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배도 아프고 (1)
“에헤이, 설마요. 제가 원장님, 과장님 눈독 들이고 계신 거 다 아는데……. 어떻게 염치없이 소화기로 꼬십니까.”
장강명은 생전 술 먹자는 소리 안 하는 이현종에게 이끌려 병원 뒷골목에 앉아 있었다.
원장이니까 그래도 어디 맛집으로 가려나 했더니, 누가 봐도 싸구려 곱창집에 와 있었다.
허름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질 좋은 곱창 쓰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었지만.
소화기내과 의사로서, 그리고 내시경의 대부로서 단언할 수 있었다.
지금 입 안에서 뭉글거리고 있는 이 곱창은 싸구려, 냉동이었다.
“어어, 혼자 따르지 마시고요. 제가 따를게요.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원장님이랑 한잔하는 것도 오랜만이네.”
하지만 그런 걸 입에 넣었다고 튀어 나가는 말도 싸구려여서는 안 됐다.
상대는 태화가 낳은 기인이자, 불세출의 천재 이현종이었으니까.
아니, 태화가 아니라 그냥 대한민국이 낳은 최고의 의사라고 봐도 무방했다.
오죽하면 회의도 안 들어가는데 원장이 됐을까.
그만큼 상징적인 사람이란 뜻이었다.
“말은 잘하지.”
“왜 그러세요, 정말. 자자. 일단 짠 한번 해요. 신 과장님도, 어서.”
“그래, 그래. 형. 장 교수가 아니라잖아요. 짠 해, 짠.”
“거참. 알았어, 해 해. 짠해.”
죽기 살기로 아부를 떨었더니 보람이 좀 있었다.
처음 부를 땐 설마 내 곱창을 먹을 생각인가 싶을 정도로 얼굴이 굳어 있더니.
지금은 그래도 엷은 미소는 띠고 있지 않은가.
해서 장강명은 좀 더 밀어붙이기로 했다.
‘나중에 사과하자, 사과.’
허락을 구하는 것보다 용서를 비는 게 더 쉽다는 명언이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출시된 게임기도 그 수법으로 마련한 바 있는 장강명은 이제 그 명언을 삶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요, 솔직히……. 내 처음에는 욕심이 났어요.”
“이봐, 이봐, 이거. 내가 그랬지? 이 새끼 이거 속이 시커메.”
“아니, 끝까지 좀 들어 보세요. 원장님.”
“그래, 형 끝까지 듣자.”
“넌 새꺄……. 누구 편이야?”
중간중간 이현종의 반발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자리에 신현태가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장강명은 계획했던 말을 다 꺼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랬는데, 막상 데리고 다녀 보니까…….”
“야, 너 말조심해. 내 앞에서 수혁이 깔려고?”
“에? 아니, 무슨 말을 못 하게 하세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발 끝까지 좀…….”
“그래, 형. 왜 자꾸 소주병을 틀어쥐어. 평생 싸움 한번 안 해 본 양반이.”
이제 보니 신현태 없었으면 초상날 뻔했구나 하면서 장강명은 말을 이었다.
조심스럽게 신현태를 도와서 이현종의 손을 풀면서였다.
“너무 잘해요, 잘하는데……. 다리가 걸려요. 소화기는 포기합니다.”
“음. 그래? 근데 더 김 교수한테 다리 나을 거라는 거 듣고 그런 거 아냐?”
“그랬는데……. 아무래도 저희는 그냥 서 있는 게 아니잖아요. 대장 해 봤어요? 똥 싸는 곳으로 내시경 집어넣는데……. 이게 보통 힘든 게 아니거든요.”
“흐음……. 하긴, 그거 보통 일 아닐 거 같긴 해.”
“아, 아 맞아. 원장님 저한테 받으셨죠? 그때 쌩으로.”
“그래, 그때…….”
이현종의 눈이 아련해졌다.
왜 수면으로 안 하고 그냥 하겠다고 했을까.
지옥이 있다면 여기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꼴에 또 원장이라고 장강명이나 간호사들이나 배려해 주는데, 그게 더 힘들었다.
‘배가, 배가 너무 아픈데?’
‘가스 차서 그래요. 방귀 뀌세요, 원장님. 영! 차! 영! 차!’
‘어……. 나올…… 나올 거 같아.’
‘뀌세요!’
‘아니, 방귀, 방귀 말고! 이거! 이거’
‘그냥 싸세요! 어차피 방귀예요!’
‘느낌이…… 느낌이!’
‘느낌만 그런 거라니까요? 영! 차! 영! 차!’
세상에 항문에 대고 응원을 받을 줄이야.
웃긴 건 영차영차 하니까 진짜 힘이 났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전부 장강명 교수의 부담이 되었다.
“힘 좋으시더라고요. 야, 그거 이기고 밀어 넣는데…….”
“그래, 그건 수혁이가 못하긴 하겠다.”
“네. 암만 다리가 서 있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게……. 이건 안 돼요.”
“음.”
장강명은 이현종의 확인하는 듯한 눈빛을 받으며 수혁을 떠올렸다.
‘베게너성 육아종증이 맞았지.’
맞은 정도가 아니라 치료도 완벽하게 진행되었더랬다.
물론 베게너성 육아종증이라는 게 예후가 아주 좋은 질환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입원할 때 상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호전되어 퇴원했다.
환자에게도, 지정의인 장강명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된 셈이었다.
‘소화기라고 꼭 내시경 해야 하나요, 뭐.’
장강명은 속으로도 몰래 중얼거리면서 술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니까…… 오해 푸시고. 제 잔 받으…… 어. 일어나세요?”
“딴 데 가자고. 수혁이 뺏어 먹는 나쁜 새끼한테는 이 곱창이 딱인데, 우리 센터장 장 교수한테는 안 되지.”
“시간이…… 시간이 되려나요?”
“내 아는 곳 있어. 유빙이라고. 택시 타면 거의 바로야. 가. 가서 맛있는 거 사 줄게.”
“아……. 네, 네. 감사합니다.”
수혁이 하나 때문에 먹는 메뉴까지 바꿀 줄이야.
이현종이 얼마나 수혁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중에 용서받을 수 있을까?’
유빙의 메뉴는 이러다 수혁이 꼬시는 데 성공이라도 하면 정말 뒤지는 거 아닌가 싶을 지경으로 비싸고 맛있었다.
‘에라, 몰라. 먹고……. 수혁이 꼬신다. 걘 보물이야.’
장강명이 배은망덕한 생각으로 맛있는 음식을 주워 먹고 있을 때쯤, 수혁은 아마도 이번 소화기내과 마지막 환자가 될 거 같은 환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
[경과가 좀 이상하죠?]
‘치료를 너무 열심히 안 받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상합니다, 이건.]
이틀 전 장강명 교수 외래 통해 입원한 남자 환자였다.
급성 복통으로 내원 후 시행한 검사상 급성 무결석 담낭염(Acute acalculous cholecystitis)에 진단되어 담낭 절제술을 하려 했으나, 폐 기능이 나빠서 수술 대신 장강명 교수가 직접 경피적 담낭 배액술(percutaneous gallbladder drainage)을 시행한 바 있었다.
항생제도 당연히 같이 썼기에 처음엔 호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선생님, 어쩌죠?”
뒤를 돌아보니, 안대훈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이 녀석은 다음 달도 소화기였고, 장강명 교수 파트였다.
바로 내일 손이 바뀌기에 당장 이 환자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아예 모르겠는 증상이 새로 생겼으니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흡, 흡.”
심지어 그 증상이 다른 것도 아니고 호흡 곤란이었다.
‘NYHA 분류로 4기 정도 되지?’
[네. 안정 시에도 심한 호흡 곤란이 있습니다.]
세상에 NYHA 4기라니.
이쪽으로는 아예 증상도 없던 사람이지 않은가.
머리가 절로 지끈거렸다.
“쿨럭쿨럭.”
환자는 기침도 하기 시작했고.
“켁.”
싯누런 객담까지 내뱉었다.
“38.8도입니다.”
거기에 더해 담당 간호사는 환자에게 발열까지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명백한 폐렴을 시사하는 소견이었는데, 이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 환자에게 쓰고 있는 항생제가 적은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양측 폐 소리가 전부 지저분해요. 우선 체스트 찍을게요.”
“네, 선생님.”
“피 검사도 나가겠습니다. 바로 처방 낼 거니까, 확인해서 나가 주세요.”
“네. 컬쳐는 어떻게 할까요?”
“아, 나가 주세요. 고마워요.”
“아니에요.”
수혁은 그 모든 소견을 정리하면서 청진을 비롯한 검진을 해 댔고, 필요한 검사를 쫙 처방했다.
“선생님……. 폐렴일까요?”
“가능성은 있는데, 아직은 알 수 없어. 우선 항생제부터 바꾸자.”
“뭐로 할까요?”
수혁은 되묻는 대훈을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2년 차 되는데 이렇게 묻기만 하면 어쩌나 하는데, 바루다가 타박한 까닭이었다.
[티칭은 내일 하시죠. 지금은 급해요. 환자 누가 봐도 이상한데.]
‘아, 알았어.’
[벌써 교순 줄 아는 거 같아요, 가만 보면.]
‘아니……. 솔직히 교수는 되지 않겠냐?’
[와……. 건방진 언행.]
‘그래서 뭐.’
[아닙니다. 수혁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이 바루다를 지니고 있으니까.]
생각보다는 긴 타박이었다.
“광범위로 바꿔야지. 피페라실린, 타조박탐에…… 씨프로사신으로 가자.”
그래서 그런가, 수혁의 설명은 꽤나 자세했다.
[이야, 이제 이런 건 말 안 해 줘도 척척이군요.]
‘당연하지. 공부를 얼마나 하는데.’
바루다의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에도 들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수혁을 신처럼 받들어 모시는 안대훈으로서는 감동받을 수밖에 없는 처방이라 이 말이었다.
“그리고 체스트 CT 무조건 푸시 해서 빨리 찍고, 12시 넘어가도 일단 나한테도 보고해 줘. 장강명 교수님한테 노티는 네가 하는데. 그 전에 하라고. 알았지?”
“아……. 네.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에게 노티할 만한 말을 미리 알려 주겠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안대훈은 이제 아예 땅바닥에 이마를 처박을 기세였다.
수혁은 그런 대훈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당직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곤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을 띄웠다.
괜히 치료를 열심히 안 받았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벌써 응급실이나 외래에서 입원을 권유받았는데 바쁘단 핑계로 그냥 집에 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때마다 엑스레이만큼은 찍었다는 점이었다.
[이 사진이 5년 전에 찍은 겁니다.]
‘그때도 호흡 곤란으로 왔었네? 아, 그때는 늑막염으로 진단됐어. 사진도……. 음, 늑막염에 합당해 보이긴 하네.’
[입원 도중 소장 폐색이 동반되어 복강경 하 유착 제거술을 시행 받았다는 게 특이하군요.]
‘그냥 제거만 한 건가? 원인 감별은?’
[유착 밴드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고만 적혀 있습니다.]
‘수술장 사진이 없는 게 좀 아쉽네…….’
그게 있었다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없는데.
수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다음 기록으로 넘어갔다.
[이 사진은 2년 전에 찍은 거군요.]
‘흉통을 주소로 와서 찍은 거고……. 음, 사진만 봐서는 가성 종양(Pseudo tumor)이 의심되는데……. 아, 그렇네. 흉강경하 절제술에서 염증성 가성 종양이 나왔네.’
[그 이후 치료 없이 경과 관찰하다가 더 찾아오지 않았군요.]
‘2년 전에도 흉통으로 왔다가 사진 찍었고……. 비슷한 소견인데 이때는 치료 없이 그냥 갔네?’
[네, 치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게 현재 폐 기능 저하의 원인일 수 있겠군요.]
이런 기록 때문에 처음엔 사정이 어려운가 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아저씨가 마이 웨이일 뿐이었다.
심지어 타고 온 차가 벤츠였다는 증언도 있었다.
돈도 있는데 왜 치료를 제대로 안 받아서 병을 키울까.
노상 병원에만 있는 의사인 수혁으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좀 더 사회생활을 해 보면, 세상엔 심지어 자기 몸보다 우선시되는 일도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수혁이나 바루다나 그 정도로 경험이 있진 않았다.
‘일단…… 오늘 나간 검사 결과를 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네. 처방에 빈틈이 있진 않았으니, 우선 기다려 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