아 왔는데, 이거 왜 이렇게 비싸냐?’
의료 기기라는 말에 무슨 프리미엄이라도 붙은 건지 뭔지, 가위도 비쌌다.
재정팀 말에 따르면 독일제라서 그렇다는데 수혁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가위를 굳이 독일제를 쓸 필요가 있나?
해서 수혁이 믿을 수 있으면서도 마음 편히 물어볼 수 있는 선배, 그러니까 조태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야, 달라, 달라. 이가 안 나가. 수혁아, 무조건 비싼 게 좋아.”
“그래요?”
“그렇다니까. 이게 다른 곳도 아니고 사람 몸에 쓸 거잖아. 뭐가 됐든 최고를 써야지.”
“하긴…….”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아, 센터 예산 할당돼서요. 내년 3월부터 바로 개소식하고 진료 시작하려면 이제 슬슬 예산 심의 들어가야 한다고 해요. 승인은 문제없는데 어디에 어떻게 쓸지 빨리 결정해 달라고 하네요.”
“아, 아. 통합진료센터?”
조태진은 몇 해 전 있었던 암센터 새 소식을 떠올렸다.
말이 센터지, 또 하나의 건물을 통째로 올렸던 터라 들어간 돈이 천억 단위였다.
관련된 과만 해도 수십 개에 병상 수가 900병상이 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면 통합진료센터는 솔직히 센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규모가 작았다.
애초에 원래 있던 자리에 들어가는 거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네.”
“예산 얼마나 준대?”
해서 조태진은 많아야 20억이겠거니 하면서 물었다.
“100억이요.”
“아, 그렇…… 응? 100억?”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100억이라고?
지금 배정된 의사라고 해 봐야 센터장, 부센터장 해서 꼴랑 둘인데 100억?
아마 상대가 수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을 거 같았다.
당장 혈액종양내과만 하더라도 예산 문제 때문에 사들이지 못한 기구들이 있었다.
“네. 그거 어떻게 쓸지 고민이에요. 들을 땐 엄청 많아 보였는데……. 기구들 사려니까 또 별거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흠.”
“많지…… 많다 야. 좋겠다.”
“아, 많죠. 아무튼, 비싼 거 사는 게 좋다는 거죠?”
“어? 어어. 야, 어디야?”
“네? 당직실이요.”
“내가 갈게. 도와줄게. 알지? 나 암센터 열 때 펠로우였다. 그것도 전임 보장받은 펠로우.”
“아…….”
그때 펠로우라.
지옥이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긴말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예산 집행 하는 덴 도가 텄을 게 분명했다.
“네. 와 주세요.”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