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VIP (2)
수혁은 지팡이를 짚은 채 몸을 일으켰다.
혼자 덜렁 있었다면야 조금 떨릴 수도 있었겠지만.
최낙필 옆엔 수혁 바라기 중 하나인 신현태가 있지 않은가.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는 편을 들어 줄 터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해서 수혁은 상당히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최낙필은 사실 인사고 나발이고 화부터 내려고 했으나, 이수혁의 얼굴을 알아보고 나서는 잠시 주춤했다.
‘이수혁이 얘였나?’
원장 아들이라길래 어떤 놈인가 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작년 초쯤에 자신에게 수술받았던 바로 그 친구였다.
‘얘가……. 원장 아들이라고?’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그때 원장은 고아인 학생이 다치기까지 했는데, 교수가 되어서 고아라서 다행이냐는 말이 나오냐고 성을 내지 않았던가.
‘숨겨 둔 아들이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철저하게 숨겨 두나?’
남들 앞에서 고아라는 소리를 텅텅 해 대면서까지?
제아무리 이현종이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건 정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 과장님. 환자 이 병동에 있습니다. 그렇지? 수혁아?”
그가 그렇게 뻘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신현태가 수혁에게 말을 걸었다.
여느 때처럼 따뜻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말만 안 해서 그렇지, 거의 아빠나 다름없는 느낌이었다.
“어떤 환자……. 말씀이신지.”
하지만 수혁은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뻔히 다 아는 사안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감쪽같이 감출 수 있었다.
“아, 참. 얘기를 안 해 줬구나. 김다현 환자라고, 여기 최 과장님 환자였어. 네가 전과 받았던데, 아냐?”
“아……. 네, 제가 전과 받았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수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연기는 바루다마저 인정하는,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연기 아니던가.
애초에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던 신현태는 물론이고, 수혁이 다친 그 레지던트였다는 사실에 평정심을 잃은 최낙필까지 속아 넘어가고야 말았다.
“그, 너는 몰라?”
해서 최낙필은 씩씩거리던 것을 애써 감추고 입을 열었다.
수혁은 다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시선을 자신의 발끝으로 모았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아픈 기분까지 들게 할 지경이었다.
특히 신현태는 더더욱 그러했다.
“최 과장님, 애먼 애 잡지 마시고……. 일단 서효석 교수 올라오면 얘기하죠.”
“그……. 에이. 짜증 나게. 서효석 그 인간은 어디 있는데.”
“외래 끝났다고 했으니까 올라올 겁니다, 곧.”
“그 새끼는……. 남의 환자 데려갔으면 열심히나 볼 것이지. 내갈겨 둘 거면서 왜 데려갔어?”
최낙필은 자기도 정작 입원 후에는 본 적도 없는 주제에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수술이 일사천리로 잡힌 VIP 김다현 환자가 환자 엘리베이터를 향해 이송되었지만.
수혁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과 병동에 입원한 내과 환자가 수술장이라니.
무척 낯선 상황 아니겠는가.
“그……. 모르죠, 나야. 서효석 교수 특이한 거야 유명하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신 과장도 힘들긴 하겠어.”
최낙필은 되는 대로 화를 내다가, 문득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만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혁이야 원장 아들로 유명한 놈 아니던가.
이현종이 비록 괴짜였지만, 세계적인 대스타 의사였다.
심지어 운도 좋아서 딱히 경영에 관여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태화 의료원은 그가 원장으로 취임한 이래 계속 영업 이익이 늘고 있었다.
‘신현태도 그냥 과장이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까.’
서효석도 장가까지 기가 막히게 가긴 했지만,
신현태는 태어나기도 금수저로 태어난 데다가 장가도 더 잘 간 인간이었다.
태화 생명의 주축 중 하나가 바로 신현태의 아버지였고, 장인은 전자의 전무 이사였다.
그 말은 곧 기수 하나 제외하면 최낙필이 적어도 신현태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이었다.
해서 최낙필은 급히 화를 주체하기 시작했다.
신현태는 이 인간이 갑자기 왜 부드럽게 말을 하나 하면서도 일단은 맞춰 주었다.
“네, 뭐. 좀 안 맞는 부분이 있죠.”
생각 같아서는 서효석 같은 놈 대차게 까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른 과 교수 앞에서 그러는 건 아니다 싶어서 참았다.
띵.
다행히 서효석은 감히 두 과장을 오래 기다리게 둘 수는 없었는지 금방 병동에 올라왔다.
“휘유, 여기도 오랜만이네.”
내분비내과 교수가 내분비내과 병동에 들어서면서 하는 소리라기엔 좀 경악스러운 말을 해 대면서였다.
최낙필은 속으로 미친놈이라고 하면서 탕탕 병동 데스크를 쳐 댔다.
“서 교수. 이쪽이야.”
“아……. 최 과장님. 네. 안녕하세요.”
서효석은 못마땅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지만, 일단 인사는 건넸다.
자신과는 달리 최낙필은 실력 하나로 위로 올라간 진짜배기 칼잡이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머리 쪽 수술 하나만 놓고 보면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빙빙 돌아가는 거 싫어하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최낙필은 서효석이 가까이 오자마자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옆에 있던 신현태 말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너……. 김다현 환자 알고 빼돌린 거지?”
신현태는 서효석의 성질이 최낙필 못지 않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낙필보다 훨씬 더 치사한 인간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통 이런 싸움에 윗사람 끌어들이는 건 아주 치졸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서효석은 아니었다.
주저함이 전혀 없었다.
“네?”
그런데 서효석의 반응이 시원찮았다.
누가 봐도 전혀 아는 게 없는 듯한 반응이었다.
덕분에 소리를 내지른 최낙필도 조금은 민망한 얼굴이 되었다.
“김다현 말야, 김다현!”
“어……. 모르는 분인데. 뭘 빼돌…… 려요?”
서효석은 계속 띵한 얼굴이었다.
“아니, 잠깐만. 김다현? 태화 전자?”
오히려 신현태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다현이라면 가끔 아버지 통해 나가는 모임에 나오는, 겁나게 똑똑하지만 수수한 사람 아니던가?
아마 태화 직계 가족을 제외하면 가장 힘 있는 집안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래요, 그 김다현. 그러니까 내가 이 난리지. 근데 몰라?”
“아예 모르는 이름인데요?”
“구라치지 마. 전과까지 받았는데 왜 이름을 몰라!”
“전과요?”
전과요? 라고 되묻는 표정은 어떻게 보면 순수하기 짝이 없었지만.
김다현의 전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보면 더없이 빡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하.”
최낙필은 이 개새끼를 어떻게 해야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아, 잠시만요, 교수님.”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있을 무렵, 수혁이 끼어들었다.
수술장에서 받은 문자 결과를 확인하자마자였다.
<동결 절편 꽝 나왔습니다.>
문자는 덜렁 이렇게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아마 이비인후과 레지던트 3년 차인 김종세가 의도한 것도 그게 전부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수혁이 그 문자로 인해 떠올린 것은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응?”
“야, 어른들 얘기하는 데 왜 끼어들어.”
끼어드는 수혁에게 신현태는 관심을 보였고, 서효석은 무시했으며 최낙필은 화를 냈다.
어지간한 레지던트였다면야 이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겠지만.
수혁은 그런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아, 최 과장님께서 환자분에 관해 굉장히 궁금해하시는 거 같아서요. 제가 주치의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어? 아, 그래. 흠.”
최낙필은 마지막으로 서효석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때까지도 서효석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이었다.
처음 봤을 땐 연기라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그건 아닌 거 같았다.
‘그렇게 똑똑한 놈도 아니잖아.’
1년에 한두 명 정도 꼭 있는 법이었다.
쟤는 어떻게 의대에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서효석은 그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몇 학번에 걸쳐서 회자되는 희대의 바보였다.
‘진짜 모르는 거 같아. 오히려……. 이놈이…….’
해서 최낙필은 수혁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신현태는 애초에 수혁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곧 서효석을 제외한 모두가 수혁을 바라보게 되었다.
수혁은 그러한 시선을 담담한 표정으로 받아 가며 입을 열었다.
“우선 환자분은 원래 당뇨로 협진 의뢰된 환자입니다.”
“그래, 그랬지.”
“혈액 검사 중 HbA1c를 보면 혈당 조절은 지금 약으로도 아주 잘 조절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럴…… 테지.”
태화 전자의 에이스 이사 아니던가.
몸 관리에 있어서도 소홀히 할 사람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런 사람이 허리 입원이 필요할 정도의 통증을 호소하면서 올 줄이야.
최낙필은 아직도 그날 받은 전화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좀 이상했습니다. 통증을 호소하는 부위는 허리인데, 정작 골절선을 확인한 부위는 골반이었습니다.”
“음.”
듣고 보니 그것도 그랬다.
최낙필은 왜 그걸 놓쳤을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신현태는 역시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효석만이 뭔 소리야 하는 얼굴이었다.
하도 환자를 안 보다 보니, 감이 다 떨어져 버린 탓이었다.
“그래서 입원 다음 날 새벽 시행한 엑스레이를 보니, 갈비뼈 쪽에도 여러 군데 골절선이 확인되었습니다.”
“뭐? 갈비뼈?”
최낙필은 화만 낼 줄 알았지, 환자 검사 결과를 확인할 생각은 하지 못했던 참이었다.
애초에 자기 분야는 아니라고 판단했었기에 그저 협진이나 보면 되겠거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혁은 상당히 놀란 표정이 된 최낙필을 보며 후후 웃었다.
“그리고 환자 진술상 환자는 어디에도 부딪힌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다발성 골절까지 있는 상황이라, 일단은 내과적 원인일 거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허.”
최낙필은 등골이 쭈뼛 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감히 태화 전자 부사장의 딸이자, 태화 전자 전무 이사 본인의 진단명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던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수혁은 그러한 최낙필의 반응을 즐기며 말을 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수술방에 들어가 계셨고, 담당 레지던트였던……. 강동호 선생도 수술방에 있어서 부득이하게 전화로 전과를 받았습니다. 당시 환자가 통증을 상당히 심하게 호소하고 있어서 펜타닐 계통의 진통제 처방하여 조절하였습니다.”
“통증…….”
많이들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환자 치료에 있어 통증 조절은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특히 혈액종양내과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는데, 수혁은 조태진 교수와 친하게 지내면서 이런 개념을 많이 배운 바 있었다.
“그리고 시행한 본 스캔에서 제가 엑스레이에서 확인한 골절 외에 꼬리뼈 골절도 확인되었습니다. 이게 허리 통증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시행한 혈액 검사에서 신장에서 인의 재흡수가 떨어짐을 확인하였고, 이에 대한 원인 중 임파암에 대한 감별을 위해 절제 생검을 의뢰했습니다.”
“임파암? 이런 망할.”
최낙필은 이제 자신이 놓친 병이 암이란 사실에 절망하기 시작했다.
“아, 올라오셨네요. 설명을 좀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그런 최낙필 뒤로 모습을 드러낸 김다현을 가리키고는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딸칵.
지팡이를 짚은 채였기에 무척 느렸지만.
그 누구도 그를 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수혁이 늘어놓은 설명엔 그만큼의 힘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