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열이 난다고 (1)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이수혁 선생님.”
수혁은 외래에서 마주친 직원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그사이 바루다는 수혁의 망막을 통해 직원 뒤에 붙은 스케줄 표를 인식했다.
[유지상도 오늘 외래군요.]
‘지상이?’
[성 빼고 부를 만큼 친하게 지냈나요?]
‘그건…….’
바루다와의 관계가 비록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녀석은 언제나 이렇듯 뼈 때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지곤 했다.
아무튼, 덕분에 수혁은 자신의 인간관계에 관해서.
특히 동기들 사이의 관계에 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까 같이 밥 먹는 애도 없네.’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안대훈하고 우하윤이랑 먹으면 되지. 아니면 나랑만 먹어도 되고.]
‘그, 그런가. 아니, 아니지. 너랑만 먹는 건 그냥 혼자 먹는 거잖아.’
[남들이 볼 때나 그렇죠. 그게 중요한가요?]
‘때론 중요해, 그런 것도…….’
이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여태 혼자 잘 먹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루다가 막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오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전달하려는 찰나, 누군가 수혁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방금 얘기가 나왔던 지상이 서 있었다.
처음 같이 들어올 땐 어리바리하게만 보였었는데.
이제 나름 2년 차 말이라고 가운도 어지간히 잘 어울렸다.
“뭔 생각하냐? 천하의 이수혁도 첫 외래는 떨려?”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미숙함이 곧장 탄로 났다.
말은 수혁에게 떨리냐고 묻고 있었지만, 실제로 떠는 건 지상이었다.
[해당 발화에 담긴 감정은 불안, 초조가 대부분이군요. 교감 신경 톤도 올라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수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지상에게는 불행하게도 수혁은 늘 바루다와 함께였다.
그리고 바루다는 수혁이 깨어 있는 한 쉬지 않았다.
‘쫄았구나.’
[아…… 네, 뭐. 저렴한 표현을 굳이 쓰시겠다면.]
수혁은 바루다의 비아냥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 어. 떨리지, 당연히. 뭐…… 펠로우 선생님들 외래도 같이 열리긴 하는데……”
“아무래도 물어보긴 좀 또 그렇잖냐. 당일 환자들이 태반이라 중증도는 떨어진다고 듣긴 들었는데, 그래도 불안하네.”
“아, 당일 환자들이 많대?”
“응? 너 못 들었…… 아, 아니다. 응, 그렇대.”
지상은 수혁을 기꺼워하는 위 연차가 거의 없음을 떠올리고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예전에는 위 연차들이 대체 왜 그렇게까지 수혁을 경원시할까 했었는데.
최근 안대훈이라는 녀석이 수혁에게 배웠는지 어쨌는지 연차 대비 잘하는 모습을 어필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싫어할 거까지는 없어도…….’
본인보다 잘하는 아래 연차를 어찌 이뻐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김인수 선배는 수혁을 이뻐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 사람은 또 너무 욕심이 큰 만큼, 전문의 시험 1등으로 교수님들께 어필하려고 거의 폐관 수련에 들어간 마당이었다.
수혁에게 이런저런 조언 따위 해 줄 여유는 없을 거란 얘기였다.
“아, 그렇구나……. 음…….”
지상의 걱정과는 달리, 수혁은 선배들에게 아무 언질도 못 들었다는 것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아쉽군요, 중증도가 떨어진다니. 설마 감기 환자만 오진 않겠죠?]
‘나 그럼 좀 억울해지는데…… 어제 2시까지 공부하다 잤다고…….’
[기도할까요? 많이 아픈 사람 오라고.]
‘응? 아니, 그건 또 좀 인간적으로 그런데?’
수혁이나 바루다나 당장 외래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상도 비슷한 상황이긴 하겠지만, 그 생각이 지향하고 있는 바는 많이 달랐다.
“아무튼, 이따 보자. 점심이나 같이 먹자. 오랜만에. 너나 나나 하도 바빠서, 어? 인사만 하고 지나친 거 같아.”
“그래, 좋지. 이따 봐. 파이팅 하고.”
“어, 너도. 파이팅!”
어차피 둘 사이가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지 않았던가.
만약 그랬다면 제아무리 바빴다 하더라도 어떻게든 밥은 먹었을 터였다.
해서 수혁은 별 의미도 없는 인사를 나눈 후, 방으로 들어왔다.
[엄청 작네요.]
‘교수님 진료실하고 같을 수는 없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최고 에이스 외래를 이런 창고 같은 데서 보라고 한다고요?]
솔직히 별생각 없었는데.
창고라는 말을 듣고 보니 진짜 그렇게 보이긴 했다.
아마 실제로도 그랬을 터였다.
여긴 환자 늘면서 확장 개념으로 만든 진료실이라고 들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수혁도 병원 내에 일어나는 일들을 제법 잘 듣고 다니긴 했다.
차이가 있다면 남들은 위 연차한테 듣는 걸 원장이나 과장한테 듣는다는 점일까?
아무튼, 수혁은 그나마 바루다보다는 자기 객관화가 되는 편이었다.
‘에이스고 나발이고 아직 레지던트야. 그리고…….’
[그리고 뭐요.]
‘이제 곧 시작이야. 협조해. 쓸데없는 데 내 뇌랑 포도당 허비하지 말고.’
[오……. 포도당 드립 좋은데. 그건 어디서 배웠지? 이따 데이터 뒤져 봐야겠네. 센스 좋았어요.]
‘시끄러…….’
수혁이 바루다와의 머리 아픈 대화에 인상을 쓰자, 같이 들어와 있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문에 따르면 원장 아들에 과장 최애에 거의 무슨 셀럽 같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격은 꽤 훌륭하다던데.
들어오자마자 인상을 쓰고 있으니 어리둥절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바루다였다.
[친절하게 웃으면서 환자 보자고 해요. 혼자 그러고 있으면 어디 아픈 줄 알겠네.]
‘아, 혼자 있는 게 아니구나. 참.’
덕분에 수혁은 직원이 인성을 의심하는 단계에서 다른 것을 의심하는 단계로 넘어가기 전에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
“아, 죄송해요. 좀 떨려서.”
“괜찮으세요? 일부러 커피도 안 갖다 드렸는데.”
“아…… 네. 이제 괜찮습니다. 환자 볼까요?”
“네, 이게 당일 환자들 받는 거라 좀 불편하실 거예요. 미리 환자 보기가 어려워서. 괜찮으니까 천천히 보세요.”
“네, 그럴게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직원은 문을 열어 밖에서 대기 중이던 환자를 들여보냈다.
[걸음걸이 정정하시고, 비틀거리는 것도 없고. 통증도 없어 보이는데…….]
그와 동시에 바루다는 일단 스캔한 결과를 알려 주었다.
아주 사소한 단서뿐이었지만, 처음 진료하는 입장에서는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환자분,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아, 원래 약 타던 날이 어젠데. 까먹고 못 왔어. 오늘 타려고.”
“아…… 잠시만요. 차트 좀 볼게요.”
“어, 근데 좀 빨리해 주면 안 되나. 약속 있어서.”
“네, 빨리할게요.”
“응, 그래. 근데 의사 양반이 되게 어리네.”
앉는 폼부터가 좀 범상치 않다 싶더니, 수혁보다도 이 병원 다닌 지가 오래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의사 대하는 태도가 능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니, 능숙하다 못해 무례할 지경이었다.
“아, 네. 이제 28살이라서요.”
“이야, 공부 잘했나 보다. 그 어린 나이에 의사여?”
“네, 환자분. 음, 약 확인했습니다. 검사 결과 지금 잘 조절 중이시거든요? 근데 마지막으로 안저 검사한 게 좀 돼서 이번에 따로 예약 잡고 가시는 게 좋겠어요.”
“아…… 안저 검사. 그거 눈알 넓혀서 하는 거 말하는 건가? 영 어지럽던데.”
“그래도 하시는 게 좋아요. 때 놓치면 실명돼요.”
당뇨가 증상이 없으니 당장은 별거 아닌 거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합병증 발견이나 치료를 제때 하지 않으면 정말 큰 고생 하는 수가 있었다.
실제로 그리 머지않은 과거만 하더라도 당뇨 때문에 발을 자르거나 실명하거나 신부전으로 가는 비율이 대단히 높았었다.
“아이고, 어린 의사가 겁은 잘 주네.”
“필요하니까 이렇게 말씀드리죠. 아무튼, 예약해 둘게요. 꼭 받으세요.”
“알았어, 시간 되면.”
“아…….”
“알았다고.”
해서 보통 이런 식으로 겁을 줘서라도 검사를 시키기 마련이었다.
그나마 좀 젊은 사람들은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에 경각심을 갖고 있지만.
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오히려 그러지 않아서였다.
바루다는 환자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 기다리고는 말을 걸어왔다.
잔뜩 의문에 찬 표정을 하고서였다.
뭔가 이놈 로직에서 벗어난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반말하는데 화 안 나요?]
‘응? 화? 나이 많잖아, 나보다.’
[수혁은 본인보다 어린 환자한테도 존대하지 않나요?]
‘그거 뭐…… 세대가 바뀌어서 그래. 옛날 교수님들은 진료실에서 담배도 피웠다잖아. 지금 그래 봐라, 당장 신문 나지. 아니, 유튜브에 뜨려나.’
[음……. 이건 또 새롭네. 데이터화시켜 둘게요.]
‘이런 걸 굳이?’
[저는 그래야 해요. 납득이 안 되면 회로에 박아 두기라도 해야죠. 로직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뭐, 좋을 대로 해.’
그 후의 외래도 매끄러웠다.
워낙 경증 환자들이나 만성 질환자들만 와서 바루다는 툴툴거렸지만.
환자가 데이터가 아닌 사람으로 보이는 수혁에게는 다행으로 여겨졌다.
한때는 공부하겠다는 미명하에 어려운 환자만 들입다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아무리 공부해도 눈앞에서 죽는 환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저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 아쉽다.]
‘아니, 뭐가 아쉬워. 사고 하나 없이 잘 끝났는데.’
[시작하기 전에는 어려운 환자 왔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 환자가 있으면 내가 보는 게 좋지만 없는데 뭘 봐. 없으면 좋은 거지.’
[그래도 공부한 게 얼만데 써먹으면 좋지.]
‘아니, 나도 그게 싫다는 게 아니라……’
수혁은 바루다의 툴툴거림을 애써 달래 주며, 왜 달래 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하면서 방을 나섰다.
끼익.
그렇게 나서자마자 또 한 번 지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놈이 외래 시작하기 전보다도 더 떨고 있었다.
[사고 쳤나? 뉴스에 보면 얼굴 가리고 나오는 애들이 이러고 있던데.]
‘그 짧은 사이에 사고를 어떻게 쳐. 응급실도 아니고, 외랜데.’
바루다의 말에도 수혁은 사고는 아닐 거라 확신했다.
시간이 너무 짧기도 하거니와, 방금 말했던 것처럼 여긴 응급실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태화 의료원 2년 차가 무슨 야바위 해서 따는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했든 그렇지 않든 실력이 늘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었다.
서효석 같은 쓰레기 같은 교수도 있지만.
신현태나 이현종 같은 교수들이 더 많아서였다.
“어, 수혁아.”
“외래 빨리 끝났네?”
“아니, 아냐. 중간에 끊었어. 환자 하나 입원시켰는데…… 아무래도 좀 이상해서.”
“이상해?”
“어, 그…….”
지상은 저도 모르게 펠로우 진료실 쪽을 바라보았다.
순리대로라면 어려운 환자가 있으면 그쪽에 물어보는 게 맞았다.
뭐라고 하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긴 할 게 뻔했다.
[아, 얘는 공부 열심히 안 했네?]
이제 막 3년 차가 되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런 평가를 받고 시작하기는 싫었다.
“발열인데…… 이,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그럴까? 지금 당장 넘어가는 환자는 아닌가 봐?”
“어? 아…… 그건 아냐. 그건 아닌데…… 들고 온 검사가 이상해. 뭔가…… 그냥 발열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