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배도 아프고 (2)
“아, 이수혁 선생이구나. 이번 달은 편하겠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부탁은 무슨. 그냥 하던 대로만 해 줘.”
“네, 교수님.”
달이 바뀌었기에 수혁은 이제 소화기내과에서 호흡기내과로 소속이 바뀌었다.
이달의 담당 교수는 홍창기.
연구로 단단히 묶여 있는 관계이기도 했기에, 수혁을 아주 반가워했다.
그렇다고 장강명처럼 되도 않는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
그는 장강명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훨씬 자주 이현종과 신현태 그리고 조태진의 주접을 지켜본 바 있기 때문이었다.
‘욕심이야 나지만…….’
괜히 티를 냈다가 뒤질 수도 있었다.
그냥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현종은 쑤실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래, 그럼 이따 오후에 보자.”
해서 홍창기는 그 흔한 커피 마시자는 얘기도 없이 자리를 떴다.
수혁은 잠시 홍창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병동 스테이션에 앉았다.
그리곤 익숙한 손짓으로 컴퓨터를 켰다.
[어제 환자…… 이름이 김명기 맞죠?]
‘어, 김명기.’
남자 48세, 김명기, 직업은 자영업자.
자영업이라고 해 놓고 뭔가 위험한 일을 할 수도 있으니 자세히 알아봤는데, 그건 아니었다.
대학로 근처에 아주 작은 음반 매장과 카페를 겸한 가게를 하고 있는 트렌디한 아저씨일 따름이었다.
[백혈구가…… 에구머니나.]
‘에구머니나?’
[놀랄 때 이렇게 한다던데요. 에구머니나 한 수치 아닙니까?]
수혁은 바루다가 뭘 보고 이러는지 알 거 같았다.
1호가 될 수 없어인지 뭔지 하는 프로를 지나가다 본 일이 있는데, 아마 거기 나오는 출연진의 말투를 따라 하는 것일 터였다.
기계치고는 실없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너무 과하단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환자의 백혈구 수치는 무려 2만 4천을 넘기고 있었다.
중성자 수치는 그중 89%.
명백한 세균성 감염을 가리키고 있었다.
[폐렴이 동반된 걸까요? 엑스레이를 보면……. 다발성 폐렴을 시사하기는 합니다.]
‘이상하지 않아? 이 나이에……. 별다른 기저질환도 없는데 갑자기 다발성 폐렴이 와?’
[기저질환이 없다고 하기엔 5년 전에 염증성 가성 종양으로 폐 부분 절제술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아, 하긴. 음…….’
[물론 그걸 감안해도 진행이 일반적이진 않아 보입니다.]
‘일단 다른 것도 좀 봐 봐.’
[네, 수혁.]
수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랩 검사 결과를 빠르게 훑었다.
빨간 글씨로 표기된, 그러니까 비정상 수치인 검사 결과들이 꽤 보였다.
예를 들면 CRP라든지 하는 수치들.
하지만 감염 외에 다른 것을 시사하진 않았다.
굳이 찾자면 환자의 전신 상태가 많이 안 좋다는 거 정도일까.
아마 몸이 아픈 게 하루 이틀 된 일은 아니겠구나 정도까지는 유추가 가능했다.
[엑스레이는 5년 전부터 찍은 거 싹 리뷰 하는 게 좋겠군요.]
‘음……. 비교 분석 한번 해 봐.’
[아주 편하군요, 수혁?]
‘머리통에 기계 달고 있는데 이런 건 해 줘야지. 너 다 내 에너지로 버티고 있는 거라고. 밥 값해.’
[음.]
기분 나쁜 말이지만, 동시에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바루다는 기계라 논리 회로상 납득이 되면 더는 가타부타하지 않는단 장점이 있기도 했고.
해서 녀석은 불만 토로하는 것을 그만두고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을 주르륵 리뷰 했다.
[우선 가능성 있는 질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발성 폐렴이랑?’
[이전에 수술받았던 질환이죠, 뭐. 감염성 가성 종양의 악화입니다.]
‘아.’
[근데…….]
‘근데 뭐?’
바루다는 수혁의 질문을 듣고도 잠시 대꾸를 하지 못했다.
대신 수혁의 머리 일부분을 더 끌어다 쓸 뿐이었다.
‘이놈이 미쳤나.’
심지어 수혁의 욕설을 듣고도 그랬다.
뭔가 아주 중요한 분석에 들어갔단 뜻이었다.
엑스레이 리뷰 후 이루어진 행동이었기에 의미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해서 수혁은 약간의 어지러움 정도는 참아 주기로 작정했다.
“또, 또 눈 감고 신음 흘린다.”
“차라리 야한 거 보면서 저러면 모르겠는데…….”
“엑스레이 보면서 저러는 거지? 어휴 무서워.”
“사람은 참 좋은 거 같은데……. 취향이 별날 거 같아서 누구 소개도 못 시켜 준다니까.”
“여자친구 없는지 수년 됐다며……. 인물 멀쩡하고, 원장님 아들이니까 아주 부유하진 않아도 부족함은 없었을 텐데…….”
“근데 이렇게 가까이서 얘기해도 되는거야?”
“저럴 떈 누가 흔들어야 깨더라. 오죽했으면 원장님이랑 과장님이 혹시 시저(Seizure: 경련) 아닌가 해서 신경과 의뢰했겠어.”
“아냐?”
“아니래. 정상이래. 그냥 이상한 거야…….”
물론 익숙해진 것은 수혁 하나뿐이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전히 이상하게만 보였다.
아니, 수혁이 우수한 모습을 보여 줄수록 관심 있는 사람들도 더 많아졌기에 오히려 더 도드라지고 있을 지경이었다.
덕분에 한동안 수그러들었던 이수혁 또라이설이 다시 돌고 있었다.
[음…….]
‘뭐야. 뭐.’
당연히 수혁의 귀에 직접 전달되진 않았다.
대다수의 전공의들, 그러니까 레지던트들을 수혁을 경원시하기에 가까이 오지도 못했다.
안대훈이나 우하윤과 같은 진성 팬들이 있기는 한데, 이 둘은 또 이상한 얘기만 들으면 발작하듯 날뛰는 사람들이었다.
이현존, 신현태, 조태진은 숫제 병으로 그 얘기 꺼낸 놈 대가리 깰 기세였고.
덕분에 수혁은 주변 소문과 차단되어 있었다.
[아직 정보가 좀 부족합니다. 다만 이전 수술에서 염증성 가성 종양이라고 했던 거, 정말 그게 맞았는지는 다시 한번 리뷰 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응? 그게 아닐 수 있다고?’
수혁의 얼굴에 강한 의구심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이 속한 병원은 바로 태화 의료원이 아닌가.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이미 들어올 때부터 선별되었고, 들어와서도 양질의 수련을 받은.
그야말로 세계 어딜 가도 일류 소리 들을 수 있는 의사들이란 얘기.
그런데 그들의 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 추론이라니.
곧장 받아들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사진만 리뷰 하면 가성 종양의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여.’
[환자의 담낭염을 변수에 집어넣으면 다른 가능성이 생깁니다.]
‘아……. 이게 다 하나의 원인일 수 있다, 이거야?’
[네, 혹시 추론 가능합니까?]
‘음.’
추론이라.
뭔가 그럴싸한 질환명이 있다는 얘긴데.
아쉽게도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대략 5분간 낑낑대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수혁의 표정을 따라 했다고 해서 많이 반성하게까지 만들었던 그런 얼굴이었다.
보기만 해도 부아가 확 치밀어 올았다.
[이건 시간이 걸려도 인정하겠습니다. 이 바루다로서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으음…….’
[수혁의 머리 수준을 감안할 때, 1~2분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우선 다른 업무에 집중하길 추천합니다.]
‘으으음……. 진짜 뭐가 있긴 한 거지?’
[수혁이 쌓은 데이터에 있습니다. 기억을 못 할 뿐이죠. 4등 졸업자의 머리니, 이해합니다.]
‘이런 젠장.’
고민한 지 딱 10분이 지났을 무렵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겠어.’
의대에 들어가면 시험을 정말 많이 보지 않는가.
블록 강의 때부터는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이 있는 정도를 넘어 한 주에 하나만 있으면 적은 주일 지경이었다.
그렇게 많은 시험을 보게 되면 몇 가지 깨닫게 되는 바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처음 문제를 봤을 때 아리까리한 정도라도 떠올라야 고민이 의미가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처럼 머리가 하얗게 되었을 땐 그냥 모른다고 단정 지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군요.]
‘잉.’
이렇게 말하면 조력자로서 알려 줘야 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런데 바루다는 그냥 그렇구나 하고 신경을 끄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안 알려 줘?’
[아직 가능성일 뿐입니다. 저야 괜찮지만, 수혁에게 알려 주면 너무 많은 변수가 들어가서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어요.]
‘날 너무…….’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겁니다.]
‘너 혹시 최근에 내가 다 맞힌 것 때문에 열 받아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
[저는 수혁의 말대로 깡통입니다. 감정이 있을 리가 없죠.]
감정 없다고 하는 사람치고 진짜 없는 경우를 못 본 거 같은데.
보통 우리 쿨하다고 하고 꽁해 있다가 뒤통수치지 않나?
지금 당장 그랬던 경우를 대 보라고 하면 열 손가락 모자라게 답해 줄 자신도 있었다.
“선생님, 지금 CT도 찍었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이 그걸 허락지 않았다.
늘 든든한 기둥 같던 수혁이 다른 분과로 가 버리는 바람에 초조해진 안대훈이 득달같이 전화를 걸어 온 탓이었다.
“어, 그래? 영상 떴어?”
“네. 지금 넘어옵니다.”
“아, 그래.”
지금 넘어온다는 건 찍는 현장에 내려가 있다는 뜻이었다.
대부분의 주치의가 처방만 내놓고 나중에 돼서야 확인하는 걸 감안하면 대단한 열정이었다.
[저에게 이거 하나는 제대로 배웠군요.]
‘내가 아니라?’
[처음에 이렇게 하자니까 염병했던 게 누구시더라.]
‘너 진짜 감정 없는 거 맞지?’
[그럼요.]
‘흐음.’
수혁이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대훈의 말대로 영상이 스르륵 넘어왔다.
[음?]
‘이거…… 엑스레이랑 양상이 조금 다른데?’
[그러게요. 여전히 폐렴이나 가성 종양도 의심할 수는 있지만.]
더 심각한 질환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어 보였다.
양측 폐에 낀 액체화된 부분(Consolidation)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덩어리진 부분은 암만 봐도 수상했다.
“선생님, 이거 좀……. 그냥 예전 질환이나 폐렴이라기엔 이상한데. 뭘까요?”
“림프종(Lymphoma) 같은 것도 의심해 봐야겠다. 오히려 폐렴 가능성은 떨어져 보여.”
“그럼…….”
“일단 복부 CT는 찍을 수 있을까?”
“아, 네. 푸시하면 될 겁니다.”
“그거 보고 결정하자. 치료 지침은 바꾸지 말고. 어차피 담낭염은 있는 거잖아.”
“네, 선생님.”
수혁은 대훈과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CT를 응시했다.
분명 이렇게만 보면 림프종도 의심해야 하는 소견이었다.
하지만 자꾸 아까 바루다에게 들었던 말이 걸렸다.
‘그때 절제했던 조직을 리뷰 하고 싶다고 했지.’
[아, 아직 가능성이라니까요. 괜히 말했네. 머리 아프시게.]
‘아냐, 아냐……. 뭔가 알 거 같아.’
[모르는 거 같은데. 거울 봐요, 이게 뭘 아는 사람의 얼굴인지.]
‘아냐……. 이게……. 음.’
바루다의 빈정거림에도 수혁은 머리 굴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게 어찌나 맹렬했는지, 바루다는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최소한의 뇌 기능 포션마저도 수혁이 잠시나마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될 지경이었다.
‘아, 알았다.’
[정말요?]
‘정말 가능성일 뿐인데…….’
[어, 어디 가려고.]
‘병리과.’
[리뷰 하려고? 뭘 의심하는지는 말해 줘야지? 틀리면 개망신이라고.]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이건 근거가 확실해. 틀리더라도 다들 감복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