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61화 (261/1,303)

261화 소아도 잘해? (2)

[6살, 갑자기 움직이지 못한다.]

통화 내용을 들은 바루다는 습관처럼 방금 들은 것을 데이터화했다.

옛날 같았으면 수혁이 대체 넌 왜 그러냐고 하면서 말렸겠지만.

아쉽게도 이미 수혁도 바루다화한 지 오래였다.

근묵자흑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바루다만 수혁화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것만 들어 가지고서는 가능한 질환이 너무 많은데?’

그렇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환자 상태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져 버렸다.

동시에 이기자 교수의 통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상당히 노골적이어서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치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수혁이 또 시작인 거 같은데?”

“뭐라고 했는데? 나 못 들었어.”

“아, 이 교수님이 환자 노티 받자마자 귀 기울이잖아, 지금.”

“아……. 이기자 저 할망구는 아직도 레지던트한테 직접 콜 받는다고 했지, 참.”

따지고 보면 아주 훌륭한 일이었다.

환자 입장에서는 어찌 되었건 가장 우수하거나 또는 최종 결정권을 지닌 사람에게 노티가 빨리 전달되면 될수록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이기자 교수 외래나 입원 후 환자 만족도가 최고 수준인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현종에게는 그리 탐탁지 않게만 보였다.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나? 이 양반도 의외로 순정파라니까…….’

신현태로서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기자 교수가 승리욕과는 달리 상당히 점잖은 사람이라 여기저기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아직 이기자 교수가 결혼하기 전 이현종이 고백했었다는 걸, 신현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 고백에 일조한 바 있었다.

신호에 맞춰 트렁크를 열어 안에 있던 풍선을 날린 게 신현태였으니까.

유독 따사로웠던 햇살 사이로 풍선이 휘날리는데, 어느새 혼자 남아 울고 있던 이현종의 모습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야, 놔.”

“마음 아픈 거 같아서 그렇지.”

그 후로 이현종은 대놓고 이기자 교수를 피했다.

하지만 영영 그러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기자 교수는 유능했고, 이현종 또한 유능한 사람 아니었던가.

게다가 하필이면 이기자 교수가 주로 파던 것이 가와사키병이라 심장과도 연관이 있다 보니 업무적으로 마주치기 마련이었다.

그때마다 속이 좁은 이현종이 딴지를 걸었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이기자를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냥 온 거야? 아니지?”

“네. 소견서 들고 왔습니다. 두통 및 고열 발생한 지 2주째인데 항생제, 항바이러스제 복용했으나 호전 없었습니다.”

“뇌수막염인가? 뇌척수액 검사했나?”

“처방은 나갔는데, 아직 시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게 제일 중요하지! 일단 입원장 내고, 검사는 그냥 그 자리에서 바로 해!”

“아……. 네, 교수님!”

이현종이 어두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동안 이기자의 통화는 끝이 났다.

처음 흥미로웠던 증상에 비하면 간단하기 짝이 없는 결론이었는데, 그렇다고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움직이지 못한다’라는 증상은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는 너무 다양하지 않은가.

실제 신경계통의 문제가 생겨서 일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고열이 있거나 해서 컨디션 난조가 발생해서인 경우가 훨씬 많았다.

이 환자의 경우 2주간 고열과 두통이 있었다고 하니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아마 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증상이었다면 마비라는 표현을 썼을 겁니다.]

‘하긴, 그렇지?’

[태화 소아과가 엄청 유명한데,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는 없죠.]

‘그것도 그래.’

태화 의료원이 물론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잘나가는 분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현종이 이끄는 심혈관 중재 시술팀과 김승규 교수가 이끄는 간 이식 팀이 그러했는데, 소아청소년과 또한 이기자 교수의 감염팀과 더불어 미숙아 케어로 유명한 축에 속했다.

비단 교수들만 잘난 게 아니라 티칭 마인드도 좋아서 태화 출신 전문의들 실력은 의심하지 않는다는 로컬의 속설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레지던트의 노티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이 말이었다.

‘결국, 별건 아니라 이 말인데.’

[그렇죠. 그래도……. 이따 입원하게 되면 한 번쯤 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지, 뭐.’

다만 한번 관심이 간 환자에 대해서는 시작도 좋지만,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지기 마련 아니겠는가.

원래 의사 환자의 인연이란 게 그러한 법이었다.

수혁과 바루다 팀의 경우엔 인연의 범위가 전화 통화 엿들은 것까지 포함하니, 아주 넓다는 것이 차이점이긴 했지만.

아무튼, 수혁은 그 후로도 환자에 대해 일정 부분 관심을 가진 채 신생아실 투어를 끝냈다.

애초에 이기자 교수도 마음이 급해진 마당인지라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은 참이었다.

“그럼, 아까 노티가 와서. 미안해요, 이 선생.”

“아닙니다. 교수님.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틀 밤새고 했던 게……. 더 보람차게 느껴집`니다.”

“그래, 그럼 좋지. 인성도 바르네, 실력만 좋은 줄 알았더니.”

“감사합니다.”

“그럼 또 봐요.”

이기자 교수는 마지막까지 칭찬을 남기곤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뒷모습을 보는 이현종의 얼굴은 당연하게도 그리 좋지 못했다.

‘흥, 이제 와서 내 아들을 사위로 들이시겠다?’

뭐 딸도 엄마 닮았으면 이쁘긴 할 터였다.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 좀 빛이 바랬지만, 젊었을 때는 따라다녔던 동기들이 이현종뿐만은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이쁘긴 이…… 아니지? 내가 미쳤나?’

딱히 이제 와 가정을 이룬 여자를 눈여겨봤다는 반성이 든 것은 아니었다.

동기 중에서 아니, 과 전체에서 제일 잘난 이기자 교수를 꼬신 나쁜 놈은 거기에 평생 쓸 운을 다 썼는지 결혼하고 얼마 안 돼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으니까.

이기자 교수야 입이 무거운 사람이니 어디에도 얘기한 적이 없었지만.

이현종은 알고 있었다.

‘에이……. 개새끼. 기왕 꼬셨으면 잘 살았어야지.’

그때 이기자 교수가 술에 취해 아파트 벤치에 앉아 있던 것을 발견하고, 혹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싶어 멀리서 지켜 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심지어 신현태에게조차 본인이 결혼 안 한 건 의학과 결혼해서라고 했지만.

실은 누굴 봐도 그때 봤던 이기자 교수가 눈에 밟혀서였다.

어차피 평생 가도 이기자 교수가 자길 돌아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어쩐지 그랬다.

“형, 형. 뭐 해.”

옛 기억에 넋이 나가 버린 이현종의 어깨를 신현태가 두드렸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과장실이었다.

“어?”

“아유, 난 또 형 노망난 줄 알고. 아니……. 뭔 생각을 하길래 이렇게 정신이 없어. 형 오면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지 알아?”

“아니, 노망은 인마. 무슨 소리야. 그냥 졸려서 그래.”

“당직 아닌 날은 8시간 이상 꼬박 자면서 졸리긴?”

“아무튼, 그래. 근데 수혁이는 어디 갔어?”

이현종은 눈을 뜬 이후로도 몇 번인가 끔뻑거리더니, 수혁의 부재를 알아차렸다.

‘설마 아직도 이기자 교수를 좋아하나?’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수혁을 잊는다는 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평소 이현종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걔 아까 인사하고 갔잖아. 레지던튼데 바쁘겠지.”

“인사를 했다고?”

“그렇다니까. 형, MRI 찍을까? 나 좀 무서운데.”

“아냐, 아냐!”

“화내니까 더 그렇잖아. 전두엽 억제 풀렸나……?”

“야, 은근슬쩍 눈동자 들여다보지 마라.”

“이런 말 하는 거 보니까 정상인 거 같기는 한데……. 당뇨랑 고혈압은 없지?”

“없다, 인마. 명색이 심혈관 보는 의산데 관리 안 할까 봐서?”

“알았어. 알았어. 근데 왜 이렇게 화를 내, 아까부터.”

신현태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아마도 이기자 교수를 만나고 나서부터라고 지레짐작했다.

‘이거 이어 줘 봐야 하나?’

신현태가 심지어 중매까지 떠올렸을 무렵, 수혁은 소아과 병실 앞에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전화 엿들은 거로?’

[기록 보셨죠? 단순 뇌수막염을 의심하고 있는데, 이상합니다.]

미친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바루다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수혁이 보기에도 합당해 보이는 이유였다.

[환아가 처음 다른 병원에 갔을 때의 주된 호소 증상은 두통이나 고열이 아니라 어지럼증이었습니다.]

‘확실히 뇌수막염에서 제일 처음 호소하는 증상이 어지럼증이라는 건 좀 이상하지.’

[물론 현재 뇌척수액 검사에서 단백이나 백혈구 검출이 높게 나오는 건 세균성 뇌수막염을 시사하지만, 증상이 빗나갑니다. 뭔가 더 캐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그래. 좋지.’

뇌수막염일 가능성이 제일 크긴 할 터였다.

뇌척수액 검사가 그리 말하고 있었고, 또 이기자 교수의 경험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추론과 진단 과정이 무용하진 않을 게 분명했다.

레지던트인 데가, 남의 과 환자이지 않은가.

추론이 깨진다 해도 환자에게 문제가 생길 리 만무했고, 정신적으로 타격 또한 없을 터였다.

[자, 그럼 들어갑시다. 주로 질문할 거리는 숙지했죠?]

‘당연하지. 네가 눈앞에 띄워 놨는데 이것도 못 읽냐, 그럼?’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요.]

‘닥치고 가자.’

병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한 수혁은 문을 똑똑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입원한 환자이니만큼 병실은 다인실이 아닌 2인실이었다.

이것도 요샌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 만큼 태화는 만성적인 병실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마 전 수혁과 이현종이 합작해서 해결했던 집단 감염 이후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그런다고 바로 태화 그룹 차원에서 엄청난 투자가 이어진 건 아닌지라, 칠성 및 아선과 엎치락뒤치락하고 있긴 했지만.

확실히 그 전에 비하면 환자 수가 확 늘어 있었다.

“아…….”

아이 엄마로 보이는, 그러니까 보호자가 수혁을 보고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으니까 의사긴 할 텐데, 명찰에 내과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세희 어머님이시죠?”

“아, 네.”

고민은 수혁이 입을 열자마자 해결되었다.

설마하니 용무도 없이 환자 이름을 알아 두진 않을 거 아닌가.

큰 병원이니만큼, 내과가 온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내과 이수혁이라고 합니다. 잠시 괜찮을까요?”

“아……. 네. 아, 잠시만. 이수혁이요?”

“네.”

“그…… TV 나오신?”

“아……. 네. 나온 적이 있습니다.”

“와, 천재 의사!”

어머니는 그 후로 TV에서 보던 거랑은 다르네라는 영 반갑지 않은 말도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간에 순식간에 라뽀가 형성되는 기분이었다.

[이현종 말대로 유명해지니까 좋은 점이 있군요?]

‘그러니까. 어려 보여서 이게 제일 힘들었는데.’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천재라고 하기는 뭐 하고요…….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요.”

“네네, 얼마든지요. 저희가 좋죠.”

“알겠습니다. 그럼…… 세희야. 처음에 어지럽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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