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우선은 기다려 (1)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효석의 부탁은 하등 쓰잘데기없는 것이었다.
하윤은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병원 당직실로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봉고 뒤에서는 수혁도 안대훈처럼 완전히 뻗은 척을 했기에 영업 사원은 가면서도 내내 하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 그렇군요. 우창윤 교수님이…… 김밥천국을 좋아하는구나. 의외네요?”
“예전에 제일 친한 친구 결혼식 갔다가 밥 없어서 정장 입고 김밥천국 가서 먹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 눈을 떴다나 뭐라나. 아직도 가끔 혼자 나가서 거기 쫄면 먹고 오세요.”
“오.”
영업 사원 입장에서는 상당히 요긴한 정보들이었다.
아무래도 상대의 취향을 알고 공략하게 되면 훨씬 유리할 테니까.
끼익.
외딴섬이라는 음식점은 이름과는 달리 병원에서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갈 때는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한참 걸리는 거 같더니, 올 때는 그야말로 금방이었다.
영업 사원은 운전석에서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하더니, 뒷좌석 문을 열었다.
“어떻게 옮기죠?”
하윤에게 걱정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가면서였다.
“내릴게요.”
“어?”
그때 죽은 듯 누워 있던 수혁이 꽤 멀쩡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얼굴이 붉기는 했지만, 아까보단 훨씬 나아져 있었다.
주는 대로 먹었다면 절대 이럴 수가 없을 텐데.
영업 사원은 설마하니 다년간의 영업으로 다져진 자신보다 더 뛰어난 뺑끼 실력을 갖춘 건가 하는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물론 수혁은 그의 물음에 답해 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왜요?”
“아뇨, 아닙니다. 네. 내리시죠. 제 손잡고…….”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내린 수혁은 목을 이리저리 돌려 대고는 안대훈을 돌아보았다.
원래도 비어 있던 정수리가 오늘따라 더더욱 처량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진짜 정신없이 잠들어 버린 탓에 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드러난 배에는 털이 흉측했는데, 그나마도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처음 들어올 땐 저 지경은 아닌 거 같았는데.
역시 내과 의사가 녹록지가 않았다.
‘새끼…….’
[챙겨 주죠. 그래도 아래 연차 중에서 제일 수혁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잘 따를 뿐만 아니라, 실력도 썩 괜찮은 녀석이었다.
백날 수혁처럼 되겠다고 공부를 하고 있는 데다가, 환자 문제만 아니면 주말에 수혁이 주최하는 공부 모임에 하윤과 함께 꼭 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녀석은 수혁은 역시 대단하다고, 어떻게 이렇게 바쁜 와중에 아래 연차 교육까지 신경 쓰냐고 오만 법석을 피워 댔다.
[그거 사실 교수 될 때 평판 관리하는 거잖아요.]
‘시끄러워.’
수혁은 바루다의 참견에 고개를 흔들어 대고는 영업 사원 쪽을 바라보았다.
할 수 있으면 혼자 챙기고 싶었지만, 지팡이 짚는 마당에 누가 누굴 챙기겠는가.
도움이 필요했다.
“쟤……. 생각보다 무거울 거거든요?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아, 네. 물론이죠. 제가 돕겠습니다.”
“좀 빼 주시기만 하면……. 대강 깨워서 가면 될 거 같은데.”
“아, 아뇨. 못 깨어나시면 제가 당직실까지 모시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네, 선생님.”
영업 사원은 수혁이 젊어서 그런가 참 싸가지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안대훈을 밖으로 빼내었다.
살집이 있어 그런가 생각보다 무거웠는데, 밖에서 보다 못한 병원 직원이 도와줘서 다행히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후. 선생님이…….”
영업 사원도 제법 덩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어우……. 죽겠……. 어우…….”
안대훈은 바깥 공기를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죽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는데, 그걸 보고 있기도 참 불안했다.
저러다 갑자기 토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선생님. 저도 도울게요.”
“응?”
수혁은 갑자기 나선 하윤을 토끼 눈을 한 채 바라보았다.
무겁고 힘든 것을 떠나서, 지금의 안대훈은 좀 더러운 느낌이 있었다.
코인지 눈인지 모를 곳에서 흘러내린 액체도 여기저기 있었고.
침도 흘려 댔고.
얼굴이나 머리카락은 원래 정돈되지 않은 편이었고.
말하자면 수혁조차도 손대기가 좀 꺼려지는 상태라는 뜻이었다.
“선배 혼자만 고생하게 둘 수는 없죠. 아까 서 교수님 상대도 두 분이 다 하셨는데요.”
하지만 하윤은 마치 눈도 보이지 않고, 냄새도 못 맡는 사람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안대훈의 한쪽 겨드랑이 사이로 몸을 끼워 넣었다.
‘으.’
땀에 젖은 건지 뭔지, 수혁은 보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하윤이 그렇게 하니까 그나마 걸음을 옮길 수는 있었다.
“저, 저도 돕겠습니다.”
“아, 네.”
물론 영업 사원의 도움을 얼마간 받기는 해야 했지만.
아무튼, 셋은 그렇게 별 무리 없이 안대훈을 내과 전체 당직실 중 지하에 있는 곳 안에 집어 던져둘 수 있었다.
“일단 머리는 이렇게.”
그 와중에 혹 토하다 질식사할까 염려된 수혁은 안대훈을 아예 옆으로 눕게 만들어 두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또 뵙겠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영업 사원은 딱 거기까지 도와주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수혁은 그런 영업 사원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날려 대다가, 이내 하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 채운 하윤이 눈에 들어왔다.
“술 엄청 버리시던데요?”
“아, 보였니?”
“앞에선 안 보였겠지만. 옆에서는 보이죠. 전 뭐 술 한 잔도 안 마셨는걸요.”
“그, 그랬구나.”
하윤은 당황한 수혁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 웃더니, 다시금 아까의 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돌아왔다.
“아까 근데……. 서효석 교수님 통화 내용 정확히 뭐예요? 녹음하신 거 맞죠?”
“어? 그것까지 봤어?”
수혁의 말에 바루다가 대번에 성질을 냈다.
[아니, 아니라고 둘러대야지. 거기서 그것까지 봤어? 병신이에요?]
생각해 보니까 맞는 말이긴 해서 수혁은 미안하다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네, 봤죠. 뭐라고 한 거예요?”
“어……”
하윤은 아까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물어 왔다.
바루다는 당황한 수혁을 보면서 몇 번인가 한숨짓는 시늉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다행히 하윤은 수혁의 팬이에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같이 작당합시다.]
‘작당?’
[교수 매장하려는데, 이게 작당이지. 그럼 뭐가 작당이에요.]
‘하긴……. 그건 또 그렇긴 해.’
아마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일 터였다.
예전에 교수가 때려도 감사하다고 웃고, 욕을 해도 웃고, 심지어 집에 청소 빨래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세상이 변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머릿속에 인공지능이 들어올 지경인데.
수혁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면서 찜찜한 마음을 지웠다.
한번 그렇게 마음먹자 말이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하윤아, 일단 저기로 좀 가자.”
우선은 당직실에서 좀 떨어진, 전공의 휴게실이랍시고 만들어진 곳으로 갔다.
말이 휴게실이지 너무 구석진 데 있어서 찾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놓여 있는 소파는 누가 담배라도 태웠는지 구멍도 나 있었고.
이 때문에 어지간하면 사람들이 오질 않았다.
심지어 고백의 명소라는 소문까지 나 버리는 바람에 정말이지 발길이 뚝 끊겨 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
“아, 네.”
하지만 하윤 또한 지금부터 나눌 대화가 범상치 않을 거란 사실을 알았기에 별 저항 없이 수혁을 따라나섰다.
게다가 하윤은 수혁이 절대로 고백 같은 거 할 사람이 아니란 확신을 품고 있었다.
비록 첫 만남에서 손을 덥석 잡는 등, 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상한 사람일 뿐 나쁘거나 모자란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수혁과는 달리 바루다가 없는 하윤으로서는 지금까지 보아 온 수혁을 이렇게만 보고 있었다.
“일단…….”
수혁은 그렇게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그러니까 구멍 난 소파 위에 앉은 하윤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너도 알다시피 서효석 교수님……. 진짜 좀 이상하잖아.”
“이상하죠.”
하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의 말이라면 뭐든지 믿을 기세인데, 심지어 맞는 말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나쁜 사람이죠. 환자도 안 보고. 솔직히 백만 아니었으면 벌써 잘렸을걸요? 그 연차에 테뉴어 못 받은 사람도 그 교수님뿐일 거고요.”
“어…… 맞지. 되게 화났네?”
“여자 전공의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더 나빠요. 그 사람 손버릇도 별로라.”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걸 당했는데 왜 안 나서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병원은 아직 무척 폐쇄적인 곳이었다.
특히 전공의, 그러니까 레지던트들에게는 전문의라는 자격증이 걸린 문제이기에 쉽사리 나서기가 어려웠다.
“근데, 왜요?”
“아. 그게 말야.”
수혁은 바루다의 조언에 따라 적절히 뺄 내용은 빼 가면서 하윤에게 아까 들었던 바를 전달했다.
약간의 가공도 거친 참이었기에, 하윤이 듣기에는 그냥 이미 서효석이 거액을 횡령한 것처럼 들렸다.
“이거……. 이건 보통 일이 아닌데요?”
“그렇지?”
“이건 터지면 병원에서 못 막을 거 같아요.”
조금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의료진의 품행 관련한 문제는 어지간하면 덮이기 마련이었다.
이런 걸 잘하는 병원 홍보팀이 우수한 홍보팀이라는 얘기가 있었고.
태화 의료원은 정말 대단한 홍보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서효석은 지금껏 쌓아 온 문제도 있거니와, 몇억의 횡령 건까지 더해진 참 아니던가.
이만하면 병원에서도 더 지켜 주기보다는 그냥 꼬리를 잘라 버리는 것이 이득이었다.
[아마 그걸 은근히 원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병원 경영진의 생각은 어떨지 몰라도.
이현종을 비롯한 ‘의사’들 그리고 간호사들을 비롯한 다른 의료인들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근데 이걸 우리가 공론화하는 건 좀 위험하잖아.”
“그렇죠. 그건…… 그건 좀 위험하죠.”
아무리 수혁이 총애를 받고 있고, 하윤이 로열이라고 해도.
아직 일개 전공의일 따름이었다.
“그럼 어쩌면 좋을까?”
“저쪽에서 아버지 동원했으니까……. 우리도 아버지들 동원해야죠.”
말하자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건데.
수혁은 일견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는 고아였으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하윤의 말을 더 들었을 땐 명확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저는 우창윤, 선배는 이현종. 아니지. 선배는 사실 신현태 과장님도 있잖아요. 그……. 누구더라?”
“김다현 이사님.”
“그래요. 거기 통해서 얘기 들어가게만 하면 되죠. 감사팀에서 한 번만 털면 바로 확인될 텐데요.”
“감사라……. 그럼 좀 이따가 해야겠구나?”
“네. 우선은 그 연구 올리고 좀 기다리세요. 그 담에 돈 나오면 그때 감사로 털면 되죠.”
“오……. 근데, 넌 이런 거 좀 익숙해 보인다?”
수혁은 물론이오, 각종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는 바루다도 어찌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거늘.
하윤은 딱 듣자마자 너무도 명쾌한 답을 내놨다.
그래서 놀라 물으니, 그녀는 잠시 씨익 웃고는 이렇게 답해 주었다.
“아빠한테 배웠죠. 어떻게 그 나이에 벌써 학회 이사시겠어요.”
“아…….”
어쩐지 설득이 되는 그런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