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7화 (127/1,303)

127화 VIP (1)

김다현.

태화 의료원의 모회사인 태화 생명의 최대 주주 회사인 태화 전자의 전무 이사는 무료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통증이 없으니 살겠네.’

전과 되기 전까지는 뭔 약을 먹어도 안 듣는 것처럼 말하더니.

이수혁이라고 하는 젊은 선생이 데려온 이후엔 잘만 통증이 조절되고 있었다.

‘엄청 어려서 걱정했는데.’

사실 원장한테라도 따로 전화를 해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들었더랬다.

물론 사장단 회의에서 봤던 이번 원장은 이런 식의 말이 잘 안 통할 거 같긴 했지만.

‘이현종이라고 했던가.’

태화의 다른 분야도 다 그렇겠지만.

이현종은 자신의 분야에서 가히 세계 최고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청탁을 잘 들어주지 않는 법이었다.

특히 그 청탁이 위에서 내려온다는 느낌을 주면 더더욱 그랬다.

덜커덕.

김다현 환자가 계속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문이 열렸다.

5시 반부터 와서 귀찮게 했던 신경외과 사람들인가 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어제 봤던 그 내과 의사였다.

진단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되었건 간에 통증은 사라진 상황 아니던가.

수혁에 대한 감정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아, 선생님.”

따라서 김다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은 후, 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혁은 그런 다현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환자분. 아프진 않으세요?”

그리곤 일단 통증부터 물어보았다.

예전의 수혁과 바루다였다면 통증보단 진단 과정에 도움이 될 질문부터 했겠지만.

지난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쌓아 온 경험이 둘을 달라지게 만든 셈이었다.

이제야 환자의 고통에 조금은 더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자신이 치료하는 것이 병이 아니라, 환자라는 걸 가슴으로도 알게 되어 가고 있다고 보면 되었다.

“아……. 훨씬 나아요. 움직일 땐 아픈데.”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골절이 있어서 무리해서 움직이면 더 아플 거고……. 골절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아, 네. 그런데……. 혹시 제 병명은 나왔나요?”

환자의 말에 수혁 뒤에 서 있던 대훈과 하윤의 얼굴이 흐려졌다.

방금까지 임파암일 가능성이 크다는 대화를 나누고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얼굴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1년간 내과 의사로 살아온 경험이 그를 더 신중하게 만들어 준 덕이었다.

[잘했습니다. 100% 확신이 들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수혁이나 바루다나 주치의를 하면서 느껴 온 것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환자들이 생각보다도 더 의사들의 말 한마디에 출렁인다는 것이었다.

잘못 나간 말 한마디가 환자를 절망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고.

많이 생각해서 나간 말 한마디는 환자의 치료 의지를 북돋아 줄 수 있었다.

특히 조태진 교수가 있는 혈액종양내과에서 그러한 사실을 많이 느낀 바 있었다.

“일단 내과적 원인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환자분의 몸에서 인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오늘부터는 그 원인을 알아보기 위한 검사를 해 보고자 합니다.”

“아……. 네.”

김다현은 인이 빠져나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자신의 다발성 골절과 연관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검사 중 하나가 좀……. 불편한 검사일 겁니다.”

“불편이요?”

“네. 잠시만 목을 보여 주실까요?”

“목을? 아, 이거요. 네.”

김다현은 아까 하윤에게 해 주었던 말을 떠올린 후, 순순히 목을 수혁에게 들이밀었다.

좌측 경부 레벨 4 정도에 대략 1cm 정도 되는 덩이가 하나 있었다.

‘체인 형태가 아니네.’

[주변에 눌어붙어 있지도 않습니다.]

‘악성 가능성이 떨어지기는 하는데…….’

[하지만 임파암에서는 이런 특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긴, 그건 그래.’

단순 CT에서도 완전히 감별이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영상 검사를 해도 그런데, 이런 검진에서 어떻게 감별을 한단 말인가.

적어도 임파암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조직 검사는 거의 필수라고 보면 되었다.

“이 덩이 떼어 내서 조직 검사를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떼어…… 내? 수술인가요?”

“일종의 수술이긴 합니다만, 전혀 어려운 수술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직접 하시나요?”

다현은 어쩐지 수혁에게라면 뭐든 맡길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젊어서 처음에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뭔가……. 아주 능숙하단 말이지.’

마치 한 분야의 대가와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이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김다현 이사가 늘 마주하는 다른 사람들의 지위를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이미 움직인 후였다.

안타깝게도 수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비인후과에 의뢰할 겁니다. 목은 그쪽이 전문이라.”

“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기본 술기에 해당하는 술기예요.”

“혹시 어떤 교수님이 하게 되나요?”

다현의 말에 수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절제 생검과 같은 간단한 협진 수술은 교수급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개 레지던트 3년 차나 4년 차가 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바루다가 끼어들었다.

[느낌 싸한데요?]

‘왜. 뭐가 싸해.’

[제가 의료 외적인 것도 일단 데이터로 쌓아 두고 있는 건 알고 계시죠?]

‘알고 있지.’

수혁은 굳이 쓸데없는 짓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쓸모 있던 적이 없지 않은가.

아마 바루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의 생각과는 달리 바루다는 곧 입을 털어 대기 시작했다.

[일단 최낙필 교수가 자기 세부 분과 아닌 환자를 입원시킨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

[신경외과에서 따로 요청도 없는데 전과한 환자를 보러 온 적도 없고요.]

‘그럼 뭐야?’

[이 환자 VIP인 거 같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아…….’

단 한 번도 환자를 볼 때 그 환자의 신분을 고려한 진료를 해 본 적은 없는 것이 수혁이었다.

물론 직업이나 사는 곳을 물어본 적이야 많았지만.

그건 진단을 위한 질문이었지, 환자를 판단하기 위한 질문은 결코 아니었단 얘기였다.

하지만 수혁 또한 머리가 꽤 잘 돌아가는 축에 속하는 사람 아니던가.

바루다의 말을 듣자마자 딱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쩐지, 좀 이상하긴 했어. 저 신경외과가…….’

[차트에 아무 표시가 안 되어 있는 건 좀 이상한 일이지만. 얼마 전 네이버 뉴스 기사에서 본 이름이랑 같습니다. 김다현, 태화 전자 전무 이사입니다. 나이도 같아요.]

수혁은 바루다의 말을 들으며 즉시 핸드폰을 꺼내 검색을 시작했다.

바로 옆에 있던 김다현 환자가 좀 이상하게 여기긴 했지만, 의사는 가운 걸치고 뭔가 서두르면 다 그럴싸해 보이는 법이었다.

김다현 환자는 설마하니 수혁이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고 있단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헐. 태화 전자 부사장 따님인데?’

태화 전자 부사장의 딸이라.

재벌가의 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전자 내에서는 끗발 날리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그러니까 교수님한테 받도록 해 줍시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해 줬다는 걸 알면 감동하겠죠.]

‘그건 좀……. 아니, 아냐. 알았어.’

수혁은 의사로서 이렇게까지 특혜를 줘도 되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약간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어쩌겠는가.

수혁은 짤막한 토의를 더 나눈 끝에 재차 입을 열었다.

“협진 수술이라 어떤 교수님이 맡게 될지는 모릅니다. 결정되는 대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나요?”

“네. CT 하나만 찍고요.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고 해도 검사가 필요하긴 하거든요.”

“아……. 네. 알겠습니다.”

경부는 초음파도 상당히 효율이 좋은 부위이긴 했다.

하지만 역시 수술 방법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CT만 한 것이 아직은 없었다.

다행히 CT는 MRI처럼 오래 걸리는 검사가 아니었고, 따라서 예약 환자 중간중간 비는 시간이 있었다.

게다가 김다현 환자가 VIP라는 걸 원장 아들이 암시하는데 그 누가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수혁이 CT가 필요하다고 한 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검사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모니터에 뜬 환자의 종물은 아무리 어렵게 봐줘도 레지던트가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걸 그럴싸하게 포장하라 이거지.’

[네, 다행히 수혁은 현재 병원에서 꽤 유능하다고 소문이 나 있으니 가능할 겁니다.]

‘실제로 유능하거든.’

[전부 수혁의 공은 아니죠.]

‘그래, 네 덕도 있다, 됐냐?

[사실을 언급하는데 되고 말고가 있겠습니까?]

‘후.’

수혁은 한숨 속에 일말의 화를 털어 낸 채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네, 이비인후과 협진방 3년 차 김종세입니다.”

다이얼을 누르자 곧 상대방이 응답했다.

무척 사무적인 어투였는데, 원래 이런 사람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김종세는 병원의 이러저러한 소문에 대해 관심이 많기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마 수혁에 관한 얘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내과 2년 차 이수혁입니다.”

“아, 네. 이수혁 선생님. 혹시 협진 내셨나요?”

아니나 다를까, 김종세는 수혁의 이름을 듣자마자 친절한 어투로 대꾸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냉정하기만 하던 말투는 간 곳 없이 사라져 있었다.

“네. 방금요. 절제 생검이 필요한 환자이고……. 음.”

“네, 말씀하세요.”

김종세는 왜 말을 하다 마냐는 표정으로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5초 정도가 흐른 후에야 수혁의 말을 이어서 들을 수 있었다.

“이건 비밀인데……. 환자가 VIP거든요.”

“아……. 네. 어느…….”

병원 VIP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었다.

일단 정치인.

더 말해 뭐 하겠는가.

당연히 VIP 대우를 해 주기 마련이었다.

두 번째로는 연예인 등의 유명인들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파급력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한데, 태화 그룹의 중진들이었다.

직접적으로 돈 주는 사람들이니만큼 VVIP 대우를 받고 있었다.

“태화 쪽. 근데 밝혀지길 원치 않으세요. 절대 알려지면 안 됩니다.”

“아, 아. 네.”

김종세는 태화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그뿐만 아니라 전화기를 잡고 있던 손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이수혁이 원장 아들인데, 그런 이수혁조차 긴장할 정도면 대체 어느 정도의 VIP란 말인가.

“그거 직접 하실 순 없을 거 같고……. 혹시 오늘 교수님 중에 손 남는 분 계시나요? 펠로우라도.”

“어……. 어……. 아, 펠로우는 한 분 계십니다.”

“오케이. 좋아요. 그럼 오늘 바로 해 주실 수 있나요?”

“해, 해야죠. 바로 잡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 아뇨. 네, 잡고 또 연락 드리겠습니다.”

수혁은 VIP라는 말에 벌벌 떨며 전화를 끊은 김종세를 보며 혀를 츠츠 찼다.

‘속물이구만.’

바루다는 그 말을 들으며 ‘누가 할 소리’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병동 엘리베이터 쪽에서 표정이 무척 어두운 사람 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신현태와 최낙필이었다.

방금까지라면 왜 저러나 싶겠지만.

이젠 알 수 있었다.

‘환자 빼돌린 것처럼 느끼겠지?’

[그럴 겁니다.]

‘괜찮겠지? 우리가 더 잘 보고 있잖아.’

[물론이죠. 오히려 저쪽이 꿀리죠. 개판으로 보고 있었는데.]

바루다의 말에 수혁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꿀릴 일이 없었으니까.

‘좋아. 그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