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53화 (253/1,303)

253화 연구도 외래도 (3)

“후…….”

바루다의 보고를 들은 수혁은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응급실에 전화를 걸었다.

“네.”

상당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초에 이 사람이 받으라고 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네. 저 이수혁입니다.”

“아……. 이수혁 선생. 무슨 일이에요?”

놀랍게도 털보였다.

인턴 땐 이수혁 이름 석 자 대신 이 새끼, 저 새끼 혹은 아예 다른 욕으로 부르더니 이젠 이름 뒤에 무려 선생 자까지 붙여 주고 있었다.

그나마 2년 차 때까지만 해도 수혁이라는 나름 친근한 이름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아니었다.

‘원장 아들에……. 교수는 떼 놓은 당상……. 그에 비하면 나는…….’

막상 전문의 따고 펠로우 남아 보니 교수 되는 게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는 걸 몸소 체험하게 된 까닭이었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간이다 보니 그날 이후론 수혁이 전화만 오면 절로 허리가 숙여졌다.

“네. 방금 아마 외래에서 보낸 환자 있을 거예요. 산부인과 콜 하라고 했는데.”

“아……. 처치실에 있어요.”

“레지던트 1년 차나 2년 차가 왔을 텐데, 지금 당장 분만실로 가라고 해 주세요.”

“어……. 왜요?”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데. 전화를 좀 바꿔 줄래요?”

“어……. 네……. 아니, 응.”

털보는 그래도 내가 펠로운데 전화 심부름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처치실이었다.

정신은 몰라도 몸은 이미 수혁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저기, 산부인과 선생님?”

레지던트가 하나 내려와 있었는데, 인턴과 함께 환자를 붙잡고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쉬워 보이진 않았다.

일단 환자 정신이 온전치가 않았다.

“여기 어디야! 여기 어디냐고 개새끼들아!”

노란 눈에 거친 언사.

간성혼수로 인해 전두엽이 탈억제 되면서 나타나는, 아주 전형적인 소견이었다.

‘산모에 간 기능 부전이라.’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머리가 아파지는데 동시에 온 환자였다.

이럴 땐 발을 빼는 게 상책이었다.

대신해서 산부인과에 연락해 준 수혁에게 고마움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저기…… 저기?”

해서 아까보다는 좀 더 적극적으로 레지던트를 불렀다.

하지만 레지던트는 털보가 어깨를 잡고 흔든 다음에야 뒤를 돌아볼 수 있었다.

“어, 선생님?”

지금 바빠 죽겠는데 누구냐고 화를 내려던 것 같은데, 금세 분노 조절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원래 응급실 털보 하면 그 악명이 대단한 위인 아니었던가.

적어도 지금 태화에서 레지던트 하는 사람치고 이 인간한테 안 당해 본 사람은 드물 터였다.

“어, 이수혁 선생 전화야. 원래 이수혁 선생 외래에서 보낸 환자지? 할 얘기가 있다는데.”

“아……. 네네, 이수혁 선생님 말씀이시죠?”

다행히 나쁜 얘기는 아니었다.

이수혁이라니.

최근 태화에서 가장 시끌시끌한 사람 아니던가.

안 좋은 쪽이 아니라 좋은 쪽으로 그랬다.

이 사람에게 뭐라도 들을 수 있다면 무조건 도움이 될 게 뻔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산부인과 레지던트 2년 차 정다와입니다.”

“아……. 정다와 선생님. 내과 3년 차 이수혁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금 환자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간성혼수는 어떤가요?”

“지금……. 오락가락한다고 들었는데, 안 좋습니다. 일단 수액 주고 있어요.”

“음.”

좋지 않은 사인이었다.

바루다가 리포팅 한 질환 중 가장 경미한 형태의 질환이 아마도 임신성 급성 지방간 증후군일 텐데, 간성혼수는 흔한 증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간염이 동반된 상황이라면 태아에도 문제가 발생했을 수 있었다.

[뭘 망설입니까? 뭐가 원인이든 일단 낳아야 해요!]

탈력감에 잠시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 어떤 고성보다도 효과 있는 외침이라 할 수 있었다.

고막이 아니라 바로 뇌에 대고 외치는 소리이지 않은가.

“아, 그래. 아까 외래에서는 그래도 대화가 되는 수준이었어서 문진을 했어요.”

“네네.”

“지금까지 진료 본 기록도 봤고요.”

“네.”

“그래서 말인데 지금 환자 아마도 급성 간염이 동반되었거나, 혹은 임신성 급성 지방간 증후군일 수 있어요. 둘 다 즉각적인 제왕 절개가 필요합니다. 이전 초음파 기록 보니까 아직 태아가 2kg가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건강했고……. 35주니까 큰 문제 없을 거예요.”

“아……. 네. 그게 의심이 된다 이거죠?”

“네. 확신합니다.”

“알겠습니다.”

정다와는 일전에 수혁이 컨퍼런스에서 발표하던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땐 아직 인턴이었는데, 정말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왔더랬다.

수혁도 고작해야 1년 차이지 않았던가.

근데도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교수들을 휘어잡는 발표라니.

그 후로 정다와에게 수혁은 일종의 신앙이 된 참이었는 데다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역시가 역시였다.

‘그래, 제일 설득력 있는 질환이야. 얼마 전에……. 하나 보기도 했고.’

해서 정다와 또한 곧장 전화를 끊고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그래? 그 두 개를 의심했어? 어……. 알았어, 내 환자니까 일단 음……. 펠로우 선생 보낼 테니까 초음파만 보고 바로 올려. 수술방 연락하고.”

“네!”

교수는 전화를 끊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열심히 하는 애기는 한데……. 상황 파악이 이렇게 빠르다고?’

산모인데 간성혼수가 온 환자를 직접 본 경험이 있다면 쉬이 이해가 가지 않을 만한 상황이라고 보면 되었다.

아무리 태화 의료원의 응급실이 경험이 많은 베테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우왕좌왕 한 번쯤은 해 주고 있지 않겠는가.

근데 이제 고작해야 레지던트 2년 차인 친구가 진단을 내리고 그에 대한 처치까지 딱 생각해서 교수에게 노티를 한다?

‘그……. 신현태 그놈이 맨날 자랑하던 이수혁이란 애나 얘나 삐까 뜨는 거 아냐?’

대번에 신현태 생각부터 났다.

어떻게 된 놈이 과장 회의에 들어와서는 과 얘기보다 이수혁이란 놈 얘기만 하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환장할 노릇인 것은 다른 과장들이 다 부러워만 하고 뭐라 할 생각은 못 한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얘기를 듣다 보면 지금까지 겪은 그 어떤 의사보다 뛰어났고, 또 원장 아들이었다.

해서 맨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는데, 이제야 가슴이 좀 뚫리는 기분이었다.

물론 가슴 저편에서는 감히 이수혁에게 비할 만한 노티는 아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위안이 된다 이 말이었다.

“에이, 전화 안 받네.”

우리 애도 이렇게 똑똑하다고 얘기하려고 했는데, 신현태가 전화를 안 받았다.

어디 또 쓸데없는 회의에 들어갔거나 외래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술도 안 하면서 뭐가 이렇게 바빠.’

외과 입장에서 내과 교수들은 아무래도 좀 성에 안 차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이현종과 같은 순환기내과나 소화기내과 쪽이야 술기를 하니 수술 비슷하게 스케줄이 있을 수 있다지만.

신현태는 진짜 외래만 보지 않는가.

이런 말을 얼굴 앞에서 했다가는 싸움밖에 더 날 게 없겠지만.

아무튼, 산부인과 과장 진태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부우웅.

그러기가 무섭게 전화기가 울렸는데, 펠로우였다.

“어, 봤니?”

“네. 아직 태아는 괜찮은데……. 산모 간성혼수가 꽤 심합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욕설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의식이 처집니다.”

“아이고. 빨리 올라와!”

“지금 올라가는 중입니다. 그래도 정 선생이 늦지 않게 노티 해서……. 제왕 절개 자체가 위험할 거 같지는 않습니다.”

“어어. 알았어, 알았어. 나도 지금 탈의실이거든? 수술방에서 바로 보자고. 몇 번 방으로 가면 돼?”

“어……. 3번입니다.”

“오케이. 알았어.”

의식을 잃었다라.

간성혼수가 정말로 심각해지면서 다른 바이털을 건드리는 모양이었다.

간염이나 급성 지방간에서나 둘 다 산모에서는 신장을 망가뜨릴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던가.

‘하……. 이거 골 때리네.’

이렇게 심각한 환자를 갑자기 보게 될 줄이야.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괜찮았지?’

그게 혹 자기 잘못인가 싶어서 한 번 더 환자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것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초음파도, 피 검사도 괜찮았다.

환자 진술상 이상한 것도 없었고.

‘그래……. 그사이에 뭔 일이 난 거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별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그저 눈앞에 주어진 환자와 그 환자가 처한 상황에만 집중하면 될 일이었다.

벌커덕.

옷을 갈아입고 수술실로 가니, 벌써 환자는 마취가 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아무 마취과나 붙잡고 들어온 것도 아닌지, 주로 산부인과 마취를 담당해 주는 마취과 교수가 들어와 있었다.

“어? 어떻게 시간이 됐나 봐?”

“시간이 되긴. 급하다고 하도 전화를 하는 통에 들어왔지.”

“아, 그래? 그렇구만.”

진 과장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레지던트를 돌아보았다.

이제 보니 펠로우 부르기 전에 마취과에도 연락을 돌린 모양이었다.

‘신현태 이 자식 뒤졌다, 이제.’

지금까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자랑을 퍼부었겠다?

이제는 네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게 얼마나 우수한 일인지 비수술과 의사가 알겠나 싶기도 했지만.

그걸 몰라 준다면 신현태 잘못이지, 이 어찌 진태림의 잘못이겠는가.

“자, 빨리 소독해. 나 손 씻고 올 테니까.”

기분이 좋아진 진 과장은 종종걸음으로 다시 수술실을 빠져나와 손을 씻었다.

다시 들어갔을 땐, 이미 소독이 다 되어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펠로우와 정다와 또한 손을 닦고 들어와서 드랩을 시작했다.

상황이 급했기에 진 과장도 그들을 도와 드랩을 쳤다.

“자, 칼.”

그리곤 드랩이 딱 완성되자마자 메스부터 쥐었다.

지이익.

정확히 털 난 부분 위쪽을 둥글게 지나가는 절개가 인상적이었다.

제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진태림 과장은 자신이 있었다.

“오케이. 됐고…….”

순식간에 복막이 갈라지나 싶더니 자금은 자궁이었다.

보통 이렇게 서두르다 보면 사고를 치기 마련인데, 그런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았다.

“애기 보인다. 환자 혈압 어떻지?”

“조금 떨어지긴 하는데, 괜찮아요.”

“좋아. 지금 애기 나와요.”

“네.”

칼 들고 불과 몇 분 되지도 않아서 아기가 나왔다.

“응애애애!”

그럼에도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아기 울음이 들리고 나서야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아프가 9점입니다.”

그리고 정상이라는 간호사 소견을 듣고 나서부터는 나름 미소도 흘러나왔다.

뭐가 어찌 되었건 둘 중 하나는 살린 것이었다.

“좋아……. 안쪽에 출혈 없고. 이대로 닫을게.”

“어……. 좀 빨리해 줘요. 약간……. 혈압이 낮아지는데.”

“네네.”

“이 환자……. 중환자실로 갈 거죠?”

“응? 당연하지. 중환자실 가야지.”

“아이는 그냥 신생아실로 가고?”

“응.”

“알겠습니다.”

진태림은 손을 쉬지 않고 움직여 봉합까지 싹 마쳤다.

이게 만약 급성 지방간이었다면 금세 좋아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리한 싸움이 벌어질 터였다.

뭐가 되었건 신현태에게는 전화를 걸 요량이었다.

“어, 신 과장님?”

“응, 진 과장. 웬일?”

“야……. 이번에 우리 레지던트가 사고 한번 쳤다.”

“응? 무슨 사고.”

“무슨 사고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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