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죽을 뻔 (1)
“교수님, 저 이수혁입니다.”
수혁이 계획하고 있는 검사들을 모조리 하려면 역시나 입원은 필수적이었다.
수혁 앞으로 입원시켜도 되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 교수 앞으로 입원하는 것이 훨씬 나을 터였다.
일단 교수가 푸시하는 것과 일개 레지던트가 푸시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조태진 환자면 오늘 할 수 있는 검사가 수혁 단독 환자면 내일모레도 장담하기 어려울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힘에서도 밀릴 뿐더러, 일단 레지던트 환자라고 하면 중증도를 낮게 보았다.
“어어. 수혁아. 오늘 외래 아냐?”
해서 조태진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조태진은 불과 신호음이 세 번도 울리기 전에 받았다.
심지어 수혁의 스케줄까지 줄줄 꿰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면서였다.
교수들끼린 서로 스케줄도 어지간히 친한 거 아니면 전혀 모르고 산다는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네. 외래에서 본 환자분 때문에요.”
“입원할 환자 있구나. 입원장 내, 지금. 내 이름으로.”
“어……. 노티 안 들으시고요?”
“이따 들을게. 수혁이가 본 건데 어련하겠어? 나 지금 회의 들어와 있어 가지고.”
“아……. 아니, 그래도…….”
“믿는다, 수혁아. 입원시켜.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선조치 후보고해.”
조태진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야말로 무한한 신뢰를 보여 준 셈인데.
수혁으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이래도 되냐?’
기분이 좋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지 않겠는가.
교수님이 있는 게 다 백 봐주라고 있는건데.
선조치 후보고라니.
막말로 수혁이 뭔 짓 할 줄 알고 이러나 싶었다.
하지만 바루다는 전혀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수혁 수준이면 웬만한 교수 수준은 찜 쪄 먹지 않습니까? 조태진이 얼마나 신중한 사람인데요. 아직도 1년 차들 외래 들어오면 백 보게 하거나, 자기가 그냥 다 합니다.]
‘하긴…….’
[그런 사람이 이렇게 믿는다는 건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뜻이겠죠.]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할까.’
바루다의 말은 꽤 논리적이었고 또 설득력이 있었다.
해서 수혁은 갑자기 뚝 끊겨 버린 전화기 바라보는 것을 관두고 환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좋은 소리만 나올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던 참이라 음량을 한껏 키워 둔 참이었다.
환자도 조태진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이 말인데.
그래서 그런가 얼굴에 무한 신뢰의 빛이 떠 있었다.
아까도 그랬지만, 지금은 거의 종교인 같아졌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환자분, 검사하려면 아까 말씀 드렸다시피 입원이 필요합니다. 가능하신가요?”
“네? 네네. 그럼요. 미리 옷도 가져왔어요.”
“아, 다행이네요. 보호자분은 혹시 오셨나요? 이게 입원 수속하고 하려면 좀 움직여야 되는데.”
“아, 왔어요. 지금 밖에 있어요. 애가 있어서. 안에는 못 들어오고.”
“아…….”
수혁은 그제야 환자 나이를 의학적인 아니라 사회적인 시선으로도 바라볼 수 있었다.
42살이면 결혼이 늦어지는 요즘엔 아이가 아주 어려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그냥 한 개인이 아니라 한 가정을 보게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예전보다는 좀 더 진단에 여유가 있다 보니 시야도 넓어진 느낌이 들었다.
[꼴깝 떨지 마시고요. 진단이나 제대로 합시다, 우리.]
물론 바루다는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녀석 같은 깡통에게는 환자의 의학적 요소 말고는 죄 쓸데없는 정보일 뿐이었으니까.
간혹 수혁과 상하 관계에 있거나 다른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라면 감정 분석 정도는 해 주지만.
아무래도 진짜 인간적인 공감까지 기대하기는 좀 어려웠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수혁은 짜증 내는 대신 그냥 하고자 하는 말을 이었다.
“아, 그럼 제가 바로 입원장 낼게요. 병실이 첫날이나 이튿날까지는 상급 병실이 될 수도 있는데……. 원하시면 교정 안 하고요. 6인실을 원하시면 코멘트 남겨 드릴 수 있어요. 요새는 좀 병실이 있을 때도 있거든요.”
병원 전체로 보면 딱히 좋은 일은 아니었다.
보통 6인실은 꽉 차서 돌아가는 게 대부분의 병원 아니던가.
이게 빈다는 건 상급 병실은 더 빈다는 뜻이었고, 그만큼 병원에 환자가 줄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환자나 경영진이 아닌 의사에게는 마냥 좋았다.
“아, 병실 있다네요. 바로 접수처 가시면 됩니다.”
“오. 다행이네요. 환자분. 접수처로 가서 접수되는 대로 처방 넣겠습니다. 필요한 검사는 아까 말씀드렸지만, 시행 전에 병실에서 다시 설명 드릴게요.”
지금도 그랬다.
수혁이 환자와 대화 나누는 사이 병실을 알아본 사원도 그렇고.
그렇게 알아본 병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수혁도 그렇고 속 없이 좋아했다.
“네, 감사합니다.”
수혁은 환자를 밖으로 보내곤 시계를 바라보았다.
워낙에 외래가 일찍 끝나 있던 상황이긴 했지만.
하지 위약 환자에게 설명이 꽤 길어진 덕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진 않았다.
점심시간이 곧이란 뜻인데, 그럼에도 바루다는 성화를 부리지 않았다.
‘오늘 반찬 뭐길래 이러지?’
[스파게티요.]
‘그거 아주 나쁘진 않잖아?’
[면이 치덕거려서 별로예요. 시켜 먹죠? 아까 아침에 보니까, 병동 간호사분들도 시켜 먹을 거 같던데.]
‘그건 또 언제 듣고 입력해 놨어?’
[수혁의 삼시 세끼를 저 아니면 누가 챙깁니까. 저 아니었으면 인턴 때처럼 삼각김밥이나 우물거렸겠죠. 이럴 때 쏴야 점수도 따는 겁니다. 가뜩이나 검사도 많이 내는데 잘 보여야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병동 간호사들과의 관계는 좋으면 좋을수록 득이 되지, 반대인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수혁은 인턴 때 이제 막 의사가 되었다는 고양감에 미쳐서 병동 간호사들에게 하대하다가 엿 먹는 줄도 모르고 당한 동기들을 많이 보아 온 바 있었다.
해서 이현종 원장에게 이럴 때 쓰라고 받아 둔 법인 카드를 들고 일어났다.
마침 그 카드로 오늘 외래 사원들 커피도 쏜 참이라, 사원이 아주 반갑게 인사를 건네 주었다.
“식사 맛있게 하세요!”
그냥 사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외래도 빨리 끝내고.
컴플레인도 없어서 감정 소모도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수혁은 그런 사원에게 화답한 후 아니, 화답하면서도 머릿속을 정리했다.
어차피 뭘 시켜 먹을지에 관해서는 이따가 바루다가 결정해 줄 터였다.
이 녀석의 머릿속에는 근처 맛집이 싹 다 정리되어 있었는데 그 수준이 단지 위치와 메뉴뿐만 아니라 맛이나 재료 수준까지 죄 점수화되어 있었다.
먹는 사람보다 기생하는 놈의 입맛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걸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좀 소름 끼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도움이 되었다.
대학 병원에 있는 의사들은 메뉴 정하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시간이 부족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일단 MRI는 다시 찍어야겠지?’
[스테로이드 효과가 없어진 정도가 아니라 병이 더 진행한 것을 의심하고 있다면 당연하죠.]
‘사실 예상외였어, 진행한 건. 스테로이드에 반응하면서…… 이렇게 진행이 빠른, 척수에 자리할 수 있는 종양이 뭐가 있지?’
[몇 가지 있긴 한데…… 다 별로 예후가 좋을 거 같진 않군요.]
바루다는 답변과 함께 몇 가지 질환명을 보여 주었다.
예전 같았으면 봐도 이게 뭔가 싶었을 테지만.
지금의 수혁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런 제기랄.’
[그래도 아예 놓치는 것보다는 낫죠. 최소한 치료 기회는 주어진 셈입니다. 물론 여전히 별거 아닐 가능성이 있긴 합니다.]
‘그게 좋지. 환자에게는.’
[조태진도 한 번 정도 꽝 나오는 건 봐줄 겁니다.]
‘뭐…….’
수혁은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위해서라면 환자가 안 좋아야 좋고.
환자를 위해서라면 무조건 틀리는 게 좋은 상황 아닌가.
이럴 땐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뭘 먹는 게 장땡이었다.
오늘은 피자였다.
아빠존스의 ‘존이 좋아하는‘이라는 이름의 다소 이상한 피자.
좀 느끼하고 짜지만, 맛은 있어서 뚝딱 처리하고 보니 환자가 병실에 올라왔다는 연락이 왔다.
환자가 원하는 대로 6인실에 입원했다고 하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뭐라고요?”
“환자분이…… 침대에 실례를 하셨어요. 근데…… 본인은 인지를 못 하더라고요.”
“실례라는 게…… 작은 거예요, 큰 거예요?”
“큰 거요.”
“음.”
큰 거를 실례했다.
나이 마흔이 넘은 건강한 성인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크게 사고 쳤다고, 평생 놀림거리 하나 획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또는 피자 먹고 있는 데 뭔 짓거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의사라면 그래선 안 되었다.
[아까 검진할 때…… 이 정도였습니까?]
‘제대로 검진하진 않았지. 입원하고 신경학적 검사 다 해 보려고 했는데…….’
[그사이에 진행한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하겠습니다.]
‘그래, 맞아.’
집에서부터 기미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나마 다행일 터였다.
그것도 당연히 좋은 소견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여기 와서부터 진행한 게 저 모양이라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혹시 집에선 이런 적 없으신가요?”
“어……. 그게 환자분이 지금…… 일단 화장실 가셔서요. 나오시면 여쭤볼게요.”
“아, 그렇구나. 하긴. 아뇨, 제가 바로 갈게요.”
“그래 주시겠어요?”
“네.”
“네, 선생님.”
수혁은 급한 마음에 들고 있던 피자를 내려놓았다.
바루다가 순간 짜증 내는 것이 느껴지긴 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아직 바루다가 피자 한 조각에 의학적 호기심을 놓을 만큼 타락하진 않은 덕이었다.
녀석은 대신 지금 해야 할 일과 의심되는 정황등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아까 계획했던 거 쭉 진행하고…… 조직 검사도 진행해야겠군요. 위치만 고려하자면 폐암의 전이이거나, 전립선, 림프종, 신장암, 흑색종 등이 가능합니다.]
‘진행 속도까지 고려하면?’
[아무래도 림프종이겠죠? 하지만 지금 열거한 모든 암이 유형에 따라 가능하긴 합니다.]
‘그렇지…….’
[혹은 랑게르한스 세포 조직구증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아……. 그거 스테로이드에 반응 잘하지.’
[그래 봐야 일시적이었으니, 만약 그거라면 이번엔 항암 치료나 방사선 치료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일단은 환자를 보자고.’
바루다와의 토의는 언제나 그렇듯 생산적이었다.
적어도 환자나 의학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생산적인 토의라 해도 환자 한 번 보는 것만은 못 했다.
이현종이 그렇게 가르쳤고, 수혁도 동의했다.
물론 바루다의 판단도 그렇기에 수혁은 재빨리 발을 놀려, 환자 앞에 설 수 있었다.
“아.”
환자는 아주 당황한 얼굴이었다.
병실에 오자마자, 그것도 6인실에서 똥을 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인 일은 병실에 있는 환자들 모두 이해심이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누구 하나 코를 싸쥐는 사람도 없었다.
그저 측은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암병동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안에서 모든 환자들은 일종의 전우애를 느낄 수 있었다.
“환자분, 혹시 이번이 처음이신가요? 집에 있을 땐 괜찮으셨어요?”
아마 신현태나 조태진이었다면 우선은 위로의 말을 전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의 심적 멘토는 이현종이었고, 이현종은 직진밖에 할 줄 몰랐다.
환자를 위하는 마음이 지극하나 그 마음이 닿는 곳에 감성은 없었다.
바루다도 기계라 그런 수혁을 만류하진 않았다.
“어…….”
“아주, 아주 중요한 질문이에요. 반드시 답해 주셔야 합니다.”
수혁이 이제 목소리에 힘을 실을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자기 확신에 가득찬 의사가 의학적인 내용을 입으로 옮길 때, 환자는 일종의 카리스마에 압도되기 마련이었다.
“그…… 실은…….”
환자는 아주 부끄럽다는 얼굴로 보호자, 그러니까 아내를 바라보았다.
“어제…… 어제도 한 번 그래서 버렸어요.”
“휴.”
그리고 수혁은 그런 환자를 향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