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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닥터-313화 (313/1,303)

313화 공표 (1)

“어, 또 보네.”

예정된 회의 시간은 오후 여섯 시.

뭔 놈의 회의를 남들 퇴근하는 시간에 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외래나 수술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병원 특성상 회의 시간은 새벽 아니면 저녁에 잡히는 게 보통이었다.

그나마 오늘은 새벽이 아니니 좀 나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아, 네. 교수님.”

조태진은 김효열 교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수술이 끝난 지 이제 거의 12시간째인데, 상태가 아주 좋았다.

우선 내시경으로 보았을 때도 그렇고 수술 후 찍은 CT에서도 그렇고 뮤코마이코시스가 남은 거 같진 않았다.

전혀 자라 나오는 게 없었다.

“그래, 좀 쉬었어?”

“점심시간에 눈 좀 붙였더니 훨씬 낫네요. 백정완 교수님은요?”

“오전 외래 끝나고 행방불명이야. 분명 어디서 주무시고 계실걸.”

“내과나 이비인후과나 대빵께서 다들 괴짜시네요.”

“그런가? 그렇게 듣고 보니까 또 그렇네.”

덕분에 둘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현재 시각은 5시 50분.

아직 회의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현종이 앉아 있었다.

원장이 원래 좀 일찍 와야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겠지만.

적어도 태화 의료원의 원장 이현종에게는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어…….”

“뭐가 어야. 가서 자리 찾아 앉아.”

“아, 네.”

해서 입을 벌리고 서 있으려니, 이현종이 턱으로 내과 쪽을 가리켰다.

워낙에 교수가 많은 병원이다 보니 늦게 오면 자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 말은 곧 안 와도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었는데, 부득불 조태진이 온 것은 다 수혁 때문이었다.

‘설마 어깃장 놓는 놈이 있을 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조태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아무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온 사람이 한둘이 아닌 거 같았다.

수혁과 연이 닿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산부인과 진태림에 정형외과 김선웅, 신경외과 최낙필……. 영상의학과 이하언, 김진실……. 어이구, 김승규 교수님까지.’

마지막 사람에 다다랐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조태진도 덩치로만 따지면 어디 가서 꿀리지 않을 자신 있는 사람인데.

이 인간은 덩치도 덩치지만 얼굴이 진짜 무기였다.

‘하긴 어딜 가도 시비 털린 적이 없었다고 하더라.’

심지어 모스크바에서 열린 학회 갔을 때조차 옷깃 하나 스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전설 아닌 전설이 있었다.

그래도 러시아 형들, 그러니까 슬라브 민족이라고 하면 나름 전투 종족인데도 그랬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누구 하나 에이, 설마요 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들 그럴 만하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거의 무슨 격투 만화 바키에 나오는 악당처럼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저 사람이 나서 주면 뭐…….’

일단 무력에서 끝이었다.

“오, 수혁아.”

수혁이 들어온 것은 55분쯤이었다.

회의실이라는 게 본관에 있다 보니 지팡이를 많이 짚어야 했을 터였다.

그래서 그런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렇게까지 티가 나지는 않아서 어지간한 애정이 없고서는 알아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물론 내과 삼인방은 죄 알아보았다.

그중 이현종은 심지어 애꿎은 김선웅 교수를 째려보기까지 했다.

“언제 치료할 수 있는 거야. 어?”

“아니……. 케이스 연습을 하고 있어요……. 게다가 지금은 수술받고 재활할 시간도 없잖아요.”

“어디 어른이 얘기하는데 따박따박 말대꾸야.”

“그…….”

“완벽하게 준비해서 하라고. 알았어? 애 저렇게 다니는 거 보면 안쓰럽지도 않냐? 네가 그러고도 의사냐?”

“아니…….”

김선웅 교수를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침묵시킨 이현종은 그를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된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옳지. 잘 왔어. 일로 와. 일로.”

“네? 거기 너무 중앙 아닌가요?”

“어차피 네가 오늘 주인공이야. 빨리 와. 자리 비켜 준다, 자꾸 그러면.”

“아이고, 알겠습니다. 네.”

레지던트 신분에 전체 교수 회의에 온 것만으로도 이미 기 빨리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 회의의 주요 안건 중 하나가 된 상황 아닌가.

그런데 자리까지 원장 자리에 앉으라고?

그건 너무 민망한 일이었다.

[언젠간 앉을 자린데, 미리 앉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만?]

바루다야 언제나처럼 미친 소리를 해 대고 있었지만.

아직 수혁은 그래도 인간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반적인 상식에서 너무 벗어나는 짓을 할 수는 없다, 뭐 이런 말이었다.

‘닥쳐.’

해서 수혁은 이현종에게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을 바루다에게만 속삭여 주고는 신현태 옆자리로 가서 앉았다.

“오, 수혁이 기조실장님 자리 앉았네.”

“어이구.”

알고 보니 기조실장 자리라 황급히 한 자리 떨어져 앉아야만 했다.

“거긴 교육수련부장…….”

“아이…….”

“그냥 앉어. 그놈 그거 뭐……. 별 힘도 없는 놈이야. 네가 이겨.”

“이, 이기긴 뭘 이겨요…….”

옆도 꽤 높은 사람 자리였는데, 이번엔 옮기지 못하고 뭉개야만 했다.

어느새 정한 시간이 된 까닭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래도 시간이 좀 있긴 했을 터였다.

원래 교수란 사람들이 수술이나 외래 말고 다른 일에 대해서는 느슨하게 생각하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자리가 꽉 들어찬 것도 모자라, 서 있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만큼 오늘 안건에 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뜻이리라.

[자율 신경 조정하고 있으니까……. 그냥 그대로 앉아 있기만 해요.]

‘아, 어쩐지 하나도 안 떨리더라.’

[제가 누굽니까. 아, 갑자기 김승규 교수는 보지 말고. 그럼 필요 이상으로 더 해야 해.]

‘오케이. 그 은 조심해야지.’

[이봐, 이거.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러잖아.]

‘내 잘못은 아니다.’

[그건 맞습니다.]

바루다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간 듯한 김승규 교수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둘 사이에 가벼운 대화가 오가는 동안, 이현종은 자리에 모인 면면들을 살폈다.

아군도 많았지만, 중립도 많았고, 무엇보다 이 결정에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반발이야……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지.’

평소 수혁이라면 둥가둥가 춤을 추는 이현종이지만.

그 또한 원장이 되었을 만큼,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이 되는 사람이었다.

전례 없는 파격 인사가 전통을 특히 중요시하는, 그러니까 보수적인 병원 사회에서 어떻게 보일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태화가 실력 지상주의를 들이밀고 있더라도, 병원에서는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하지 않았는가.

예로부터 도제식 교육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곳이라 그랬다.

“안녕하십니까. 원장 이현종입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나 이현종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누구나 자신을 좋아하길 바란 적도 없지 않은가.

진짜 잘난 놈은 남들 시선 신경 안 쓰고 사는 법이라고, 이현종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단…… 예산안이 있는데. 사실 이건 별로 바뀐 게 없어요, 지난달이랑.”

해서 이현종은 회의를 강행했다.

다들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예산이 곧 돈 얘기이니만큼 혈안이 되어 달려들었을 안건임에도 그랬다.

적어도 오늘 모인 이유는 그게 아니어서 그랬다.

“이건 넘어가고. 반대하시는 분은 손 드시고.”

덕분에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작한 지 불과 20분쯤 되었을 무렵 벌써 마지막 안건에 도달했을 지경이었다.

‘이 사람들 보소.’

이현종은 마지막 남은 서류를 집어 들며 다시 한번 회의실 내부를 돌아보았다.

보통 마지막 안건쯤 되면 모여들었던 이들 중 절반은 사라지고 없어야 정상이었다.

회의 땡땡이 치는 게 이현종만의 특성은 아니란 뜻이었다.

자기 얘기 끝나면 귀신같이 걸려 오는 전화를 받고 없어지던 놈들이 어디 한둘이란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더 늘어 있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다고 해야 할까.

책상 치우고 스탠딩 공연이라도 해도 좋겠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만큼 관심이 쏠렸다……. 이 말이겠지? 소문도 대강 돌았을 거고.’

두바이 팀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아무리 남지연 사장이 입단속을 시켰다 하더라도 얼마간은 흘러나갔을 터였다.

카더라식으로라도 그랬을 거란 얘기.

다들 그게 말이 되나 했을 텐데, 떡하니 안건으로 잡혔으니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이현종도 이해는 갔다.

톡톡.

그렇다 보니 천하의 이현종도 이때만큼은 조금 긴장이 됐다.

해서 바로 입을 여는 대신 앞에 놓인 마이크를 두드린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마지막 안건……. 센터 신설입니다. 통합진료센터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과의 협진을 담당하는 센터인데, 이 센터에 협진을 의뢰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일단 원래 협진을 봐야 하는 과 모두에서 이 건은 자력으로 해결이 안 된다는 판단이 서야 합니다. 너무 자주 보내는 과에 대해서는 검토 후 불이익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고……. 아, 모든 사안이 확정된 건 아니에요. 사소한 것들은 당연히 조정이 있을 예정입니다.”

우선은 통합진료센터의 신설이라는 약간은 뭉뚱그린 얘기부터 꺼냈다.

이걸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다들 이게 뭔 소린가 하고 놀라야 할 텐데.

반응이 그렇지가 않았다.

물론 어디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은 그랬지만, 극소수에 불가했다.

“센터는 현재 건강검진센터가 있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건데……. 이 때문에 리모델링이 있을 거예요. 다소 소음이 있을 테니, 근처에 진료실이 있는 과에서는 양해 바랍니다.”

센터의 위치까지 공개되자 누군가 손을 들었다.

이현종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읽은 신현태가 엷은 한숨과 함께 귀에다 대고 속삭여 줬다.

“신경과잖아요. 김태우.”

“아. 김태우 교수님. 말씀하시죠.”

“네, 신경과 김태우입니다. 센터라고 하면 일단 인력이 꽤 들어가야 할 텐데……. 인원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질지가 궁금합니다.”

궁금합니다라고 했지만, 하나도 안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저 빨리 내가 들었던 게 맞냐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올 것이 온 셈이었다.

이번엔 이현종의 입에서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뭐,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지. 여차하면…….’

걱정이라기보다는 짜증이 담긴 한숨이었다.

어차피 위에서 다 결정된 사안 아닌가.

평소라면 교수들이 결사반대 어쩌구 하면 철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니었다.

쩐주의 의사가 아주 강했다.

심지어 두바이 왕자도 가세한 마당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반대하는 교수 처지가 아주 곤란해질 수도 있었다.

“네, 저는 내년을 끝으로 원장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이 통합진료센터의 센터장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혼자 꾸려 나가십니까?”

“아니죠.”

“누가 더 있나요?”

“부센터장으로 이수혁 선생이 부임할 예정입니다.”

“음.”

질문을 꺼냈던 김태우를 시작으로 해서 일련의 교수들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상에 저 핏덩이가 여기 있는 대부분을 제치고 부센터장을 달아?

똑똑하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납득이 되는 건 아니었다.

특히 키우고 있는 제자들이 있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럼 이수혁 선생은 전문의 취득과 동시에 교수가 되는 건가요?”

“네.”

“태화 대학 정관에……. 전임 교수가 되려면 석사 학위가 있어야 하는데요?”

“내년이면 따게 될 겁니다. 지금 대학원 다니고 있으니까.”

“아, 그래요?”

석사를 물고 늘어지려고 했었는지 김태우 교수는 멋쩍은 얼굴이 되어 도로 앉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오히려 아까보다도 더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 여기서 다 털자.’

이현종은 그런 교수들을 보며 후련하단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다 털고……. 그래도 말 안 듣는 놈 있으면 일러야지.’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 드는 칼을 몰래 들고 있는 느낌이 이런 건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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