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화 집담회 (1)
태화 의료원 집담회는 그 규모만 보더라도 어지간한 학회보다 거대했다.
태화 그룹에서 의료원을 지을 당시만 하더라도 전 국민 건강보험을 폐지하고 민간 보험, 즉 태화 생명을 통해서만 태화 의료원 진료를 볼 수 있게 하겠다 하는 포부가 있었기에 우선 건물 크기부터가 남달랐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민간 의료보험의 가능성이 콩알보다도 작아진 상황이었지만, 하여간 투입된 자본의 힘은 여전히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오늘 케이스 뭐라고?”
“비뇨기과에서 혈종으로 협진 냈던 케이스라던데.”
꽉꽉 앉으면 거의 천 명 가까이 수용 가능한 대강당이 복작거렸다.
각 과의 과장들이 오늘만은 반드시 참석하라고 독려해 놓은 까닭이었다.
처음엔 당연히 원장파 과장들만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거 이러다 박상헌 교수 개박살 나고……. 그대로 통합진료센터 이대로 진행되게 생겼어.]
그렇지 않은가.
안 그래도 지금 병원이 반으로 갈라졌는데, 저쪽 편만 우글거리면 박상헌은 박살이 나고야 말 터였다.
해서 응원차 반대편에 선 이들도 패거리들을 우르르 끌고 온 바 있었다.
[물어봤는데, 그냥 별거 아닌 케이스라고는 하더라고.]
거기엔 박상헌이 잘못 놀린 입도 한몫하고 있었다.
‘왜 내가…… 별거 아니었다고 했을까?’
박상헌은 단상 뒤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는 의료진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교수, 펠로우, 레지던트만 오고 있는 게 아니었다.
각 과에 소속된 연구 간호사들까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다시 말하면 그야말로 올 만한 사람 중에 올 수 있는 사람들은 죄다 왔다는 얘기였다.
‘자리가 없으면 나가라…….’
평소엔 그렇게 오라고 해도 안 오던 놈들이 왜 통로에까지 앉고 지랄이란 말인가.
워낙에 빽빽하게 설계된 대강당인데 앉기까지 빽빽한 상황.
천 명 정도는 훌쩍 넘어 보였다.
거의 응급 수술하고 있는 사람들 말고는 다 왔다고 보면 되었다.
‘에이 시발…….’
욕설과 함께 한숨을 쉬다 보니 맨 앞자리에 앉아 있는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제발 오지 않았으면 하던 이들뿐이었다.
좌측부터 김진실, 이하언,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 그리고 이수혁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입을 비죽이며 웃고 있었는데, 박상헌에게는 어쩐지 원수의 사형장에 와서 짓는 표정같이 보일 뿐이었다.
“네로가 손을 이렇게 하나?”
단지 느낌뿐인 것만은 아니었다.
이현종은 실제로 엄지를 아래로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신현태가 겸연쩍어하는 얼굴로 그 손을 가렸다.
“혀, 형. 콜로세움이야? 뭔 그런 손짓을 해.”
“왜. 죽일 놈이 앞에 있는데. 감히 내가 회의 때 그런 얘기하고 바로 다음 날 엿 먹으라는 식의 협진을 내? 저 새끼는 진짜 죽여도 할 말이 없어.”
“진짜 죽이는 건 진짜 안 되지, 형.”
“그걸 못하니까 여기서라도 죽이려는 거 아냐.”
“거 자꾸 죽인단 소리 좀 그만하고. 의사야, 형. 여기 병원이고.”
“왜 사사건건 시비야, 이놈아.”
신현태의 만류 따위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럼에도 신현태는 일단 자리에 앉아 있기라도 한 이현종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 수혁과 조태진에게 이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보였던 모습에 비하면 양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땐 정말이지 박상헌을 반으로 갈라 죽이려는 줄 알았더랬다.
원장 이현종이라고 쓰여 있는 명패를 들고 길길이 날뛰는데, 조태진이라도 있었으니 망정이지 수혁과 신현태 둘이서는 절대 말리지 못했으리라.
“선배, 그렇게 화가 나세요?”
그때 이하언이 끼어들었다.
이하언 교수는 복부 영상의학회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인 동시에 대한영상의학과 학회지, 즉 KCR의 위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사람 아니던가.
이현종이 내심 인정하는 후배라 이 말이었다.
아무래도 신현태 따위와는 말의 무게가 달랐다.
“화가 나지, 그럼. 흠.”
“조금만 있으면 박살 날 텐데요, 뭐. 저도 여차하면 질문하려고 합니다.”
“그래? 너도?”
“그래야죠. 비뇨기과에서 영상의학과에 얼마나 판독 의뢰를 많이 넣는데……. 이럴 때 힘이라도 써야지, 안 그러면 억울해서 못 살아요.”
“든든하네. 어? 든든해. 누구와는 달리.”
해서 이현종은 껄껄 웃으며 신현태를 바라보았다.
신현태로서는 정말이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규모 집단 감염 잘 잡아서 지금의 입지를 다진 게 이현종 아닌가?
‘그거 누가 해결했는데…….’
깊이 따지고 들자면야 당연히 수혁을 포함해야만 하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테크니션인 이현종보다는 감염의 스페셜리스트인 신현태가 훨씬 더 커다란 활약을 했다고 봐야만 했다.
어찌나 화가 나고 분한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아서, 신현태는 잠시 숨을 돌리고 입을 열어야만 했다.
방금 떠올린 것을 차분한 언어로 정리한 상태였다.
논리도 완벽했다.
이만하면 아무리 이현종이 안하무인이라 해도 들어줘야만 할 터였다.
“형. 자꾸 나 무시…….”
“어, 잠만. 시간 됐다. 잡담은 이따 해.”
“자, 잡담…….”
하지만 아무리 논리적이고 차분한 언어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일단 입 밖에 내야 소용이 있는 법이었다.
이현종은 신현태의 입을 손짓 하나로 다물게 한 후, 좌장 자리에 앉아 있는 홍창기 교수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자, 이제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2분 후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그 즉시 홍창기는 마이크에 대고 입을 열었다.
올해 집담회를 도맡아 처리하고 있는 그는 정말이지 열심이었다.
딱히 학회 일도 아니거니와 돈이 더 나오는 원내 보직 자리도 아님에도 그랬다.
‘기조 실장…… 주는 거죠?’
원장 이현종이 자리를 약속했기에 그랬다.
게다가 집담회장이란 자리 자체가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이렇게 매주 열린 집담회는 일 년에 한 번씩 책으로 출판되는데, 교수들이 그냥 반 억지로 쓰는 교과서와는 판매량부터 달랐다.
국내 제일이라고 인정받는 태화에서조차 어렵다고 평가받는 케이스를 모아서 발표하고, 그것을 엮어 낸 책 아니던가.
게다가 내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오늘처럼 다른 과에서도 발표를 하고 있었다.
그 어떤 학회에서 출간되는 증례집보다 내용이 풍부했고 또 쓸모가 있었다.
현역으로 활동하는 임상의치고 이 책의 존재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보면 되었다.
“자, 이제 준비가 되셨으니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금일 증례는 혈뇨를 주소로 내원한 남자 74세 환자입니다. 비뇨기과 박상헌 교수님께서 발표하시겠습니다. 박수로 맞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홍창기가 유려한 솜씨로 소개를 마치자 기계적인 박수가 있었다.
옹호 측에서야 우레와 같은 박수가 있긴 했지만, 박상헌에게 딱히 위로가 되진 못했다.
‘좆 됐다…….’
이 케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잘못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은가.
그것을 바로 잡을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혁이 말을 꺼냈을 때 받았다면 일이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 의견을 거절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박상헌 교수님? 시작하시죠?”
전후 사정을 익히 알고 있는 홍창기가 박상헌을 재촉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그저 좌장의 능숙한 진행이겠지만, 박상헌에게는 그렇지가 못했다.
‘저 새끼……. 조태진이랑 쌍으로 재수 없는 놈.’
특히 끝에 기묘하게 말아 올린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서 혼내고 싶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 혼날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다.
저기 있는 홍창기가 아니라.
“아, 네. 시작하겠습니다.”
박상헌은 후 하고 한숨을 쉬고는 어떻게든 잘못이 적어 보이게끔 포장한 케이스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처음에야 당연히 별문제가 없었다.
일단 박상헌도 교수 아닌가.
그것도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교수 꿈도 못 꾼다는 태화 의료원의 교수였다.
기초적인 내용에서 버벅거리거나 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긴장을 한 상황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환자 내원 2주 전부터 시작된 혈뇨로 내원하였습니다.”
일단 환자가 어떤 병력이 있고, 어떤 수술을 받았고, 방사선치료는 어떻게 받았는지까지 고한 후, 주소를 말했다.
“소변 검사에서 혈색소가 다량 검출되었고 혈액 검사상에서는 빈혈을 동반하고 있었기에 비뇨기과에서는 우선 혈뇨 워크업을 위해 입원시켰습니다. 입원 당시에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으며 구강 섭취가 가능했기에 따로 영양제를 주진 않았습니다. 다만 혈압이 조금 떨어져 있어 수혈을 한 팩 시행했습니다.”
그리곤 비뇨기과에서 대략 어떤 검사와 어떤 처치를 했는지 말했다.
얼핏 들으면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디서 피가 나는지 확인하고, 빈혈이 있는지 확인하고 수혈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겐 그저 웃기게만 들릴 따름이었다.
[교묘하군요. 자세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습니다.]
‘그때 봤자야. 이건 도저히 실드가 안 돼. 아마 내가 저 실수했으면 아빠도 고개 저을걸.’
[그건 그렇습니다. 우리 수혁이 기록은 또 얼마나 철저하게 한단 말입니까. 완전히 잘못 걸린 거죠.]
‘본보기로 날 건드린 건데……. 반대로 됐지.’
발표는 지속되었다.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경과도 얘기하고 있으나 그게 길어질수록 점점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게끔 되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단순 혈뇨야? 신장 조직검사는 안 하나?”
“일단 날짜가 안 넘어가는데.”
“뭐야…….”
박상헌이 아무리 혈뇨 환자를 진료하는 기본 원칙에 대해 자세히 말하면 무엇 하겠는가.
여기 모인 태반은 사실 혈뇨 환자를 볼 일이 없는 사람들인데.
다만 우연히 자기 환자가 혈뇨를 가졌을 때 실수라도 하지 않기 위해 여기 앉은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본론에서 벗어난 곁가지, 즉 원칙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시작해.’
이현종은 웅성거림이 충분히 커졌다고 판단이 되었을 무렵, 홍창기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홍창기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마우스를 조작했다.
톡.
그와 동시에 빔프로젝터가 띄워 주고 있던 화면이 나가더니, 다른 화면이 떴다.
“어?”
제일 놀란 건 다름 아닌 박상헌이었다.
그가 준비했던 피피티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아예 결론조차 만들지 않은 채 주구장창 혈뇨의 의의, 혈뇨의 검사, 혈뇨의 치료, 심지어는 혈뇨의 역사까지 늘어놓아서 시간을 때우고자 했던 피피티 대신 다음 날 자료가 떡하니 떠 있었다.
‘이게 뭐야.’
멍한 얼굴이 된 채 화면을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홍창기 교수가 입을 열었다.
“뭐 하세요? 발표 계속하시죠.”
지가 발표 자료를 바꿔 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좌장이라니.
세상 그 어떤 학회장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터였다.
어쩌면 의학 역사상 최초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지금 뜬 피피티 화면이 오히려 원래 화면보다 더 그럴싸해 보였다.
케이스 발표하랬더니 혈뇨에 대한 강의를 늘어놓고 있지 않았던가.
그보단 당연히 환자 자체에 관한 얘기가 납득이 갔다.
“어…….”
그렇지 못한 건 박상헌뿐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질 무렵 눈에 들어 들어온 것은 수혁이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앞에서만큼은 그나마 눈치를 보던 녀석.
‘얼굴 봐라.’
[이제 슬슬 우리가 나설까요?]
그 녀석이 실실 쪼개고 있었다.
이현종보다도 더 얄미운 얼굴을 하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