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55화 (355/1,303)

355화 거들다 (1)

[아무래도 이름이 좀 후지네요, 저보다는.]

‘바루다보다? 그야 당연하지. 아예 뜻 자체가 다른데.’

수혁은 고치다의 순우리말인 바루다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바루다를 만들면서 태화에서 건 기대가 얼마나 컸겠는가.

투입한 자본과 인력을 떠올려봐도 쉬이 짐작이 가능했지만.

이름에도 포부가 넘쳐 흘렀다.

다 고쳐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는가.

“거들다, 이거 괜찮은 이름이겠지?”

반면 거들다는 뭔가 좀 애매했다.

그 이름을 지은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신현태조차 별로 자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뭔가 어감도 좀 그렇지 않은가.

바루다는 바르다랑 비슷하기도 하고 그런데.

거들다는 굳이 비슷한 단어를 찾아보자면 거들먹거리다 정도가 있었다.

뜻은 겸손한데 괜히 거만한 인상을 줄 수도 있다, 이 말이었다.

“네? 네, 저는 좋다고 생각해요. 과장님이 딱 꺼내자마자……. 뭔가 바루다의 형제 같은 느낌도 있고요.”

“음.”

신현태는 수혁의 입에서 바루다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봐도 이놈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바루다 때문에 다리가 불편해진 마당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제삼자 입장에서는 조심스럽기 마련이었다.

“바루다, 거들다. 이름이 좋아요.”

물론 수혁은 바루다에 대해 전혀 악감정이 없었다.

아니, 하도 지랄을 해 대니까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감정이 더 컸다.

머리에 우연히 박힌 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과연 수혁이 지금처럼 주목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닐 터였다.

“음……. 그래, 음.”

신현태는 수혁의 밝은 얼굴을 보며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가만 보면 성격도 좋아. 내가 나이만 맞았어도 소개시켜 주는 건데.’

아쉽게도 신현태는 결혼도 늦게 한 편인 데다가 그 와중에 애 낳는 건 더 늦은 편이었다.

이제 고작해야 중학교 들어가네 마네 하는데 무슨 놈의 소개란 말인가.

아무리 수혁이 마음에 든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뭐……. 걔가 얘를 좋아하냐도 다른 문제지. 이상하게 인기가 없단 말이지.’

참 희한한 일이었다.

다리가 좀 불편하긴 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도 벽에 기대고 있을 뿐, 꽤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고.

김선웅 교수에게 수술이라도 받으면 더 좋아질 가능성도 있었다.

‘태화 의료원 최고의 천재……. 유한 성격에 딱히 외모가 아주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처음엔 우창윤 교수 딸내미랑 좀 이어지려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하윤에게 수혁은 그저 존경스러운 선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했다.

이기자 교수 딸한테는 그냥 첫인상에서 까였다고 들었고.

이런저런 루트로 레지던트들에게 들려오는 말을 열심히 들어 봐도 수혁이 연애한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다.

그저 공부 열심히 하고 가끔 맛있는 거 먹고 일이나 열심히 하고 있다 정도였다.

레지던트로만 보면야 최고였지만.

이미 마음속에서는 조카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기에 약간의 안쓰러움은 있었다.

“과장님, 여기 무슨 추억 있으세요?”

“응? 아니, 왜?”

“아련한 눈빛이셔 가지고요. 사모님이랑 여기 놀러 온 적이 있나 했죠.”

“아……. 아냐, 그런 거.”

인마 내 연애 전선이 아니라 네 연애 전선이나 챙기렴이란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들어갔다.

그사이 화이자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 거들다의 부스를 거의 다 완성했다.

원래 입점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라 할 수 있었는데, 부스 자체가 꽤 컸다.

시연 가능한 컴퓨터를 무려 두 대나 놓을 수 있었고, 집단 감염 당시 상황을 틀어 놓을 커다란 모니터도 설치된 마당이었다.

“오……. 기대 이상인데요. 데뷔 무대에서 이렇게 해 주는 경우가 있나요?”

“아니, 완전 특혜지. 자회사들이나 와서 하는 곳인데……. 타기업, 그것도 앞으로 경쟁사가 될 가능성이 큰 회사가 개발한 걸 이렇게까지 해 줄 수가 없지.”

“태화 전자 라벨이 아니라…… 태화 의료원 개발이고 외주로 처리한 것이 신의 한 수네요.”

“그렇지. 아니었으면 아무리 개인적인 연이 있어도 절대 안 돼.”

신현태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예 이만한 규모의 세미나는 처음 와보는 수혁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거들다 정도의 프로그램에 이 정도라니. 제가 지금 시연 나서면 아예 컨벤션 홀 전체를 대관해도 모자라겠군요.]

바루다 또한 잔뜩 흥분해 있었다.

거들다에 대한 질투가 섞여 있어서 그런가 반응이 보다 격정적이었다.

그래 봐야 거들다는 약한 인공지능일 뿐이고 자아도 없는 놈이라고 해 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저는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느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나요?]

‘느낌이라는 게 있기는 하냐? 인공지능인데?’

[이렇게 무감하니 인간관계도 개판이지.]

‘뭐 인마?’

오히려 화만 더 낼 뿐이었다.

“오케이……. 여기다 프로그램 깔자.”

“아, 네.”

다행한 것은 수혁에게 할 일이 있다는 점이었다.

태화 의료원에서 또 직원이 나오긴 하겠지만.

그들은 홍보팀 직원들이라 사실 프로그램 자체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그저 출발 전 이현종과 수혁 그리고 신현태가 알려준 내용만 숙지하고 있을 뿐이라, 전반적인 관리는 이 둘이 해야만 했다.

원래 학회 발표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이건 제품 시연이니 조금 다를 수 있겠으나, 애초에 학자인 둘에게는 별로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상은 이거 반복해서 돌아가게 하면 되겠죠?”

“어? 어어. 그건 그냥 내가 세팅해 둔 대로 해. 영상 편집을 태화 생명에서 디토라는 업체에 외주 줘서 한 거라……. 퀄이 꽤 좋아. 엄청 그럴싸해.”

“네, 아까 비행기에서 잠깐 봤는데 좋더라고요. 마지막에 수정 더 하신 거죠?”

“어, 그렇지. 내가 그것 때문에 우창윤한테 한 소리 들었어.”

“네? 우창윤? 아선 병원 우창윤이요?”

한때 우창윤 교수 하면 그래도 태화에서도 나름 이미지가 좋았더랬다.

닥터 프렌즈라는 친숙하면서도 의학적으로 틀리지 않은 내용, 그러니까 소위 품위 손상을 일으키지 않는 유튜브에 종종 초빙되어 나가는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선 병원 기조 실장이 되고, 당일 외래 및 각종 병원 수익 증진을 위한 정책을 펼치면서부터는 적어도 태화에서의 평가는 반전된 지 오래였다.

특히 이현종과 같은 원장단 앞에서는 거의 터부시 되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신현태 입에서 그 사람 이름이 나올 줄이야.

수혁은 눈이 동그래진 채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거기 와이프가 심혜리잖아. 디자이너 알지?”

“아, 알죠. 그건.”

“그 사람이 대표야, 디토. 학회 통해 통해 한 건데……. 알고 보니까 학회 유튜브는 그쪽이 꽉 잡고 있더라고. 대단한 야망가였어……. 우창윤……. 돈 벌 줄 알더라고.”

“와……. 설마 태화 의료원 유튜브도 그쪽이 맡아요?”

“처음에는 뭣 모르고 맡겼나 봐. 그랬다가 대표 이름 알고, 뭐 이래서 지금은 바뀌었어. 계속 그랬다간 현종이 형 뒷목 잡지.”

“하긴 그렇네요. 어쩐지…… 초반 분위기가 약간 아선 병원 유튜브랑 비슷하더라…….”

묘하게 그쪽 유튜브보다 후진 느낌을 준 거 같기도 했다.

[우창윤. 진짜 무서운 놈이네요. 설마 자기 딸도 일부러 여기 프락치처럼 심어 둔 건 아니겠죠?]

‘아냐, 그건 아닐 거야. 아선보다 태화가 아무래도 더 전통이 있잖아. 의외로 학벌에 콤플렉스가 있다던데?’

[그래서 어떻게든 이기려고 하나.]

‘그럴 수도 있지. 나야 뭐 그분 잘 모르니까.’

[언제는 좋아한다고 해 놓고서 여론 바뀌니까 말을 확확 바꾸시네.]

‘그게 내 생존 기법이지.’

수혁은 신현태 그리고 바루다와 대화를 하면서 부스 최종 점검을 마쳤다.

애초에 화이자 측에서 이런 종류의 세미나를 워낙에 많이 해 온 탓에 실수랄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세팅된 대로 딱딱 돌아갔다.

“좋아. 대강 된 거 같은데……. 딴 데는 뭐 하나 구경이나 가 볼까?”

“좋죠.”

해서 둘은 직원에게 자리를 맡겨 두고 다른 부스를 돌기로 했다.

워낙에 학자 스타일인 둘 아니던가.

하여간에 뭔가 새로운 걸 배운다고 하면 신이 났다.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인 것이, 태화 팀 부스가 꽤 나중에 설치된 참이라 다른 곳 부스는 이미 돌아가고 있는 곳도 있었다.

구경할 만한 것들이 꽤 많다, 이 말이었다.

“음……. 이게 텔레닥터구나.”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최근 북미 전역을 뒤흔들고 있다고 하는 원격 의료 앱이었다.

“아……. 이거 설마 화이자 거였어요?”

“그런가 본데. 아, 여기 써 있네. 개발진은 텔레닥터인데……. 투자를 받았어.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이런 건 아무리 잘 만들어도 승인받고 사람들한테 사용하게 만드는 게 관건이니까.”

아무래도 디지털 헬스 케어 분야는 바이오 제약 분야하고는 조금 다른 점이 많았다.

바이오, 특히 신약 부분은 신약을 만든 회사가 갑이었다.

특히 그 신약이 기존의 약들보다 월등히 우수하면서 동시에 항암제와 같이 누군가의 생명에 관여하는 약이라면 그랬다.

하지만 디지털 헬스 케어 쪽은 아무래도 개인의 생명과 직결된다기보다는 편의성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물론 의료 접근성이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전반적인 생존율이 올라가긴 하겠지만.

‘아주 나중에는 이렇게 될지도 몰라요’라는 얘기를, 그것도 이름도 없는 기업이 하는 얘기를 그 누가 들어 주겠는가.

조금 지분을 손해 본다고 하더라도, 화이자 같은 곳의 도움을 받는 편이 훨씬 나았다.

‘우리도 북미 진출하려면 화이자 투자가 절실하지.’

[네, 아무래도 그렇죠. 국내에서는…… 파이가 거의 없던데요?]

‘응, 전에 신현태 교수님이 주신 자료 보니까 그렇더라.’

대한민국은 빠른 것 같으면서도 또 느린 나라였다.

정치권에서 규제를 손에서 놓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기존의 기득권을 가진 집단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혁은 그 기득권층, 즉 의사에 속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이쪽에 대해 알면 알수록 어차피 넘어갈 수밖에 없는 세계적 추세라는 느낌이 왔기에 조금 안타까웠다.

“와……. 작년에 4배 신장 됐네. 하긴 미국은 진료 보기가 진짜 어렵지.”

“중국에도 이 비슷한 게 있다던데, 맞나요?”

“응? 어, 맞아. 중국이 의외로 이쪽으로 빨라. 거기는 이미 전면 도입 직전이지.”

“허…….”

“저기도 가 보자. 이건 약 정기 배달이네.”

“약을 굳이…… 아.”

약이라는 게 아무리 안전해도 꾸준히 먹어야 하는 약, 그러니까 고지혈증이나 고혈압, 당뇨 같은 건 의사 얼굴을 보거나 확인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되나 하는 생각을 하고 갔는데 딱 항목을 보자마자 왜 이게 흥하고 있는지 알 거 같았다.

“탈모약, 비아그라, 피임약…… 그래. 아무리 미국이 개방적이더라도 이런 약을 대면으로 계속 받는 게 쉬울 리는 없지.”

“아이디어 좋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못 쓰겠지만.”

“음. 근데…… 저긴 뭐길래 사람들이 저렇게 많냐?”

“어, 그러게요. 가 볼까요?”

“그래, 뭐. 할 것도 없는데.”

이런저런 프로그램들을 보다 보니,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바로 근처라 가 보지 않을 이유가 없어 둘은 곧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둘 다 부스 앞에서 얼어붙었다.

“여기 우리 부스네?”

“어……. 여길 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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