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혈종 (4)
“안 된다고?”
“네. 그게…….”
대훈은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의학과 판독실은 본관에 있고 외래는 암 센터에 있으니, 편도로도 1km에 가까운 거리였다.
그걸 15분 안에 다녀왔다는 건 제아무리 빠르게 뛰었다 해도 가서 문전 박대당했다는 얘기밖에 안 됐다.
‘이상한데?’
[김진실 교수님은 어지간하면 임상에 맞춰 주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바루다 또한 기이하게 여겼는지 데이터를 점검했다.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불과 몇 주 만에 한 사람에 대한 평판이 드라마틱하게 바뀔 가능성은 없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무언가 다른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할 터였다.
아프다든지,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든지 하는.
“김진실 교수님은 만났어?”
“아…… 아뇨. 이혜영 선생님만…… 봤습니다.”
“아, 또혜영이야?”
그렇다면 이해가 갔다.
지방대학교 출신이었는데, 당연하게도 1등 졸업이었다.
수혁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태화 의료원 경쟁자가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압도적인 병원이지 않았던가.
당시 치열한 경쟁을 뚫고 태화 의료원 인턴으로 오려면 본교 졸업생이거나, 인 서울 의대라면 10등 이내, 지방대는 거의 1, 2등은 해야만 했다.
[인턴 때는 에이스였다고 했죠?]
‘톱이었어. 진짜 잘했어.’
[그리고 지금은 개판 치는군요.]
‘뭔가…… 영상의학과 들어간 거로 커리어 끝난 느낌이지.’
수혁은 오랜만에 인턴 동기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슬며시 다시 내려놓았다.
“어, 수혁이!”
조태진이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UFC 선수라도 된 듯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정말 태클이었다면 나머지 다리 한 짝도 못 쓰게 되었으리란 확신이 드는 그런 기세였다.
“어어, 교수님.”
조태진은 누차 말했듯 체격이 어마어마한 사람이었다.
그대로 수혁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수혁은 거의 무슨 깃발처럼 나부끼는 형국이 되고야 말았다.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이산가족 상봉하냐.’
[그러게요. 지난달에도 몇 번이나 봐 놓구선.]
‘그만큼…… 나 혈종 돌게 된 게 기분 좋으신 거겠지?’
[그렇다고 봅니다. 다른 교수들도 그러잖아요. 이렇게…….]
바루다의 말이 맞기는 했다.
조태진이나 신현태, 이현종처럼 노골적인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넌 줄 알았으면 좀 대강 리뷰할걸. 하하하.”
“으어.”
“아프냐? 미안. 너무 좋아서, 하하. 저번 달에 고생했거든. 아, 황선우 그 자식 그거.”
“아……. 막달에 교수님 파트 돌고 간 거예요?”
“그래. 원래도 개판 치던 놈이 막판이라고 작정하고 치는데…… 와…… 내가 불안해서 퇴근을 못 하겠더라니까.”
내과 전문의라는 게 얼마나 되기 힘든 것인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터였다.
비록 동네 내과 의원만 가 본 사람들은 맨날 기본적인 처방만 내리는 거 같은 그 사람이 뭐가 그리 대단할까 싶기도 하겠지만.
사실 제대로 된 설비만 갖춰 주면 지금도 중환자실 날아다니면서 몇 사람 목숨쯤은 멱살 잡아 이승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대형 재난식의 질환들, 그러니까 신종 감염병에 유난히 강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른 나라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으면서도 질은 오히려 더 좋은 전문의들의 존재.
그런 전문의가 되려면 3, 4년간의 수련뿐 아니라 시험도 쳐야만 했다.
내과는 그중에서도 시험이 어려운 축에 속했다.
‘공부 들어가기 전에 개판 쳤구나.’
[전형적이죠. 어차피 혈액종양내과 펠로우 할 생각도 없을 테니까요.]
어영부영 있다가는 떨어진단 얘기였다.
수련만 받고 전문의가 되지 못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때문에 3년 차들, 즉 시험 볼 연차가 되면 11월쯤엔 일에서 손을 떼고 공부하러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유종의 미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애들도 있는 법이었다.
벌써 작년에 군의관으로 들어간 김진용이 그랬고, 이번엔 황선우가 그랬다.
“어후, 아무튼, 너 왔으니까 안심이다.”
조태진은 지난달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해지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또다시 수혁의 어깨를 쥐고 흔들고 볼을 꼬집고 여러 차례 세리머니를 하고 나서야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 1년 차…… 안대훈인가?”
“네, 교수님!”
“그래, 주치의지? 잘 부탁해. 모르는 거 있으면 수혁이한테 물어보고. 그래도 안 되면…… 안 될 리가 없겠네. 수혁이한테 물어봐.”
“네, 교수님!”
그제야 대훈을 발견한 조태진은 몇 마디 격려의 말인지, 아니면 결국, 수혁의 자랑인지 모를 말을 하곤 뒤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작할게요.”
몇 년을 손발 맞춰 온 직원이 그것을 신호로 외래 문을 열었다.
아직 진짜 시작 시각이 되진 않았지만, 직원도 환자도 이런 조태진이 익숙했다.
이 사람은 대학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로서 자질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지 않은가.
뭐가 되었건 준비가 됐는데 암 환자들을 더 기다리게 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게 지론이었다.
“아이고, 김용수 환자분.”
“네, 교수님. 잘 지내셨어요.”
“그 말은 제가 해야죠. 잘 지내셨어요?”
“아이구, 덕분에 좋아요. 밥도 잘 먹고. 하하.”
“제가 말했잖아요. 아들 아니라 손주 결혼식까지 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조태진은 기본적으로 친절하고 또 친근했다.
“하하. 그래서 좀 어때요?”
“아주 좋아요. 재발 없고요. 깨끗해요.”
“하이고. 다행이네. 어휴, 그 말 들어야 소화가 되는 거 같다니까.”
“이제…… 한 번만 더 오시면 더 안 봐도 되겠어요, 우리.”
“섭섭한데.”
“졸업하는 거예요, 졸업. 다음번에 오실 때, 사진이나 찍어요, 완치 기념으로.”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1년 차가 옆에서 차팅하기가 더럽게 어렵다는 점이었다.
다른 교수들은 좀 불친절하거나 사무적인 느낌이 들지언정, 딱 플랜을 얘기해 주는 편인데 반해 조태진은 환자에만 집중하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러고 나면 환자가 나가고 나서야 차팅이 되기 때문에 1년 차만 들어와 있으면 외래는 한없이 지연되기 마련이었다.
“6개월 뒤로 잡고, CT 예약해 놔. 혈액 검사도 해 두고.”
“아, 네.”
지금은 수혁이 있어 다행이었다.
태진이 말하지 않은 것들을 죄다 대훈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덕분에 외래는 지연 없이 아니, 오히려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게다가 환자들 상태도 대부분 좋아서 조태진은 기분이 좋았다.
“수혁이가 온 걸 암들도 아나. 죄다 머리 숙였네. 어? 오늘 재발 환자 하나도 없어. 정말 좋다.”
해서 허허 웃고 나서 다음 환자를 불렀다.
[수혁, 그 환자입니다.]
그 순간 바루다가 진중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수혁 또한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
조태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재발이 의심되니까.
그게 아니라면 새로운 2차 암이거나.
대부분 의사들이 그러하듯 뭐가 얹힌 느낌이 들었을 게 뻔했다.
“선생님…….”
환자도 비슷한 예감을 하고 있는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원래 대장암 치료받은 지 5년이 지나 조태진을 졸업했다가, 로컬에서 받은 건강 검진에서 이상이 있다고 해서 CT 찍고 오는 길이었다.
여기서 표정이 좋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
조태진은 잠시 CT를 다시 한번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동맥기에서 조영 증강이 되었다가 지연기에서는 싹 씻겨 나가는, 경계가 좋은 덩이.
‘간암이지, 이건…….’
누가 봐도 HCC였다.
심지어 영상의학과에서도 판독을 그렇게 준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교수 사인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그걸 의심해야 할 만큼 태화 의료원이 녹록한 곳은 아니었다.
“그…… 환자분.”
“교수님…… 저 어떡해요.”
“그…….”
조태진은 차마 웃는 낯으로 환자를 대하지 못했다.
벌써 환자가 울먹이고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해서 잠시 더 망설이고 있으려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1년 차일 리는 없었다.
조태진이 사람 좋다는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1년 차에게는 아니지 않은가.
대부분 병원에서 1년 차는 아직 사람이 되지 못한 무언가였다.
태화라고 다르지 않았다.
“수혁이야?”
“네, 교수님.”
“왜…… 그래? 환자분 들어오셨는데.”
“잠시만…… 이 환자분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어…….”
이게 만약 수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도 진료실을 나가야만 했을 터였다.
조태진은 레지던트 때부터 환자 사랑이 각별한 사람이었고.
지금은 더하지 않은가.
누구라도 ‘진료’를 방해해서는 안 됐다.
이건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성한 의식이니까.
‘미쳤나.’
때문에 직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경직되었다.
학창 시절 보디빌딩부에 있었다던 조태진이 한번 성질을 내면 정말 무섭기 때문이었다.
“환자분, 잠시만 요 앞에서 기다려 주실 수 있나요? 상의 좀 하고 말씀드릴게요.”
“응?”
“부탁드립니다. 소영 씨, 부탁해요.”
“어……. 네.”
하지만 상대가 수혁이라면 바보처럼 미소가 나오는 게 조태진이기도 했다.
‘우리 수혁이가 설마 아무것도 아닌 일로 진료를 중단시키겠어?’
어차피 수혁이가 벌어 준 시간 아닌가.
맨날 지연으로 속 터진다는 소리 나오는 게 본인 외래인데.
지금은 도리어 예약 시각보다 10분인가 일찍 들어오고 있었다.
사상 초유의 일이라 해도 좋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조태진은 수혁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언제나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였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심지어 남친 인사까지 시켜 줄 정도로 친한 사원마저 질투심이 느껴질 만큼이나 따뜻한 얼굴이었다.
아마 친아들이 와도 질투심을 느낄 터였다.
“우리 수혁아.”
“네, 교수님.”
“환자분…… 뭐가 이상한 거야?”
“지금 간암으로 생각하시죠? 전이보다는.”
“응? 그렇지. 아무래도…… 대장암에서 전이되었다고 보기엔 모양이 많이 다르지.”
게다가 조태진은 본인 치료에 자부심도 있는 사람이었다.
한번 완치 판정을 본인이 내렸는데 재발을, 그것도 전이의 형태로 했을 거 같진 않았다.
“네, 저도 그랬습니다. 간암…… HCC로 생각했는데, 위치가 좀 걸려서요.”
“위치?”
“네. 부신하고 완전히 연해 있지 않습니까? MRI T1 역상에서 까맣게 보이는 게 좀 지나쳐 보이기도 하고요.”
“T1 역상? 지방 조직이 지나치다는 말이지, 지금?”
“네.”
“흐음.”
조태진은 저도 모르게 턱 밑을 쓸었다.
외래 보기 직전에 예의 차리겠답시고 민 수염이 벌써 까슬하게 자라 있었다.
‘지방 조직이 많고 부신하고 연했다…….’
이 비슷한 얘기를 어디서 본 거 같았다.
교과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흔한 상황이었다면 몰랐을 리 없었으니.
‘케이스 리포트에서 봤나? 아니면 학회?’
아무튼, 어디선가 들은 거 같기는 한데 불명확했다.
레지던트와 대화 중에 몰라서 말문이 막히다니.
창피할 만한 일이었지만.
우리 수혁이한테는 아니었다.
‘걘 불세출의 천재야!’
이미 태화 대학 개교 이래 최고 천재 소리를 듣는 이현종이 인정한 사람 아닌가.
“뭐 같은데?”
해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냥 물었다.
교수가, 그것도 조태진같이 학회 활동 열심히 하는 똑똑한 교수가 이러면 좀 당황할 법도 하건만.
수혁은 그러지 않았다.
“간 내부 신선종(Intrahepatic adrenocortical adenoma, IAA)이요.”
“아하.”
조태진도 역시 교수는 교수라 대번에 뭔 질환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게 맞다면 울상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경과 관찰만 하면 되니까.
조직 검사면 충분하단 뜻이었다.
“그럼 조직 검사…… 아, 협진 냈구나? 어? 근데 안 했네?”
“그게, 오늘 어렵다고 해서요.”
“야, 그런 게 어딨어. 이 환자 지금 얼마나 불안한데. 빨리 털어야지. 누군데, 오늘 연락 담당.”
“그…… 이혜영…….”
“또혜영? 일단 전화기 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