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20화 (120/1,303)

120화 종양은 어디에나 (1)

‘종양?’

[그래요. 종양. 갑상선에서도 처음 의심했던 건 역시 종양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갑상선 종양이라고 해서 다 암인 건 당연히 아니었다.

오히려 암이 아닌 종양이 훨씬 더 많았다.

그중 태반은 별 기능이 없는 것들이긴 했지만.

일부는 갑상선 호르몬을 과다하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절을 받지 않고 막무가내로 내보내는 놈들이 있었다.

[갑상선 말고 다른 걸 한번 생각해 보시죠.]

‘넌 대강 알고 있구나?’

[알고 있죠.]

‘흠.’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마냥 빨리 알려 달라고 졸라 댔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일단 급하진 않은 상황이니까.

에크모를 달기 전이었다면 몰라도.

지금은 달지 않았던가.

적어도 하루 이틀은 번 셈이었다.

다만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흉부외과 의사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있다는 것만 마음에 좀 걸릴 뿐이었다.

“아, 저 잠시만 기기 세팅 한번만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시죠.”

다행히 흉부외과 의사는 잠깐 수혁을 바라보고 있다가 에크모를 향해 걸어갔다.

얼마간의 시간을 번 셈이었다.

‘범위를 넓혀라, 이거지. 흠.’

해서 수혁은 그렇게 번 시간을 허투루 쓰는 대신 사고를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심장을 빨리 뛰게 할 수 있는 호르몬들부터 떠올렸다.

‘갑상선이 있긴 하지만 일단 이건 아니고. 그렇다고 갑상선 자극 호르몬도 아닐 거야.’

우리 몸의 호르몬은 아주 복잡한 체계를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강이나마 설명하자면, 우리 몸의 갑상선 호르몬이 부족하면 그걸 더 만들라는 신호가 되는 갑상선 자극 호르몬이 분비되고, 이를 통해 갑상선 호르몬이 만들어지는 시스템이었다.

즉 갑상선 자체에 종양이 없더라도, 갑상선 자극 호르몬을 막무가내로 만들어 내는 종양이 있다면 체내에 쓸데없이 많은 갑상선 호르몬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만 이런 상황이라면 대개 갑상선이 정상보다 커져 있기 마련이었다.

환자는 정상이었던 데다가, 바루다 또한 갑상선은 아니라고 단언한 바 있지 않은가.

해서 수혁은 그 범위를 좀 더 넓혀 보았다.

다행히 우리 몸에서 심장박동 수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설마 부신인가?’

이미 수많은 데이터를 쌓아 올린 바 있는 수혁은 금세 관련된 장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바루다는 상당히 대견하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부신에 생길 수 있는 종양 중 하나죠.]

‘갈색세포종(Pheochromocytoma)? 아, 그러고 보니……. 증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긴 하는데.’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는 게 아니라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집니다. 아까도 보십쇼. 심장이 그 지경인데, 심장박동 수 자체는 쳐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강제로 뛰게 하고 있다는 뜻이죠.]

‘그래, 네 말이 맞아.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마침 흉부외과 의사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젠 대답해 주겠지 하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사실 저쪽은 펠로우고 이쪽은 레지던트라 서로 대화를 나누기에는 체급이 맞지 않았지만.

흉부외과 의사는 수혁이 원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높게 사 주고 있었다.

“결정하셨나요?”

따라서 여전히 예의 바른 태도로 물었다.

당연히 데려가라고 하겠지 않는 표정을 지어 가면서였다.

하지만 수혁은 그의 예상과는 달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환자 심장 원인이……. 아무래도 내분비 질환이 맞는 거 같습니다.”

“그래요? 응급실에서 당뇨에 의한 케톤혈증이나……. 뭐 이런 건 배제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해서 흉부외과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옆에 있던 대훈이나 하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 환자는 내과 손을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 그런 질환은 아닙니다.”

“게다가 지금 이 환자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건……. 스트레스성 심근병증이지 않습니까? 심장 쪽에 대한 매니지라면 저희가 나을 거 같은데요?”

예상과 다른 답에 흉부외과 의사는 평정을 잃고 있었다.

역시 이현종하고 연관된 놈들하고는 말을 섞지 말라고 했던 교수님 말도 떠오르기도 했고.

“아, 그거에 대해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에크모도 달아 주셨고요.”

“그럼 대체 왜 전과를 안 하시는 거죠? 제가 볼 때 내분비 쪽 원인을 의심할 만한 근거가 없는 거 같은데.”

“아뇨, 그건 아닙니다. 스트레스성 심근병증을 일으킨 원인은 아마도 내분비 질환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이수혁 선생님. 선생님이 여기 안대훈 선생한테 갑상선이 정상이니, 알코올 원인이 아니라면 아예 원인 불명이거나 기타 감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록에 다 나와 있던데요?”

에크모라는 게 달아 달라고 해서 딱딱 다는 물건은 아니지 않은가.

그걸 부탁한 사람이 아무리 수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원장 아들이 아니라 원장 본인이 요청한다고 해도 그랬다.

따라서 달기 전에 흉부외과 쪽에서도 충분히 기록을 검토해 놓았더랬다.

그 기록을 보아하니, 딱히 내과 쪽에서는 손 쓸 도리가 없는 듯해서 전과하라는 얘기를 한 것이었고.

그러니 지금 흉부외과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수혁은 별로 기분 나빠 하는 기색도 없이 그저 웃어 버렸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땐? 지금 에크모 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새 생각이 바뀌셨어요?”

“내과적 추론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갑자기 진전될 때도 있는 법이죠.”

“내과적……. 추론?”

흉부외과 의사는 너무나도 당당한, 그러면서도 무례하지는 않은 수혁을 어찌 대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 레지던트 2년 차에 불과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교수라도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입 한번 털어 줄까?’

[그래야 납득하고 돌아갈 거 같은데요? 뭐 에크모 달아 줬으니, 들을 권리가 있긴 하죠.]

‘오케이.’

물론 수혁의 머릿속에서는 고상함과는 다소 거리가 먼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수혁의 연기력에 의해 표정만큼은 진중함을 이어 나가고 있었기에 흉부외과 펠로우는 이러한 사실을 결코 눈치챌 수 없었다.

“이 환자는 술을 먹고 이 모든 증상이 발생한 겁니다. 그렇죠?”

“그, 그렇지.”

펠로우는 힐끔 환자 쪽을 바라보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에크모는 정말이지 잘 연결된 상황이었다.

그냥 저대로만 두고, 아무 처치도 하지 않더라도 한동안은 괜찮을 터였다.

“즉 술이 방아쇠 역할을 한 겁니다. 하지만 술이 제거된 상황에서도 환자의 질환은 아주 빠르게 진행했습니다. 술은 방아쇠 역할을 했을 뿐, 궁극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뜻이 되죠.”

“그……. 음. 그렇지.”

펠로우는 간신히 ‘그런가?’라는 멍청한 반응을 집어삼켰다.

그사이 수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즉석에서 꺼내 놓기 시작한 얘기라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 정돈돼 있었다.

옆에 있던 대훈이나 하윤은 물론이고, 담당 간호사들마저 넋을 놓고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술의 부작용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질환이 원인이 되었을 거란 것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따라오셨죠?”

“어? 어. 그래. 그렇겠네.”

펠로우는 이놈이 정말 레지던트가 맞나 하는 생각조차 잘 떠올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저 따라가는 것만도 바빴다.

“아시다시피 술은 우리의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만듭니다. 그럴 수 있는 질환 중엔 갑상선 질환들이 있죠. 정확히 말하자면 기능 항진증이나 갑상선 호르몬을 분비하는 선종 또는 갑상선 자극 호르몬을 분비하는 뇌하수체 선종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어…….”

펠로우는 언젠가 학생 시절 들어 보았던.

이제는 아득한 추억이 되어 버린 질환명들을 떠올렸다.

‘그런 게 있긴 있었지.’

이런 생각을 하느라, 아까 수혁이 자기 입으로 갑상선은 깨끗하다고 했던 것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딱히 그를 탓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대훈이나 하윤 또한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으니까.

각기 머릿속으로 수혁의 말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가 초음파로 본 결과 갑상선을 깨끗했습니다. 즉 갑상선이 원인은 아니라는 뜻이죠. 뭔가 다른 질환이 있다는 뜻입니다.”

“음. 다른 질환?”

“네. 갈색세포종이 있을 수 있죠.”

“아. 갈색세포종…….”

갈색세포종은 이름이 무척 낯설겠지만, 적어도 태화 의료원처럼 큰 병원에서는 그렇게까지 드물진 않은 병이었다.

그 질환의 특성상 흉부외과 측에서 이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보게 될 가능성도 상당히 컸고.

“갈색세포종은 교감신경을 활성화시켜 버리죠. 즉 지금 이 환자에서 관찰되는 빈맥이 설명됩니다. 알코올 섭취 후 증상이 악화된다는 보고도 상당수 있었고요. 그 알코올 섭취를 제거한 이후에도 증상이 진행한 것에 대한 설명도 됩니다.”

“아……. 가능성이……. 가능성이 있겠어.”

“네. 그래서 내분비내과에서 계속 보고자 합니다. 그래도 될까요?”

“무, 물론이죠. 그럼…….”

“그래도 에크모에 관해서는 흉부외과 쪽에서 계속 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그래. 그렇게 하죠. 음. 그럼……. 저는 이만…….”

펠로우는 적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후다닥 중환자실을 빠져나갔다.

얘기나 들어 보고 성질을 낼 걸 그랬지 하는 후회가 강하게 밀려온 탓이었다.

다행히 수혁에게 딱히 탓할 생각이 있는 거 같아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민망한 건 민망한 것이었다.

“와……. 진짜. 진짜 그렇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아니, 어떻게 보지도 않고 여기까지 의심할 수 있는 거죠?”

반면 수혁의 팬클럽.

그러니까 대훈과 하윤은 거의 뭐 반쯤 혼이 나간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러지?”

“진짜 천재세요. 아니, 천재라는 말도 부족해.”

이대로 두면 영원히 칭찬이 계속될 거 같았다.

물론 수혁이나 바루다나 둘 다 칭찬을 마다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될 수 있으면 교수한테 듣는 게 좋지, 아랫사람한테 계속 듣고 싶진 않았다.

“그만, 그만. 아직 확인은 해 봐야 해.”

“아. 어떻게……. 하죠?”

“제일 좋은 건 CT겠지만. 그건 좀 어렵지.”

“에크모를 달았으니까요. 아마 안 될 거 같습니다.”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면 찍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성가셨고, 또 환자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초음파를 보자.”

“네? 복부도 볼 수 있으세요?”

해서 수혁은 초음파를 보기로 결정했다.

수혁이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는 대훈은 아주 당연하게도 또다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 배우지도 않았는데 뭘 봐.”

“아.”

“김진실 교수님 불러서 봐야지.”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냐, 아냐. 나랑 뭐 하시는 게 있어서. 직접 연락하는 게 나을 거야.”

수혁은 그렇게 대훈의 주접을 진압한 후, 김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진실 교수는 원래 수혁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데다가, 마침 시간도 난 참이었던지라 곧장 전화를 받았다.

“어, 무슨 일?”

수혁은 무턱대고 초음파를 봐 달라고 하는 대신 간략하게나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 설명을 다 들은 김 교수의 입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듣고 보니 갈색세포종을 의심하는 게 너무 타당해 보였지만.

듣기 전엔 전혀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 그래, 그래. 내가 지금 바로 가서 한번 볼게.”

해서 김 교수는 아주 놀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알면 알수록 왜 우리 과에는 이런 애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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