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역시 네가 의국장이다 (2)
이렇게 갑자기?
수혁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기 시작한 지상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표정 좀 문제 있어 보이는데요. 정정할 것을 요구합니다.]
바루다가 몇 번인가 고치라고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수혁은 이미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나…… 내과 동기 누구누구 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 이유는 자못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기계인 바루다가 듣기에도 그랬다.
이게 사람인가 싶을 지경이었지만.
바루다는 녀석으로서는 실로 드물게 참았다.
이미 멘탈이 쿠크다스처럼 흔들리고 있지 않은가.
괜히 더 건드려서 망가뜨릴 이유는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수혁은 바루다의 유일한 입출력자였으니.
[그, 그럴 수도 있죠. 워낙 바빴잖아요?]
바루다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혁은 그간 정말 바쁘게 살아온 몸이었다.
레지던트 그거 다 바쁜 거 아니냐 뭐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다른 레지던트들과 수혁의 의국 생활은 궤를 달리하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진짜 너무 무심하긴 했네…….’
[알긴 아니 다행입니다만.]
‘뭐라고?’
[저도 모르게 그만. 아무튼, 잘된 일 아닙니까? 동기들이랑 잘 지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뭐 워낙에 바루다가 하는 말이 다 그렇긴 했지만.
의학 외적인 부분에서도 이런 건 퍽 오랜만의 일이었다.
‘음, 그렇긴 하지.’
세상 혼자 살아갈 거라면 몰라도.
수혁이 그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한데.
혹 그렇다고 해도 만만한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다 어디선가 도움이 되긴 할 터였다.
“야, 수혁아.”
“어.”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려니, 지상이 말을 걸어왔다.
불과 10여 분 사이에 전화를 거의 20통도 넘게 한 사람치고는 꽤나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맞아, 얜 그랬지.’
그러고 보니 학생 때도 이랬던 거 같았다.
어디서나 잘 어울리고, 또 구김살 없고.
그게 간혹 염치없음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수혁은 그런 지상을 미워하진 않았다.
그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자주 어울리지 못했을 뿐.
“오늘 시간 되는 애 대강 한 대여섯은 된다. 나머지는 당직이네 뭐네 뭐가 많네.”
“아…….”
“멀리 가기는 좀 그러니까, 요 앞에 곱창집이나 갈까?”
“곱창? 그래, 좋지.”
“어, 그래. 너 온다니까 야 애들 다 좋아한다. 생각해 보니까 회식 때 말고는 별로 얼굴 본 적도 없는 거 같아.”
“그러게나 말이야. 아무튼, 그럼 6시에 로비에서 만나서 갈까?”
“어. 그러자. 이따 봐.”
“그래.”
지상은 수혁의 어깨를 툭 하고 치고는 스테이션 쪽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멍청하단 소리도 듣지 않은 채 환자 해결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심경이 복잡해진 것은 수혁뿐이었다.
‘아, 그냥 안 한다고 할까……. 귀찮을 것도 같은데.’
생각해 보면 동기들하고 서먹해진 거야 별문제도 아닌 거 같았다.
원래 그랬던 것도 아니고, 단지 상황이 그래서 그렇게 된 것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귀찮은 건 현실적인 문제였다.
논문, 발표, 당직, 휴가 등등.
당장 떠올릴 수 있는 해야 할 일들만 해도 이랬다.
[신현태 과장은 잔뜩 기대하고 있던데요.]
‘그게 문제야.’
[데이터상 이현종 원장도 의국장 출신입니다.]
‘보통은 그냥 나이 많은 사람 시키지 않았나?’
[그러지 않아서 태화 의료원이 혁신적이란 소리를 들었다, 라는 기사가 있었더군요. 적절한 사람을 골라내고 키우는 것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말을 음. 이현종 원장이 했습니다. 과장 시절에.]
‘이런 망할.’
그렇다면 이현종 또한 신현태처럼 의국장을 시키려 들 거란 얘기가 되었다.
그 양반이 감투는 좋아하는 사람 아니던가.
정작 시키면 귀찮아하면서도 그랬다.
[수혁.]
입을 샐쭉거리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또다시 이름을 불러 왔다.
글씨체로 묘사하자면 궁서체로 해야 될 만큼이나 진중한 목소리였다.
보통 이럴 땐 대답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왜.’
[신현태, 이현종, 조태진 등이 수혁을 교수로 만들려고 하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그야…….’
자기 입으로 시인하기엔 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사실인데.
해서 수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펠로우를 무슨 과를 해도 만들고 싶어 해요. 하지만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도 엄청 많습니다.]
‘음.’
[당장 아까……. 신현태 과장과 같이 온 감염내과 펠로우 강호영 선생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랬어?’
[네. 수혁이나 설명하느라 정신없었겠지만, 저는 늘 일하고 있으니까요. 분석 결과 수혁에 대한 호감도는 0%였습니다.]
‘그럼 그냥 대놓고 싫어하는 거잖아?’
굳이 호감도라는 단어를 쓸 이유도 없는 거 같았다.
[그런 사람 꽤 많아요.]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
바루다는 한숨 뒤에 욕설 하나 정도는 섞어야 되나 하고 고민했다.
가령 시발 같은 거.
그 외에도 욕설에 대한 데이터는 꽤 많았다.
수혁은 혼잣말로 욕설을 제법 하는 편이었으니까.
[펠로우 하는 데 당연히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제일 큰 목적이 뭡니까? 특히 내과에서요.]
‘아.’
[누구는 교수 되려고 피똥 싸 가면서 몇 년을 굴러도 전임 보장은커녕 매년 계약이 갱신될지도 모르는데, 수혁은 아직 전문의도 아닌데 벌써 교수 얘기가 돌지 않습니까. 미워하는 게 당연하죠.]
‘그럼……. 그 펠로우 선생님들 키우는 교수님들도 껄끄럽겠구나……. 내가.’
[그렇죠. 그래도 아주 멍청하진 않아서 다행입니다.]
‘야, 인마.’
[솔직히 이번 일은 좀 멍청했죠? 인정?]
‘인정…….’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이 좀 오만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교수 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라던가.
실력 있고 인성 좋은 선배 중에 상처받고 나간 사람만 세도 한둘이 아니었다.
아니, 병원 주차장 한 바퀴는 돌려 세울 수 있을 터였다.
오죽하면 교수는 하늘이 내는 거라는 말도 있을까.
‘의국장이라도 해야 핑계가 더 생긴다 이거지?’
[네. 뭐 수혁이 논문도 좀 썼고, 케이스 리포트는 많이 썼죠. 연구도 지금 하는 거 완성만 되면 성과가 어지간한 펠로우 찜 쪄 먹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한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아마도 하지만 뒤로 붙는 말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일 터였다.
때문에 수혁은 계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역으로 말하면 그 정도 성과 낸 펠로우는 쌔고 쌨습니다. 국책 과제까지 따 온 사람도 많고요.]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눈앞에 데이터를 들이밀어 주며 얘기를 하고 있으니 믿지 않고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그 선생님 논문을 이렇게 많이 썼어?’
[별명이 논문 기계던데요. 뭐, 벌써 전임 발령 못 받은 지가 7년째니까 이럴 만도 하죠.]
‘하.’
당장 전문의 따는 것만 생각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는데.
그 선생님이 벌써 펠로우 시작한 지 7년째라니.
황당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놀아서 교수가 못 된 거라면 또 모르겠지만.
논문 수만 봐도 죽을 똥 싸 가면서 일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수혁이 알기로 그 선생님은 환자도 제법 열심히 보는 사람이었다.
주말에도 병원에 있는 시간이 밖에 있는 시간보다 길다고 하니 말 다 한 셈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제치고 돼야 하는 겁니다, 수혁은. 당연히 넘어야 할 산이 많죠.]
‘의국장이라도 해야 핑곗거리가 생기겠구나.’
[옹색하지만. 그래도 말할 거리가 있긴 있죠.]
‘하.’
[그러니까 이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신현태 과장 입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도 오늘 모임은 주선했어야 했어요. 수혁이 의국장을 하겠다고 하기 위해.]
‘근데 왜 그런 말을 안 했어?’
[환자 보느라 저도 이런 쪽으로는 영 분석을 하지 못했으니까요.]
‘당당한데?’
이 자식은 못 했다고 할 때나 다 했다고 할 때나 그저 당당했다.
[전 의료 목적 A.I.니까요. 원래의 용도 외의 것을 바라는 게 욕심이죠.]
언제나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본전도 못 건진 수혁은 한숨으로 감상을 대신했다.
“에이.”
[목소리 내지 마시고.]
‘짜증 나니까 그렇지. 얼마나 귀찮은 일인데…….’
[뭐, 그래도 그렇게 어렵진 않을걸요?]
‘뭐가 안 어려워. 애들 당직에 휴가에 논문에 학회 발표에…… 이상하게 뽑기 전엔 다 똑똑한 애들인데 뽑아 놓으면 멍청해지잖아. 그런 애들 1년 동안 돌봐야 될 거 생각하면…….’
[오우.]
바루다는 아주 묘한 기분이었다.
기계 주제에 기분이라는 말을 쓰는 게 좀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이걸 달리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왜?’
[방금 수혁이 한 말 있지 않습니까. 논문, 발표 등등.]
‘그거 뭐.’
[그거 묘하게 제가 해 준 거 같지 않습니까? 제가 지난 2년간 수혁에게요.]
‘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긴 했다.
비단 저것뿐만 아니라 환자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까지 다 관여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교수 대하고, 다른 사람들과 지내는 데 있어서도 일정 부분 조언을 들은 바 있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한다. 이거 이럴 때 쓰는 말 맞습니까.]
‘마, 맞아.’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 인공지능이 속담에까지 발을 뻗을 수 있게 됐군요.]
바루다는 진심으로 뿌듯했는지 껄껄 웃더니, 말을 이었다.
방금 웃은 놈이라고 하기에는 퍽 섬뜩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어차피 이게 다 출력에 불과한 것일 테지만.
점점 더 적절해지고 있어서 수혁도 소름이 끼쳤다.
요즘 들어 바루다가 기계가 아니라 인간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지고 있었다.
[업보라고 생각하십쇼. 지금까지 제게 받았던 걸 갚는다고.]
‘하아.’
[이러다 늦겠습니다. 밀린 일부터 하시죠. 환자도 좀 보고. 환자 안 보면 나쁜 의사 돼요. 그럼 제 존재 의의가 없어집니다.]
‘알았다, 알았어.’
업보라.
인공지능이 꺼낸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해서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여러 차례 업보라는 단어를 되뇌다가 일을 마쳤다.
언제나 그랬듯 시간은 좀 남았다.
각 잡고 일하면 일반 환자 보는 것 정도는 전혀 어려울 게 없었으니까.
하나 어려운 환자가 있긴 했지만, 이미 장티푸스로 진단하고 약도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덕분에 로비에 나설 때 마음이 이보다 더 홀가분할 수 없었다.
‘아, 애들 다 와 있네.’
동기들, 이젠 낯설어진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무거워지긴 했지만.
[분위기 망칠 생각 말고 웃어요.]
‘알았어, 알았어. 하 근데…… 처음 보는 애들보다 어색하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해서 수혁은 억지로 웃으며 동기들에게 다가갔다.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두려워하면서였다.
“안녕.”
“오! 수혁이! 야, 같은 병원 같은 과인데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새끼, 웬일이냐. 어? 밥을 다 같이 먹자고 하고.”
“야, 그냥 단톡방 파자. 이수혁 방으로 해서.”
그러나 반응은 의외로 아주 뜨겁다 못해 철철 끓어 올랐다.
‘응?’
황당한 마음에 바루다를 바라보니, 바루다는 예상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펠로우들한테나 경쟁자지. 동기들한테도 그렇겠어요? 이미 수혁은 넘사벽에 제일 출세할 동기죠. 원장 아들이기도 하고. 염려 붙들어 매라니까, 왜 내 말을 허투루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