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202화 (202/1,303)

202화 죽을 뻔 (4)

염색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시간이 꽤 걸리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정영훈 교수가 평소 가깝게 지내지도 않는 기사를 닦달했음에도 그랬다.

서둘러 모였던 것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허무하게 각자 병동으로 가서 회진까지 돌고 와서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도 오래돼서, 저녁 먹을 시간도 지나 버린 지 오래였다.

“후……. 야, 이거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

보다 못한 수혁이 사 온 라면을 조태진이 땀을 흘리며 흡입했다.

옆에는 덩치는 그만 못해도 수염이 위압적인 김선웅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영훈 교수도 평소 움직이지 않던 몸을 급하게 움직여서 지쳤는지 조용히 라면을 먹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 환자들과 작게나마 관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야, 수혁아 그건 맛이 어떠니?”

“어……. 이거요? 이거 맵긴 한데, 맛있어요.”

“한 입만 줘 봐. 난 진짜 20년 만에 먹는 거 같어.”

어쩌다 이현종까지 와 있게 되었을까.

그것도 언제 어디서나 극도로 미운 한 입만을 시전하면서.

“아, 형. 그럴 거면 그냥 뜯어서 끓여, 나처럼.”

신현태도 와 있었다.

지금 대화만 들으면 퍽 공정한 사람처럼 느껴졌지만.

애초에 사람 수 맞춰서 사 온 거에 껴든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덕분에 수혁은 불편한 다리 끌고서 편의점을 한 번 더 다녀와야만 했다.

물론 미안하다면서 같이 다녀오긴 했으나, 아무튼 간에 한 번 더 다녀오는 게 편해지진 않았다.

“인마, 형이…… 나이가 몇 갠데 이걸 하나를 다 먹니?”

“이미 하나 더 먹었겠다. 수혁이 배고파 그러다.”

“원래 라면이 인마 아들이 끓인 게 제일 맛있어.”

“아니…….”

진짜 아들도 아니잖아라는 말이 넘어오려다 말았다.

생각해 보니 저기 정형외과 김선웅이나 병리과 정영훈은 소문이 사실이라 여기고 있지 않던가.

‘수혁이 미래 생각해 보면…….’

천애 고아라는 게 단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이 옳게만 흘러가는 건 아니란 것을 날이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원장 아들이란 후광은 수혁에게 도움이 됐으면 됐지, 절대 방해가 되진 않을 터였다.

게다가 이현종이 어떤 사람인가.

조금 이상해서 그렇지 의학적으로는 세계 역사에 남을 만한 위인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아들 라면을 뺏어 먹는 애비가 어딨어.”

“여깄다, 인마. 수혁아 너는 좋지?”

“네? 아, 네. 좋죠. 하하.”

“수혁이가 착해서 망정이지. 나 같았으면 사춘기 두 번 세 번도 왔겠다.”

김선웅 교수는 내과 과장 신현태와 전설의 원장 이현종이 수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환자 제대로 보는 걸 최우선으로 두고자 하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솔직히 슬라이드 결과보다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가 더 궁금했다.

‘조태진까지 이러고……. 똑똑해서 그러나?’

이번 일을 보면 똑똑한 거 같긴 한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뭐 이런 생각을 할 때쯤에 하필이면 이현종하고 눈이 마주쳤다.

“그…….”

중요한 거 아니면 적극적으로 소거하는 뇌를 지닌 이현종은 당연하게도 김선웅의 이름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김선웅 교수는 원장의 이러한 습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형외과 김선웅입니다.”

“아니, 알지. 뭘 자기소개를 해.”

“아, 네. 혹시나 해서요. 워낙 바쁘시니까.”

“근데 방금 수혁이 보는 눈빛 말이야.”

“네?”

“조금 불손해 보여서.”

김선웅은 당황한 채 입을 벌렸다.

그래도 내가 교순데, 레지던트 보는 눈빛을 두고 불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걸까.

같은 생각을 신현태도 했다.

“아니, 형. 아니, 원장님. 부, 불손이라뇨……. 김선웅 교수. 미안해. 우리 원장님이 좀 오락가락, 악.”

“오락가락이라니, 이놈아. 그리고 쟤…… 김 교수가 우리 수혁이 의심의 눈초리로 봤다니까? 딱 보니까 지금 사고 치게 생긴 거 막아 줬구만. 무릎을 꿇지는 못할망정.”

“원장님……. 그래도 어떻게 교수가 무릎을 꿇어요……. 그리고 김 교수가 우리 과 협진 얼마나 많이 봐주는데. 정형외과에서 내과 협진 제일 잘 봐주는 교수예요.”

아마 수혁 얘기만 계속 나왔으면 이현종은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내과 얘기가 나오면 또 달라질 수도 있는 위인이었다.

“그래?”

“그렇다니까요. 그리고 우리 병원 매출 톱 5 안에 들잖아요. 설마 진짜 이름 모르는 거 아니지? 회의 딱 한 번이라도 들어가서 안 졸았으면 알 텐데.”

“아니, 안다니까. 그건 억울해, 진짜.”

“아무튼, 훌륭한 사람이에요. 우리 김 교수.”

“알았어, 알았어. 그래도 수혁이 의심하면 안 돼. 얘 진짜 천재야. 아까 뭐라고? 호지킨이랑 랑게르한스 세포 조직구증? 그 두 개 중에 하나 나올 확률 90% 이상 본다.”

이현종은 아주 흐뭇한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았다가, 이내 정영훈 교수를 바라보았다.

어서 빨리 수혁의 업적을 발굴해야 하는데 라면이나 먹고 있는 모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김선웅은 특유의 외모 때문에라도 어디서 본 거 같은 친숙함이 있는데 반해, 이놈은 진짜 처음 보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순환기 내과가 병리과를 볼 일이 없기도 하거니와.

정영훈 교수는 정말 판독실, 수술실 그리고 집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후룹후룹. 하루 종일 굶었나. 이제 되지 않았어? 한번 보지? 안 궁금해? 원장도 과장도 다 기다리게 하고.”

“형……. 우리가 그냥 온 거잖아. 수혁이 있다니까 신나서.”

“그래? 오라고 한 거 아냐?”

“왜 진짜 오락가락해……. 아이고, 정 교수님. 드셔요, 드셔.”

신현태가 부리나케 말렸지만.

이미 정영훈은 일어난 후였다.

평소 얼굴도 보기 힘든 원장에게 혼난 것도 무서웠는데, 생각해 보니 궁금하기도 해서였다.

“아닙니다, 저도 궁금해서요. 진짜 저 친구 말이 맞는지…….”

“아이고, 그럼 뭐. 부탁합니다.”

물론 신현태도 아주 적극적으로 라면 먹기를 권장하지는 않았다.

그도 사람인지라 수혁이 너무 이뻤고, 또 수혁의 업적이 또 하나 추가될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등 떠밀리듯 자리에 앉은 정영훈 교수가 슬라이드를 현미경에 끼워 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앞에 설치된 커다란 모니터에 현미경 시야가 고스란히 떴다.

“음.”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김선웅이었다.

솔직히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겠단 생각만 들었지만.

그래서 더 일부러 그랬다.

‘너무 나만 개뿔도 모르는 느낌이잖아?’

원래 병원 안에서는 진짜 의사는 내과다 이런 인식이 있지 않은가.

대체 어떤 놈이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심지어 정형외과에도 이런 전설이 내려왔다.

수술하다가 환자 심장이 멈추니까 가서 진짜 의사 불러오라고 소리쳤다는 이상한 전설이.

‘안 그래도 정형외과 목수네 어쩌네, 뒤에서 그럴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음, 음 했는데.

따지고 보면 오해는 아니었다.

[저 양반 뭘 알고 저럴까요?]

‘설마. 지금 뭐가 보인다고. 10배율인데.’

[안쓰럽네요…….]

‘분야가 다르니까 그렇지, 뭐.’

일단 바루다는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옆을 둘러보니 신현태는 몰라도 이현종은 그러고 있는 거 같았다.

누가 봐도 네가 뭘 아냐는 눈빛을 김선웅 교수에게 보내고 있었다.

딸깍.

그사이에도 정영훈 교수는 부지런히 손을 놀려다가 배율을 높이고 기가 막힌 지점을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손을 멈춘 것은 대략 1분 후였다.

“흐음.”

그때부터는 정영훈 교수가 아까까지 김선웅 교수가 내던 소리를 내었다.

우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포들의 빽빽한 경화 왜곡이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주변과 확연히 구분되는 거대한 세포, 즉 Reed-Sternberg cell이었다.

호지킨 림프종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CD30 염색에도 양성 소견을 보였다.

“진짜…… 호지킨이네.”

그거까지 확인한 정영훈 교수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워낙 그럴싸하긴 했어도 반신반의했는데 설마 이걸 보지도 않고 진단했을 줄이야.

“역시, 역시!”

조태진은 머릿속으로 호지킨에 대한 항암요법인 ABVD(adriamycin + bleomycin + vinblastine + dacarbazine) 프로토콜을 떠올리며 수혁을 안아 들었다.

“헹가래 치자, 헹가래.”

원장이라는 사람은 그런 조태진을 말리기는커녕 헹가래를 치기 시작했다.

‘설마 신 과장님은 안 저러겠지.’

김선웅 교수는 진심으로 병원의 미래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신현태를 돌아보았다.

그는 예상대로 이현종과 조태진을 말렸다.

“어어, 뭐 하는 거야.”

휴 하는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고 했으나.

김선웅은 본인이 너무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현태가 더욱 안정적인 자세를 잡고 다시 손짓을 했기 때문이었다.

“태진이가 힘 좋으니까 혼자 머리 쪽으로 가고 나랑 현종이 형이 다리 잡아야지. 애 떨어지면…… 어휴 안 돼.”

“아, 그렇지. 역시 과장님.”

“네가 그래도 어? 내 모자란 점을 잘 보완하는 편이야.”

“그렇죠? 나 없으면 병원 망한다니까.”

이미 망한 거 같은데.

김선웅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왜 저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는지 알 것도 같긴 했다.

‘저런 애 정형외과 있으면 진짜 대박……. 아.’

아마 정형외과에 있었으면 각 파트에서 너도나도 데려가려고 난리 치지 않았을까.

그나마 내과니까 점잖게 헹가래나 치지.

정형외과면 뜻 안 맞으면 망치로 후려칠 수도 있었다.

어지간한 정비공보다 사람 때리는 기구에 있어서만큼은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

하지만 김선웅은 아무래도 정형외과다 보니 그 생각을 끝까지 이어 나가진 못했다.

헹가래를 치기 위해 저 멀리 던져 둔 수혁의 지팡이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형외과는 아예 하지도 못하겠구나…….’

보아하니 지팡이 없이 걷는 건 고사하고 오래 서 있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그런 장애가 있는 것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애가 밝아 보여서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이런 걸 넘어갈 정도로 무신경한 정형외과 의사는 못 되었다.

특히 무릎 관절을 포함한 하지를 주로 보는 의사다 보니 더더욱 그러했다.

‘아……. 그래 얼마 전에 본 논문에서…….’

김선웅 교수는 수혁을 진료했던 사람 아닌가.

단순한 근육 손상이 아니라 비골 신경이 나갔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수혁을 걷게 해 주겠다는 허황된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다만 오래 서 있게 해 줄 수는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의사로서의 수혁은 할 수 있는 것이 크게 늘어날 테니.

“저기 잠시만요.”

“좀 기다려. 몇 번 더 축하하고.”

“아니…….”

“뭐 인마. 내과는 원래 이래.”

“아니, 저기 수혁이 다리 때문에요. 제가 최근에 논문을 읽었는데, 지금보다 호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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