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이제 많이 했다 (2)
“회식 말입니까?”
수혁은 아직 회진도 돌기 전인데 회식 얘기부터 꺼내는 서효석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공손히 대꾸했다.
슬며시 뒤를 돌아봄으로써 여기 네가 봐야 할 환자가 꽤 있다는 걸 어필하면서였다.
어지간한 의사였다면 이게 먹혔을 텐데.
서효석은 거의 의사가 아닌 수준인 인간이었다.
“그래, 회식. 빨리 나와.”
“아…….”
이번에 입을 연 것은 안대훈이었다.
모든 환자를 수혁이 보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안대훈도 당당한 내과 1년 차로서 혼자 맡은 환자가 있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 환자에 대해 알려 줄 사람이 서효석이었으나.
실제로 알려 주고 있던 건 수혁이었다.
그런데 수혁과 함께 하는 회진이 어그러지면 어찌 될까.
‘안 돼……. 그건…….’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마치 비명과도 같은 망설임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뭐가 아야. 넌 교수가 말하는데, 대답 똑바로 안 해?”
물론 서효석은 그런 세세한 지점까지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화만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기선 일단 사과하죠, 대신.]
바루다는 그러한 사실을 이미 예전부터 분석하고 있었기에 합당한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수혁의 생각 또한 그리 다르진 않아서 바루다의 말을 그대로 이행했다.
“죄송합니다. 얘가 아직 1년 차라. 제가 준비시켜서 내려가겠습니다.”
“그래, 이래야지. 2년 차라고 좀 낫네. 30분이야. 30분 안에 내려와.”
“네, 교수님.”
서효석은 그 말만 하고선 다시 병동에서 빠져나갔다.
명색이 교수인데, 병동 냄새마저 싫은 모양이었다.
“아……. 어쩌죠? 저 내일 처방도 못 넣었는데.”
안대훈은 그런 서효석의 뒷모습과 하릴없이 돌아가고 있는 시계를 번갈아 보며 탄식했다.
그 말에 수혁이 피식 웃었다.
안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면서였다.
“걱정 마. 자……. 너 환자 다 띄워 봐.”
“네? 아, 네.”
“어디……. 8명이네. 하나 늘었네?”
“네. 제 앞으로 오늘 입원했습니다.”
“자, 보자.”
수혁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클릭해 들어갔다.
이미 환자 개개인에 관한 정보는 모두 바루다가 정리해 놓은 후였기에, 따로 환자 파악할 필요도 없었다.
다다다다다.
그저 아주 빠른 속도로 처방을 내기만 하면 되었다.
“어…….”
“미안, 오늘은 티칭 없이 그냥 내가 다 낼게.”
“어……. 이게……. 이게 되네요?”
“너도 2년 차 되면…….”
수혁은 2년 차 되면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려다 말을 흐렸다.
2년 차가 되면서 동시에 이걸 할 수 있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몸이 있어야 하지.]
바루다가 으스대면서 수혁의 사고 회로에 낑겨 들었다.
수혁은 가볍게 그런 바루다를 무시하면서 계속 처방을 때려 박았다.
안대훈의 칭송을 들으면서였다.
“아닙니다. 제가 어찌……. 이건 이수혁 선생님만 가능하신 경지입니다.”
어조도 어딘지 모르게 비장해서, 어쩐지 여기보다 한참 북쪽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오늘 응급실에서 바로 중환자실로 환자 받고, 회의까지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환자 파악도 딱딱 되어 있으세요?”
옆에 있던 하윤이라고 해서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양한 루트를 통해 수혁의 행적에 관해 듣다 보니 칭송이 더 구체적이었다.
“그만하고. 이제 대강 내일 처방 다 내놨으니까. 옷 입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모이자.”
수혁은 듣기엔 좋지만, 맨날 듣다 보니 지겨워진 칭송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면서였다.
안대훈은 수혁의 말에 거의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옛날 옛적 간신이라 칭함 받던 이들이 딱 이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빠릿빠릿했다.
“아, 네.”
“하윤이는……. 너 지하지? 숙소?”
“네. 전 바로 로비로 갈게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그럼 서두르자.”
수혁은 하윤을 엘리베이터 쪽으로 먼저 보낸 후, 집처럼 쓰고 있는 당직실을 향해 부리나케 걸었다.
‘가운 벗어 놓고……. 옷 갈아입을 필요 없겠지?’
[아까 낮에도 이러고 나갔으니까요. 저녁이라 쌀쌀할 수도 있을 테니 카디건이라도 챙기죠.]
‘없는데.’
[그…….]
바루다는 미국에서 옷이나 좀 더 사올 걸 하다가 이내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냥 갑시다……. 어차피 택시 타고 움직일 텐데.]
‘그래, 그게 좋겠어.’
[좋은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뭐…….’
수혁은 뭔가 반박할 거리를 찾고 싶었지만.
세상엔 마음만으로 안 되는 일도 꽤 많은 법 아니겠는가.
맞는 말만 하는데 반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사이 바루다는 상당히 유의미한 말을 꺼내 들었다.
수혁이 막 당직실 안으로 들어설 때쯤이었다.
[근데 서효석 저 인간이 왜 갑자기 회식을 가자고 할까요? 수혁의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토대로 짠 데이터상 서효석이 회식 가자고 하는 건 1년에 겨우 서너 번밖에 되지 않는데요.]
‘그……. 좁디좁은 이라는 말은 좀 빼면 안 되냐?
[사실 적시인데, 기분 나쁘셨다면 빼죠.]
‘씁…….’
수혁은 가운을 벗어 두곤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방엔 그야말로 별거 없었다.
옷이라곤 방금 벗은 가운과 몇 개 되지 않는 반팔 티가 다였다.
사실 요새 받는 월급이 절대적으로 적는 건 아닌데, 아직 쓰는 게 어색해서 차곡차곡 모아 두기만 했던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이수혁 선생은 병원에서가 제일 멋있단 소리가 공공연히 나돌까.
[아무튼, 이유가 있긴 할 겁니다.]
바루다는 수혁이 하릴없이 허공에,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옷장에 손을 넣었다 빼는 동안에도 말을 이었다.
수혁은 몇 번인가 더 그 짓을 반복하다가 이내 방을 빠져나왔다.
‘이유라……. 뭘까?’
[정보가 없어서 알기는 어렵지만. 아까 신현태와 나누었던 통화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통화? 아, 아까 발표 준비할 때?’
[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현태는 어지간해서는 소리 같은 거 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최근 들어 자꾸 엄한 놈들이 형, 형 하고 엉겨 붙는 바람에 몇 번 성질을 내긴 했지만.
글쎄, 신현태가 유선상으로 화내는 경우가 1년에 몇 번이나 될까.
‘이상하긴 해.’
[그리고 아까 연구원 얘기도 들었죠?]
‘한심한 새끼지 진짜.’
[두 사건 하고 연관이 있을 거 같아요.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서두르자.’
[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늦으면 서효석이 지랄할 거란 사실이었다.
“아, 선생님.”
병동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자, 멀끔해진 안대훈이 인사를 건네 왔다.
비록 머리가 텅텅 비어서 상당히 안쓰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운보다는 이게 나았다.
“어, 그래. 내려가자.”
그렇게 도착한 로비엔 아까 모습 그대로의 서효석과 그 앞에서 굽신거리는 영업 사원 그리고 반짝거린다는 느낌을 주는 하윤이 있었다.
“아, 선생님!”
하윤은 슬쩍 서효석의 눈치를 보고는 수혁을 향해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지~ 나를 보는 네 눈빛은~]
바루다의 말마따나 노래 가사가 절로 지나갈 만큼이나 생글거리는 미소였다.
[이제 그만 정신 차려요. 벌써 딴 데 보고 있으니까.]
‘어? 어. 어어. 어어어.’
[어휴……. 아니……. 그래도 이제 의학적으로는 썩 괜찮은데 왜 이쪽으로는 이러지?]
바루다는 용케 병신이라는 욕설을 참아 냈다.
수혁의 머릿속에 형상화된 그의 표정에서 다 드러나서 말짱 꽝이긴 했지만.
“왔어? 가자. 아……. 짜증 나. 야, 제대로 마실 수 있는 데 맞아?”
물론 수혁은 바루다에게 성질낼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서효석의 심기가 생각보다 불편한 데다가, 그의 인성이 알려진 것보다도 별로였기 때문이었다.
“아, 네네. 차 준비시켜 놨습니다.”
“여자애 하나 가니까…… 나 평소 가던 데는 안 돼. 알았어?”
“암요. 그럼요. 거긴 레지던트분들 하곤…….”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요새 가만 보면 선 넘어, 너?”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일단 영업 사원 대하는 거 보면 알 수 있었다.
거의 때리지만 않았지, 이만하면 폭력을 행사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제일 높은 게 서효석이었기에 다들 불편한 티도 내지 못했다.
“타자, 얘들아.”
그저 그나마 넘버 투인 수혁이 대훈과 하윤를 추슬러서 차에 올라탔을 뿐이었다.
차는 허름하다는 평을 간신히 면한 수준의 봉고였는데, 뭔가 꿉꿉한 냄새가 올라왔다.
[소고깃집 가는 모양인데요?]
오직 바루다만이 그 오래된 냄새에서 소기름 냄새를 떠올릴 수 있었다.
수혁은 심히 미심쩍긴 했지만, 최근 감각에 관한 분석도 곧잘 하게 된 바루다였기에 대강은 믿기로 했다.
‘넌 어째 신나 보인다?’
[소고기잖아요.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음.’
[좋게 생각하십쇼. 점심에도 잘 먹었는데, 저녁엔 소고기. 이런 하루가 또 어딨겠습니까?]
‘그, 그런가.’
하도 태평해하는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수혁도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해서 밖을 내다보았는데 흘러가는 풍경이 좀 낯설었다.
강남 근처에 이런 시골길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길이었다.
“방금 하남 들어왔습니다, 선생님.”
수혁과는 달리 내내 심란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던 안대훈이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수혁 옆에서 들은 하윤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왜 그래?”
해서 이렇게 물으니, 하윤이 아주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앞 좌석에 앉은 서효석과 운전대를 잡고 있는 직원을 슬쩍 바라보면서였다.
“저희 아버지도 내분비내과잖아요.”
“어, 알지.”
아선 병원 우창윤 교수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닥터 프렌즈에도 나오는 꽤 유명한 사람인데.
“그래서 서 교수님하고도……. 진짜 가끔 식사하고 그러세요.”
“아…….”
“근데 서 교수님이 자기 스트레스 쌓이면 레지던트 술 먹이러 가는 곳이 있나 봐요. 그게 하남에 있다고 들었어요.”
“허.”
이런 개새끼를 봤나.
환자 안 보는 것도 모자라서, 술까지 먹여?
그것도 이런 외진 곳까지 끌고 와서?
그런 줄도 모르고 소고기 먹는다고 들떠 있던 바루다가 제일 화를 냈다.
[이 새끼……. 이거 안 되겠네?]
‘안 되지. 근데 방법 있냐? 먹고 죽어야지…….’
[왜 죽어요? 내가 안 죽게 해 줄게요.]
‘무슨 수로?’
[나 바루다예요. 다 방법이 있어요.]
바루다는 수혁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요새 제법 감정 표현하는 법이 느는가 싶었는데, 이젠 나름 제스처도 적절했다.
‘음.’
하도 자신 있어 하니까, 무슨 체내의 효소라도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있나 뭐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결국, 바루다가 생각해 낸 것은 그런 세련되고 멋진 방법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뺑끼를 타라……. 이거지?’
[기술적으로 뺑끼를 치면 예술이 되죠.]
‘지랄…….’
[아무튼, 제가 신호하면 버려요. 할 수 있습니다.]
‘하아……. 괜히 걸려서 피똥 싸는 거 아냐?’
[아닙니다. 믿으세요. 손은 눈보다 빠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