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사 뭔 신드롬? (3)
수혁은 대훈과 함께 환자의 감사 인사를 뒤로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수혁에게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일이었지만 대훈은 아무래도 그렇지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얼굴에 함박웃음이 떠 있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환자를 구제한 마당이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걸로 해야 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진단명이 바뀌었으니 이제 모든 검사와 치료가 바뀌어야만 했다.
우선 급한 것은 주말이 지나고 바로 예정되어 있는 트레드 밀 테스트부터 취소하는 것이었다.
“대훈아, 네가 교수님께 전화 드려.”
트레드 밀이 뭔가.
환자로 하여금 운동을 하게 해서 심장에 무리가 가게 만드는 것이 목적 아닌가.
그렇게 해서 증상이 일어나거나 뭔가 변화가 일어나면 아, 이 사람 협심증! 이렇게 진단하는 검사 방식이었다.
딱 들어도 위험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다 가성비를 따져서 실행해야만 했다.
협심증에 대한 가능성이 크게 떨어진 지금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아……. 네. 제가…… 제가 해야겠죠?”
안대훈도 눈치가 이제 여느 2년 차 이상은 되지 않는가.
대강 진단명 보면 어떤 검사를 빼야 하고 어떤 검사를 더 해야 할지 알았다.
전화해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는 안다는 말이었다.
듣는 교수 입장에서는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게 뻔했다.
특히 김문재 교수는 그렇게 너그러운 편이 아니었다.
펠로우가 의견을 제시해도 화를 내는데, 고작해야 레지던트 2년 차가 반대 의견을 내?
벌써부터 불같은 호령이 들려오는 듯했다.
“2년 차잖아. 주치의가 해야지.”
하지만 수혁이 하라는데 씹을 수는 없었다.
속으론 혹시 수혁이니까 대신 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수혁은 남이 하는 게 답답해서라도 직접 나서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원래는 주치의의 일이었다.
주치의 뜻부터가 환자를 도맡아 본다는 것 아니던가.
3년 차, 즉 치프는 그런 주치의가 실수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었다.
‘하……. 김문제…… 아니, 김문재…….’
대훈은 심호흡을 하고는 병동 전화기를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면서였다.
다행히 10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주말이니 혹 늦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의대 교수들이란 사람들은 병적으로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픈 게 아닌 한 지금쯤은 일어나서 뭔가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어쩌면 학회나 작은 집담회 등에 참석했을 수도 있었고.
“음. 류마티스 김문재입니다.”
병동 전화라 그런지 벨이 많이 울리기 전에 받았다.
대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2년 차 안대훈입니다. 이번 달 교수님 주치의 맡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 인사하려고? 내가 지금 좀 뭘 하고 있는데.”
“환자 노티 때문입니다, 교수님.”
“아……. 노티.”
김문재 교수는 곤란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끊지는 않았다.
내과 환자들은 심각한 기저 질환을 갖고 있는 게 보통 아니던가.
별거 없지 않으려나 했던 주말에 입원했던 환자가 중환자실로 내려가거나 심지어 사망해 버리는 일도 종종 있었다.
“빨리해 봐.”
“네. 박진하 환자 남자 52세 환자분입니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교수님께 치료받던 환자분이시고, 3일 전 외래에서 흉통 호소하여 입원하였습니다.”
“아, 뭐야. 경색이야?”
노티 할 환자가 흉통 환자였다는 말에 대번에 목소리 톤부터 바뀌었다.
자칫 잘못하면 병실에서 초상 치를 수도 있는 상황 아니던가.
김문재 교수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보다 더 급할 수 있는 일은 없을 터였다.
“아, 경색은 아닙니다.”
“휴, 놀랐네. 그럼 뭐야.”
“새벽에 흉통을 호소하시긴 했습니다. 그래서 ECG 찍었는데 정상이었고, 동 시간대에 나간 심근 효소 검사에서도 음성 소견을 보였습니다.”
“딱 아플 때 나간 거 맞아?
“네. 음성이었습니다. 신속 반응 검사에서도 그랬습니다.”
심근 효소 검사는 심근경색을 감별하기 위한 검사이지 않은가.
심근 효소가 과연 얼마나 올랐는지 보는 것도 중요하기야 하겠지만, 이건 시간이 좀 걸렸다.
골든아워가 짧은 질환이니만큼 그것보다는 더 빨리 확인할 수 있는 검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신속 반응 검사였다.
효소 수치가 얼마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정 이상이면 색이 변하는 키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걸 쓰면 수 분 내에 양성인지 음성인지는 알 수 있었다.
“음, 이상하네. 그럼 지금은?”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 그래. 수고했네. 그럼…….”
그것도 괜찮고, 수치도 좋고, ECG도 정상이라는 말에 긴장이 풀린 김문재는 대번에 전화를 끊고자 했다.
“어어, 교수님!”
대훈으로서는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본론도 꺼내지 않은 시점 아닌가.
너 틀렸고, 수혁 선배가 그러는데 이게 맞대 뭐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데 그냥 끊어 버리면 낭패였다.
“뭐야, 왜.”
“그…… 이수혁 선생님과 같이 오전에 환자 같이 문진을 했는데요.”
수혁 얘기를 꺼내면 화를 낼 거 같기는 했다.
하지만 대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잘것없는 2년 차의 얘기에 이 사람이 과연 귀를 기울이겠는가.
“아……. 씨. 뭔데.”
이수혁이라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우선 김문재 본인이 개망신을 당한 전력이 있었다.
또 바로 어제는 박상헌 교수가 침몰당했다.
스탠스가 다른 것을 감안하고서라도 난 놈은 난 놈이라는 거 정도는 인정해야만 했다.
“네, 교수님.”
대훈은 예상대로 짜증은 내지만 귀는 기울이고 있는 김문재 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환자 5년 전부터 류마티스 관절염 진단받고 교수님 외래 진료 중이었습니다.”
“그건 알지.”
“증상 조절이 잘되는 편이라 1년 전부터는 상비약으로 비스테로이드성 진통 소염제만 처방받은 채 지냈습니다.”
“그것도 알아.”
“그리고 3개월 전부터 손과 발에 농포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김문재는 그것도 안다고 하려다가 말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그랬다.
‘농포? 손발에 농포?’
농포는 사실 꽤 눈에 띄는 질환이었다.
3일 전에 입원시키고 지켜보고 있던 주제에 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건 어찌 보면 직무유기였다.
물론 김문재 교수는 그렇게까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탓할 사람을 떠올렸다.
‘망할 주치의 놈이……. 그런 것도 하나 캐치를 못 하나.’
농포가 있는 걸 알아내서 노티를 해야 알 거 아닌가.
세상에 교수가 얼마나 바쁜 직업인데 일일이 환자 손발을 들추겠는가.
물론 이현종이나 신현태였다면 거의 무조건 발견했을 테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김문재는 정신 승리 중이었다.
“또 3개월 전부터 여드름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다만 해당 병변은 근처 피부과에서 압출하고 약을 발라서 현재 그렇게까지 눈에 띄지는 않습니다. 원래 피부가 좋은 편이 아니라 트러블이 많기도 하고요.”
“흐음. 여드름도 있어?”
“네. 그리고…….”
“또 있다고?”
“네, 교수님.”
“계속해 봐.”
김문재 교수는 가슴이 조금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류마티스 질환에 있어 농포와 여드름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기에 그랬다.
기저 질환의 악화를 놓쳤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걸 하필 이수혁 놈이 잡아내다니.
‘하아…….’
이렇게 되면 계속 반대파를 고수하는 것도 모양 빠지는 일이었다.
맨날 실력으로 처발리기만 하면서 반대하는 건, 그저 질투심에 그러는 거 같지 않은가.
‘미안하다.’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꺾이는 듯한 기분이 들면서 동시에 김문재 교수는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내서 집담회에 나와 준 임상 강사였다.
재수생에 군대도 다녀온 데다가 이제 펠로우 2년에 임상 강사도 2년을 더 하고 있어서 나이가 무려 39살이었다.
곧 불혹인데, 그동안 김문재 교수 밑에서 박박 구른 대가로 김문재 교수가 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었다.
‘이건 추월당해도 인정이다…….’
어쩌겠는가.
상대가 괴물인데.
게다가 얘기를 들어 보니 있던 자리를 뺏는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냥 위에서 자리 하나 더 만들라고 해서 밀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원래 대학 교수 자리는 교육부에서 인가가 나야 자리가 나는 것이지만, 태화에서 그만한 일도 하나 못할까.
위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면 그런갑다 하고 따라야 했다.
“환자가 흉통만 있는 게 아니라 요통도 있습니다.”
“환자 나이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그런데 그 통증이 심해진 것 또한 3개월이 안 되었습니다. 모든 새로운 이벤트가 3개월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 그럼 같은 질환이거나 적어도 비슷한 군으로 봐야겠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머리가 조금은 더 가벼워졌다.
덕분에 안대훈의 노티에 적의 대신 의욕을 가지고 반응할 수 있었다.
대훈은 이 양반이 조금 변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네. 이수혁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해서……. 같이 엑스레이 리뷰 했습니다.”
“뭐가 보여?”
“과골화 병변이 있었습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마다 있었습니다.”
“가슴…… 흉통도 그래?”
“네.”
“아.”
김문재 교수는 맥이 탁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안대훈인지 나발인지 하는 친구는 마치 증상을 따라가면서 리뷰 했더니 이랬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건 정말이지 웃기는 얘기였다.
일반 엑스레이를 리뷰 하면서 과골화 병변을 찾으려면 애초에 그걸 의심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 말은 곧 이수혁은 이 환자를 보고 얼마 안 돼서 이미 어떤 질환을 떠올렸다는 얘기가 되었다.
‘사포…… 증후군을 이렇게 쉽게 진단한다 이거지.’
김문재 교수도 이렇게 차근차근 얘기를 들어서 진단명이 생각난 것이지, 그냥 봐서는 불가능했을 거 같았다.
실제로 사포 증후군은 케이스 리포트에나 나올 정도로 드문 질환이었으니까.
아예 본 적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근 20년이 넘는 임상 경험을 통틀어 봐도 몇 되지 않았다.
김문재 교수가 태화 의료원의 교수라는 것을 감안하면 지나치다 싶을 지경이었다.
‘이제 3년 차…… 아니지. 이런 생각이 무의미한데.’
여태 김문재 교수가 수혁에게 반감을 가졌던 것은, 수혁이 순전히 어려서였다.
교수 임용되기에는 또 부센터장이라는 직급에 오르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은가.
내년이라고 해 봐야 31살인데.
군 면제라고 해도 너무 어렸다.
하지만 수혁은 그런 잣대를 들이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격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이러니까 그 원장이 싸고 돌지.’
이현종과 몇 번인가 일을 해 본 적이 있었더랬다.
그때 본 이현종은 지독하게 오만하고 또 우수한 사람이었다.
김문재도 멍청한 사람이 아닌데 도무지 인정을 해 주지 않았다.
되도 않는 놈이 그랬다면 그냥 미친놈인가 하고 넘어갔을 텐데.
진짜 똑똑한 사람이 인정을 안 해 주니 미칠 지경이었다.
“저, 교수님?”
씁쓸한 회상에서 깨워 준 것은 대훈이었다.
“어, 왜.”
“그래서 말인데……. 일단 트레드 밀 취소하고 스테로이드 로딩 및 메토트렉세이트(methotrexate) 투약하려고 합니다.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