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하지 위약? (1)
“형, 또 기승전 수혁이었어.”
신현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수혁과 조태진과 헤어진 후 복도를 따라 본관으로 돌아오면서였다.
“수혁이 대단하지 않았냐?”
분명 너무 수혁만 치켜세워 주는 걸 탓하는 말투였는데.
이현종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신현태는 이게 바로 동문서답인가 하는 얼굴로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대단하지. 근데 너무 그러면 애들 사기 떨어진다니까?”
“걔들 사기 오르면 수혁이처럼 잘한대?”
“그…… 그건 아니지. 수혁이처럼 어떻게 해, 애들이.”
“거봐. 그럼 좀 어? 편애하면 안 되냐? 그렇게 잘하는데.”
“그래도…… 이게…….”
편애라는 말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나?
근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당당할까.
너무 당당하니까 꼭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해서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이현종의 역공이 이어졌다.
“솔직히 너도 편애하잖아. 너 따로 밥 사 준 애 있어? 아니, 커피라도 사 준 애 있냐? 이 짠돌이 놈아?”
“짜, 짠돌이라니.”
“말해 보라고. 사 준 애 있어?”
“없…… 없죠.”
“아니지. 잠만. 너 이 새끼…… 그러고 보니까 맨날 얻어먹기나 하고 네가 낸 적이 없네?”
신현태는 괜히 사기니 편애니 하는 얘기를 꺼냈단 생각이 들었다.
그 사소한 날갯짓이 자신을 향한 집중포화로 이어질 줄이야.
게다가 할 말이 없기도 했다.
요새 돈 낸 적이 없긴 하니까.
“이놈 이거, 어? 있는 놈이 더한다고. 아주…….”
“아냐, 형. 나 돈 없어. 월급 빤하지.”
“월급 얼만데.”
“어…….”
“너 인마, 월급 통장에서 하도 돈 안 꺼내다 써 가지고 나도 전화 받은 거 모르지? 신현태 과장님 돌아가신 거 아니냐고. 알고 보니까 아직도 용돈 타 쓰더만. 그런 놈이 돈이 없어?”
“아니, 아유. 그런 거 아냐, 형.”
신현태는 아니라고 하면서 눈알을 끊임없이 굴렸다.
분명 켕기는 게 있고 또 이현종이 집요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틈이 아주 많은 위인 아니던가.
게다가 지금은 적절한 주제가 많았다.
‘이 양반은 수혁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
신현태는 지도 수혁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아, 근데.”
“뭐, 짠돌아.”
“수혁이가 이번에 하고 있는 연구 있잖아요.”
“걔 두 개 하고 있어. 간이랑 인공지능.”
“간은 김 교수랑 뭐 잘하고 있더만. 아예 실험 논문으로 틀었던데?”
“그래? 간은 실험 논문이야? 어유……. 우리 수혁이는 참…… 대단해 진짜.”
실험 논문이라고 다 같은 실험 논문은 아니라 어려운 게 있으면 반드시 쉬운 것도 있기 마련이었지만.
이현종은 덮어놓고 아주 고난도라고 상정하고 칭찬해 댔다.
신현태도 그쪽 연구는 정확히 알지 못해서 대강 넘어가기로 했다.
“대단하지. 근데 우리랑은 인공지능이잖아요.”
“이것도 대단하지. 최첨단이잖아. 바루다만은 못하다만…… 그거야 뭐 올 스톱 됐으니. 하……. 내 노년에 그걸로 노벨상 타 보나 했다.”
“미국에서도 올 스톱 중이잖아요, 복합 인공지능은. 잘은 모르겠는데 어렵다며.”
“어렵지. 논문 봤는데…… 아직 멀었어. 이쪽은…….”
이현종은 취미와 특기에 당당하게 논문 읽기와 논문 쓰기를 동시에 써넣을 수 있는, 전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괴물이지 않은가.
나이 60을 넘은 와중에도 정력적으로 논문 소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그 대상에는 비단 순환기 내과 쪽 논문만 있는 게 아니라, 요새 핫하다는 분야 논문은 거즘 다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얘기 진짜 타깃 설정을 잘한 거 같더라고요. 태화 전자랑 계속 얘기하고 있는데 이 정돈 기술적으로 크게 문제없을 거래요.”
“데이터가 문제 아냐? 러닝 시키려면.”
“뭐…… 우리 병원이 좀 요새 밀리고 있어도 여전히 중환자 많잖아요. 흉부외과에서 어쩐 일인지 도와주겠다고 해서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요. 아마 두어 달만 더 있으면 러닝할 수 있을걸요?”
“흉부외과…….”
흉부외과 얘기가 나오자마자 이현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껏 어찌나 많이 싸워 왔던지.
서로가 서로에게 한 욕만 주워 모아도 논문 몇 개는 나올 거 같았다.
‘이 형, 이러다 엎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 모든 싸움 현장에 같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적잖은 싸움에 함께했던 것이 신현태 아니었던가.
대개 본의 아니게 휘말려 든 것이긴 해도, 아무튼, 이현종의 흉부외과에 대한 감정이 어떠한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2저자 태클 걸지 말고. 형, 수혁이 논문이야.”
해서 급히 수혁을 강조했다.
“그거 아니었으면 벌써 태클 걸었다. 수혁이…… 그래, 수혁이 거지.”
다행히 언제나 잘 먹혀 들었다.
“아무튼, 그거…… 꽤 수요도 있을 거 같다고 하더라고?”
“수요? 팔린다고?”
“응. 우리나라도 그렇긴 한데, 미국이나 유럽은 인건비가 너무 비싸서 간호 인력도 적게 뽑잖아.”
“어, 그렇지. 아……. 이게…… 이게 인력을 좀 줄일 수 있겠구나.”
대한민국 의료계는 의사고 간호사고 다 갈아서 끌고 가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 슬픈 일이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다들 여기서 더 인력을 줄인다는 생각은 못 하는 편이었다.
지금도 하나 휴가 가면 나머지가 죽어나는 상황에서 줄여?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는 얘기가 좀 다를 터였다.
“그래요. 그렇다더라고, 태화 전자 말이.”
“오……. 이거 수혁이 로열티 얼마로 돼 있냐?”
“1%지, 뭐. 연구비 다 받고 용역도 주고 하는 건데. 게다가 우린 태화 대학 소속이잖아. 대학도 주고, 기업도 주고, 연구자끼리 나누면 1%지.”
“연구자 비율이 얼만데.”
“5%.”
“95%를 가져간다고? 이런 날강도 놈들이?”
신현태는 그야말로 분기탱천한 이현종의 어깨를 잡았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오가는 환자와 보호자들이었다.
어찌 보면 병원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원장인데 이런 흉한 꼴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형도 지금까지 5% 받았어……. 나도 그렇고. 지금까지 내내 그랬는데 왜 갑자기 그래.”
더 중요한 건 이게 루틴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기업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연구비 내주는 연구가 모두 성과를 내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전체 다 더하면 대부분 적자였다.
“부당한데.”
“아니……. 원래 이렇다고. 5억을 줬는데. 팔린다고 해도 이거 다 깔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몰라, 형.”
“그래도 수혁이 첫 연구잖아. 논문만 돼서 되겠냐? 그리고 막말로 이게 어? 지금 파이자에 넘기려고 하는 연군데 거기서 100억 부르면. 그게 수혁이한테 꼴랑 1억 남는 거 아냐?”
“어……. 100억?”
신현태는 이 형이 나이보다 좀 어려 보이는 게 여전히 꿈을 꿔서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100억이라니.
태화 의료원에 속한 수천 명의 인력이 죽어라 일해서 1년에 남기는 돈이 10억 내외인데.
“뭐 인마. 그게 10억이 되면 더 큰 일이지. 천만 원인데. 수혁이 고아야. 몰라?”
“유언장 벌써 썼다며. 사회 환원하는 거 말고는 걔 준다고.”
“아……. 나 빨리 죽으라고?”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야, 내 몫이 얼만데.”
“형도 1%지. 형 이름 걸어 두기만 해도 여기저기 실리잖아.”
“그럼 내 거 다 양도해. 수혁이한테.”
“허.”
아들, 아들 하더니 정말 아들로 여겨지나.
많지도 않은 몫을 홀랑 주라니.
이제 이현종하고 꽤 오래 지낸지라 더 놀랄 일이 없다고 여겼건만.
아직도 남아 있었다.
“네 거도 양도해, 인마.”
“응?”
“짠돌이 놈아. 너도 하라고.”
“어…….”
아쉽게도 놀랄 일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현종은 그 자리에서 신현태의 1%마저 빼앗더니, 조태진과 홍창기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다들 데이터 주고, 또 논문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얼마간 %를 걸치고 있던 이들이었다.
“네?”
“내놔, 인마. 제자 피 빨아 먹을래? 모기야?”
“모, 모기라뇨…….”
“이번에 호흡기내과 펠로우 품의 올린 거 다시 검토할까…….”
“아니, 아뇨! 와……. 원장님!”
“그럼 잔말 말고 내놔.”
“알았어요…….”
첫 번째 타깃은 홍창기였다.
괜히 뻗대다가 뼈도 못 추리고 당하고야 말았다.
“자식이 말야. 논문 거저 실어 주는 거에 고마워해야지. 하는 것도 없으면서.”
“하는 게 없긴……. 홍 교수가 우리 병원 중환자 얼마나 많이 살리는데.”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왜 나한테 화를 내고 그래.”
“95% 뜯기는 게 더럽고 치사해서 그런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 돈 태울 걸 그랬어.”
내 돈이라.
이현종처럼 기분파로 돈 쓰는 양반이 돈이 있을까.
애초에 대학 병원 교수라는 게 떼돈 버는 직종도 아닌데.
제약 회사나 기구상들이 뒷돈 찔러주는 게 만연했던 시절에도 고고한 학처럼 튕기던 것이 이현종이었다.
“그럴 돈은 있어?”
“집 팔면 있지.”
“그럼 어디서 살어.”
“너네 집?”
“끔찍한 소리 말자……. 나 이혼당해.”
“제수씨가 나 얼마나 좋아하는데.”
“남편 직장 상사니까 웃어 주지, 아니면…… 솔직히 형이 막 재밌는 사람은 아니잖아.”
“상처 주네, 이놈이?”
“전화나 해. 걸어 놓고 말 안 하면 보통 사람은 당황해.”
너무 격해지기 전에 신현태는 전화기를 가리켰다.
그의 말마따나 조태진의 당황한 목소리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장님? 아니, 이게 왜 안 들리지.”
이현종은 조태진의 입에서 끊고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란 말이 나올 때쯤에 이르러서야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어어, 조 교수.”
“아, 원장님. 저 부교수입니다.”
“그거 재미없다고 한 100번 말했지.”
“네……. 죄송합니다.”
씨름도 했을 정도로 덩치가 산만 한 놈이 왜 이런 농담만 할까.
이현종은 쯔쯔 혀 차는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고는 말을 이었다.
“거…… 연구하는 거 있지?”
“네? 그…… 무슨 연구요?”
“뭐 또 하는 거 있어?”
“원장님, 저 나름 혈액종양내과 라이징 스타예요. 논문 진행 중인 거 네 개예요. 네 개.”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거.”
“중요한…… 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역시나 NEJM 아니면 CANCER 지에 실을 예정으로 2년 전부터 야심 차게 준비 중인 논문이었다.
‘아니지……. 아냐.’
하지만 요새 더 마음이 가는 건 따로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솔직히 그렇게 높은 곳에 실리진 않을 거 같은 연구였다.
“수혁이 거요?”
“그래! 그래, 너는 말이 좀 통한다.”
“그거 왜요?”
“너 앞으로 책정된 로열티, 그거 수혁이한테 줘.”
“아…….”
“왜. 싫어?”
이현종은 하여간 이놈이고 저놈이고 말로만 수혁이, 수혁이 하고 실제로 좋아하는 놈은 자기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충격적이었다.
“아뇨, 전 벌써 양도했어요. 하하.”
“뭐? 너…….”
이건 이것대로 싫었다.
감히 수혁이를 나보다 더 이뻐하려고 해?
“너 전에 미국 갈 때도 돈 주더니. 속셈이 뭐야. 혈종 끌고 가려고 그러지?”
“네? 아뇨, 아닌데. 그냥 이뻐서. 아들 같아서.”
“내 아들이야!”
“아니…….”
“목소리라도 들어야겠다. 네 파트지? 바꿔 봐.”
“지금 없어요. 외래 갔어요.”
“진짜야?”
“이런 거로 거짓말…… 하, 끊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