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급성 빈혈? (3)
제일 먼저 수혁에게 보고된 것은 당연하게도 바이털 사인이었다.
그중에서도 수혁은 혈압과 심장박동 수에 집중했다.
‘심장박동 수는 95회……. 이게 베이스일 리가 없지?’
[정상 범위이긴 하지만 환자의 몸을 보면 상당히 운동을 한 몸입니다.]
심장박동 수와 건강과의 상관관계는 이미 수없이 많은 논문에서 증명된 바 있었다.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강 기저 심장박동 수가 낮을 수록 환자의 체력이 좋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근거는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기저 심장박동 수가 높다는 건 체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할 텐데, 수혁은 이 환자의 체력이 원래 빈약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심지어 어떤 부분은 아니, 대부분의 근육이 수혁보다 나아 보였다.
[그건 저분이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수혁이 너무 빈약해서라고 사료됩니다. 왕자만 해도 수혁보다 거의 두 배는 건장해 보입니다.]
‘인종의 차이 아닐까?’
[아뇨, 전혀 아닙니다.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의 차이를 보일 수야 있겠지만, 이정도로 극명하게 차이가 나면 노력의 차이라고 해야죠.]
‘그…….’
수혁은 뭐라 반박할 말을 찾고자 했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수혁은 상당히 빈약한 팔다리에 슬며시 튀어나온 배를 지니고 있었고, 왕자나 환자는 건강해 보이는 팔다리에 슬림한 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행한 일은 지금 이곳이 피트니스 경연장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점이었다.
수혁은 곧장 본질로 돌아올 수 있었고, 바루다는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하여간 혈압도 낮아. 수축기가 100이 안 돼. 이 말은 곧…… 실혈이 꽤 있다는 얘기야.’
[그렇다고 무턱대고 수혈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음.’
[지금 이 환자의 경우엔 혈관 외 용혈작용이 의심되지 않습니까? 괜히 수혈했다가 피가 더 빨리, 많이 파괴되게 되면 그 부산물로 인해 신장만 망가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렇지, 음.’
혈압이 떨어지는 상황인데 의사가 수혈이라는 수단을 포기해야 하는 건 상당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인간은 혈액보다 더 강력한 승압 효과를 지닌 수액을 개발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법이 영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중심정맥관을 잡죠. 혈압, 심장박동 수를 보니 단순 급성 빈혈이 아니라……. 꽤 급격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원인을 몰라 수혈을 할 수 없으니……. 수액으로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수혁의 말에 바이털 사인을 알리고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던 의료진 얼굴에 조금이나마 화색이 돌았다.
어찌해야 하나 싶은 순간에 딱딱 떨어지는 지시를 들을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행운이었다.
“그럼 중심정맥관은…….”
“제가 할게요.”
“아, 네. 그럼 초음파 가져오겠습니다.”
“초음파…….”
그러고 보니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외국에서는 이미 중심정맥관을 삽입할 때 초음파 하에 삽입한다는 말을.
아직은 수가가 잡히지 않아 경험이 없는 수혁에게는 낯선 개념이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해 준다는데 하면 되지, 그렇지?’
[네, 경험이 될 겁니다. 그리고 초음파라면 이미 많은 데이터가 쌓여 있습니다.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오케이.’
결심이 선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 초음파를 끌고 왔다.
다른 의료진은 수혁에게 중심정맥관 삽입에 필요한 기구를 가져다주었다.
수혁은 보조로 나선 의사가 환자의 목을 소독하는 동안 장갑을 끼며 설명에 들어갔다.
대상은 당연히 왕자와 환자, 둘이었다.
“중심정맥관은 우리 몸에 있는 정맥 중 굵은 정맥에 관을 연결하는 겁니다. 위험하게 들리겠지만……. 엄청나게 많이 하는 시술이에요.”
“정맥을 찌른다고?”
“네. 굵은 바늘을 넣어서 필요한 수액이나 약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넣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방법입니다.”
“하……. 그 말은…….”
내가 의사라면 수액이나 약을 언제 많이 넣고 싶어질까?
환자의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할 때일 경우일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왕자나 환자 모두 얼굴이 나빠졌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요?]
‘뭐……. 익숙하지.’
예상했던 바였기에 수혁은 둘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끊임없이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환자분, 왕자님. 의사는 원래 최악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다소 과한 처치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의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니……. 우선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설레발 쳐 놓고 별거 아닌 일로 끝나는 경우도 정말 많습니다.”
그야말로 청산유수였다.
미리 이런 대사를 준비했나 싶을 지경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수혁은 이미 이보다 훨씬 비극적인 상황을 많이 겪은, 나이에 비하면 경험이 많은 의사이지 않은가.
안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도가 터 있었을 뿐 아니라 환자나 보호자를 설득하는 데에도 도사였다.
원래 내과 의사를 하다 보면 되기 싫어도 이렇게 되는 법이었다.
“그…… 그래…….”
그 덕분이기도 하고, 또 왕자가 아직 자신의 신분을 자각하고 있기도 했기에 영 엉뚱한 반응이 나오진 않았다.
대신 나올 만한 반응이 나왔다.
수혁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근데 아프지는 않나?”
왕자와 환자의 시선 모두 굵직한 바늘에 꽂혀 있었다.
저걸 그냥 아무 데나 꽂는다고 생각해도 죽을 거 같은데, 하필 혈관이라니.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아파서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수혁은 같은 바늘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이런 거 진짜 잘합니다. 너무 걱정 마세요. 평소 피 뽑아 보셨다면, 그거나 이거나 별반 차이 없을 겁니다.”
“음…….”
이보다 더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이 또 있을까 싶은 얼굴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신뢰가 막 철철 흘러넘치진 못했다.
“선생님 준비 다 됐습니다.”
“네, 시작할게요. 일단 너무 걱정 마세요, 최대한 안 아프게 해 드릴게요.”
우선은 그런 상황에서 술기가 시작되었다.
수혁은 먼저 소독된 비닐을 씌운 초음파 프로프를 환자의 목에 가져다 댔다.
딱 그것만으로도 수혁은 혈류가 꽤 빠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맥이 빨랐다.
‘이러니까 오히려 동맥하고 정맥이 확 분간이 되네.’
[그렇다고 상태가 좋을 때만큼 분간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초음파를 대니까 진짜 쉽군요. 최단 거리로 뚫을 수 있는 위치는…… 네, 이곳입니다. 여기라면 별로 거칠 만한 조직이 없군요.]
본래 경동맥이나 경정맥은 상당히 굵은 데다가, 심장에서 얼굴 머리로 가는 가장 중요한 혈관이기도 해서 단단한 근육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일단 수혁이 환자에게 취하도록 한 자세를 취한 상황에서는 약간의 틈이 드러나게 되기 마련이었다.
틈이 심하게 작다는 것이 문제이고 동시에 환자에게 통증을 느끼게 하는 주된 요인이었지만.
수혁은 맨손으로도 곧잘 찾아내는 편이었다.
특별히 손이 더 예민해서라기보다는 바루다가 축적한 데이터 덕이었는데, 지금은 초음파까지 사용하고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을 지경이었다.
“좋습니다. 진짜 별로 안 아플 테니까……. 걱정 마시고……. 움직이지만 마세요. 따끔합니다.”
해서 수혁은 정말 빠르게 틈을 찾아내고는 정확히 바늘을 푹 찔렀다.
아무래도 피부를 찌르는 것이다 보니 약간의 통증이 수반되기는 했지만, 확실히 예상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믿기지가 않았다.
“하……. 하고 있어요?”
“다 끝나 갑니다. 말씀만 안 하시면 더 빨리 끝나요.”
“음.”
수혁은 바늘을 찌름과 동시에 곧장 혈관 안으로 밀어 넣었고, 혈관 내에 연결관을 거치시킨 후에는 곧장 바늘을 빼내었다.
일련의 동작이 워낙에 물 흐르듯 이어져서 그런가, 왕자는 이게 원래 이렇게 쉬운 건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다른 의료진들의 반응은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와…….”
“진짜 빠르네.”
“정맥으로 제대로 들어갔네.”
“와…….”
간혹 이거 하다가 너무 깊이 찔러서 기흉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동맥을 찔러서 의도치 않은 출혈을 일으키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자, 끝났고…… 그사이에 뭐 검사 결과 나온 거 있나요?”
오직 수혁만이 덤덤한 얼굴이었다.
[캬, 연기 보소. 솔직히 평소보다 잘해 가지고 뿌듯한데, 지금?]
‘원래 그럴 때일수록 티를 안 내야 남들이 더 놀라는 법이지.’
[제가 의사 몸 안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사기꾼 안에 들어온 건지 헷갈리네요.]
‘네가 들어와서 더 이렇게 된 거야. 원래는 안 이랬어.’
[기억을 데이터화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부정하기는 어렵군요.]
바루다는 자신이 일정 부분 수혁의 사기꾼화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론 그의 인정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다른 의료진들은 전혀 속사정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감동만 받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반응을 관찰하던 왕자까지도 그랬다.
‘사람이 진짜 됐다……. 보아하니…… 보통 재주가 아닌 거 같은데 티를 안 내네.’
이게 진짜 고단수 후려치기라는 건 미처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수치 나왔습니다. 아, 그래요? 일단 봐 봐요.”
그사이 수혁은 정말이지 덤덤한 얼굴로 검사 결과가 뜬 모니터를 향해 걸었다.
그와 동시에 바루다는 수혁의 망막에 비치는 결과를 모조리 데이터화했고 또 분석하기 시작했다.
[혈색소는 8.1. 생각했던 것보다는 낮네요.]
‘MCV는……. 오, 그새 계산해 놨네? 95……. 정상이군.’
MCV가 정상 수치라는 건 절대 환자 상태가 정상이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심해야 하는 질환군이 달라졌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해서 수혁은 비의료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지금, 굳이 정상이네 어쩌네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수치를 찾아볼 따름이었다.
“망상적혈구는 어떻죠?”
MCV 수치가 정상이라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제 다음으로 중요한 검사는 망상적혈구 수치였다.
망상적혈구란 쉽게 말해 미성숙한 적혈구를 말했다.
이게 너무 많다는 건 조혈, 즉 적혈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 정상입니다.”
그리고 정상이라는 것은 아무튼, 골수보다는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아봐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경우 대개는 골수의 문제보다는 경미한 질환으로 이어지기에 수혁의 얼굴에 안도감이 번졌다.
‘정상이면…… 일단 제일 먼저 의심해야 할 것은 역시 자가면역용혈빈혈이겠지?’
[혈관 외 용혈성 빈혈이면서 MCV, 망상 적혈구가 정상이면 역시 그게 제일 유력한 범인이죠.]
해서 잠시 바루다와 대화를 나눈 후, 재차 방금 자신에게 노티 하고 있던 의료진을 향해 물었다.
“Coomb’s test는요? 나왔나요?”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서였다.
여기서 양성이 나오면 자가면역용혈빈혈, 즉 autoimmune hemolytic anemia(AIHA)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이 좀 쉬워질 텐데.
어째 앞에 선 이의 얼굴이 복잡해 보였다.
“아, 아뇨……. 음성입니다.”
“아, 음성이구만.”
이렇게 되면 일이 꼬이게 되는 셈이었다.
당연하게도 수혁의 얼굴도 어두워졌을뿐더러, 노티 하는 의사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점차 밝혀지기 시작하나 싶었던 빈혈의 원인은 다시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