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15화 (115/1,303)

115화 귀국 발표회 (1)

예전엔 해외 연수하면 정말 놀러 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실제 교수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보상이라는 인식이 강하기도 했고.

병원에서도 묵인해 주고 있었더랬다.

‘흠.’

[놀라게 해 줘 볼까요?]

‘뭘 맨날 놀래 줘.’

[검토해 본 결과, 이때까지 우수 전공의 연수 발표에서 뭔가 보여 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그건 그래.’

1, 2년짜리 장기 연수도 그런 실정인데.

1달짜리 단기 연수는 사정이 어땠겠는가.

그것도 교수도 아니고 레지던트들이 가는 연수였다.

한창 인생 빡셀 때 주어지는 한 달간의 달콤한 휴식 시간이라는 뜻.

수혁은 잠시 돌아와서 보았던, 지금까지 그의 선배들이 만들었던 귀국 발표회 PPT들을 떠올렸다.

거의 무슨 어디가 맛집이고, 어디 가면 뭘 팔고 하는 식의 PPT들이었다.

딱히 연수 발표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그저 여행 후기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자, 그럼 이번 연도 우수 전공의로서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에서 한 달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이수혁 선생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한창 쓴웃음을 짓고 있을 무렵, 앞에 나가 있던 신현태 과장이 수혁을 향해 손짓했다.

기껏해야 조촐한 과 내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강당 내부는 거의 꽉 차 있었다.

‘PPT 잠깐 봤는데, 거의 케이스 리포트 수준이더라. 그런 거 안 보러 오는 놈은 내과 의사 자격이 없다고 간주하겠어.’

팔불출 수준으로 수혁을 싸고 도는 이현종이 설레발을 잔뜩 떨어 둔 덕이었다.

하지만 그의 촐랑거리는 성격과는 별개로 이현종이 쌓아 온 의학자로서의 명성과 명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 아니던가.

해서 강당엔 비단 내과 의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과 친구들도 제법 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방금 소개받은 태화 의료원 내과 2년 차 이수혁입니다.”

해서 수혁은 더욱 공식적인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이미 여러 차례 학회에서의 발표도 치러 낸 몸이라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도리어 여유롭기 그지없어 보였다.

“난 놈은 난 놈이야.”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영상의학과의 대부 이하언이 턱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수제자이자 라이징 스타 중 하나인 김진실 교수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진행 중인 연구도 잘 되어 가고 있어요.”

“아, 그거? 좀 어때?”

“교수님이 예상했던 대로 어느 정도는 전이의 위험성이 관찰됩니다만……. 술자의 능력에 따라 컨트롤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깊으면 깊을수록 확률이 올라가나?”

“네.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한……. 10례만 더 해서 만들어 보자. 그거 꽤 높은 데 낼 수 있을 거 같아.”

이하언 교수는 머릿속으로 논문 윤곽을 짜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발표자인 수혁이 본격적으로 발표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현종과 거의 비슷한 연배에 학회 내 위치도 비슷한 그였지만, 매너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이나 좋았다.

“잘한다, 이수혁.”

수혁은 눈을 감아도 누구 목소린지 알 것 같은 응원을 애써 무시한 채 화면을 가리켰다.

“이게 제가 있던 숙소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계신 교수님들이나 펠로우 선생님들께서도 이 숙소에 묵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래됐지만, 청소만 제대로 하면 한 달 지내기엔 무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던 수혁에게는 평생 지내려면 평생 지내기에도 괜찮은 숙소이긴 했지만.

좋은 강연자는 어느 정도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이제 수혁은 그 정도 수준은 지나 있었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병원과 아주 가깝다는 점이죠. 길 하나만 건너면 바로 병원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출퇴근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내킬 때 병원에 가고, 또 연구소에 갈 수 있었습니다.”

다른 레지던트 발표들과 별 차이 없던 발표가 조금씩 방향을 틀고 있었다.

적어도 아무 때나 병원이나 연구소에 갈 수 있어서 좋다고 했던 레지던트들은 없었으니까.

[언제나 느끼는 점이지만. 수혁은 정말 거짓말에 능하네요.]

뭐하러 병원 가까이에 숙소를 잡았냐고, 마트나 가까웠으면 얼마나 좋았냐고 투덜대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바루다의 핀잔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콩깍지가 씌어도 너무 깊이 쓰인 이현종이나 신현태는 그저 흐뭇하게 웃고만 있었다.

“그럼 제가 연수 기간 경험했던 다양한 케이스에 관해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어느 틈엔가 케이스까지 준비하지 않았던가.

연수를 가 있는 동안 놀지 않은 사람도 드물었지만.

놀지 않고 열심히 했더라도 케이스 발표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료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다.

[이건 진짜 다 제 덕인거 알죠?]

심지어 수혁도 그러했다.

바루다가 수혁의 시각을 통해 전달된 모든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저장해 두지 않았다면 이런 발표는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건 인정.’

[그럼 저녁에 짜장에 탕수육에 짬뽕 국물. 미국 갔다 왔더니 니글거려요.]

‘왜 네가 니글거려……. 토종 한국인인 나도 버틸 만했구만.’

[저도 토종이거든요? 메이드 인 코리아.]

‘그래, 그래. 알았다.’

수혁은 어째 점점 더 모자라지는 듯한 바루다를 달랜 후, 발표를 이어 나갔다.

환자의 나이, 성별 및 직업은 물론이오, 아주 세세한 혈액 검사 결과까지 다 적혀 있었다.

이쯤 되니 이현종도 조금은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저걸 다 제공해 줬나? 이상하네? 양키 놈들……. 환자 개인 정보 절대 안 내줄 텐데?”

“기억해서 쓴 거 아닐까요?”

“그게 된다고? 야, 지금 나온 검사 항목만 몇 개야 저거.”

“수혁이는 천재잖아요.”

“현태야. 네가 천재가 아니라서 천재에 대한 환상이 너무 큰 모양……. 억. 왜 때려. 나 형…… 아니, 원장이야.”

“그러니까 이쯤에서 끝난 거지, 아니었으면 지금쯤 머리 죄 뽑혔을 겁니다.”

“허.”

이현종은 가뜩이나 요새 하늘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사이 수혁은 대마로 인한 면섬유증에 관한 발표를 마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세 개의 케이스가 발표되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주옥같은 케이스였다.

당연하게도 이 자리에 모여 있던 모두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가서 저걸 다 진단했다고?”

“허언증이 있나……?”

“근데 이수혁이잖아. 모르냐? 쟤 괴물이야.”

“미국에서도…… 통한다고?”

“안 통할 건 또 뭐 있어. 뭐 우리가 미국 애들보다 많이 딸리냐?”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몇몇 선배 중에는 애써 시큰둥한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있긴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수혁의 열성 팬임을 자처하고 있는 둘이 그랬다.

“지렸다. 미국도 찢고 오셨어…….”

“그러니까요. 아 빨리 내과 들어가서 같이 다니고 싶다!”

“그래, 어여 들어와. 진짜 따라만 다녀도 배울 게 너무 많다니까.”

“부러워요…….”

안대훈과 우하윤이었다.

‘새끼들.’

수혁은 단상 위에서도 훤히 보이는 둘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 보려고 해도 안대훈이 너무 눈에 띄었다.

[미국 다녀오기 전보다 더 넓어졌군요.]

‘그러니까……. 탈모약 하나 만들 수는 없나?’

[제아무리 저라도 전 세계 의학자들이 다 달려들어도 못하는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거참……. 항암제도 만드는 세상에 발모제 하나 못 만드나.’

[인체의 신비죠.]

물론 여전히 암은 현대 의학의 숙제이기는 했다.

타임스에서는 아예 공식적으로 20세기에 있었던 암과의 싸움에서 인류가 패배했다고 선언하기도 했고.

하지만 아주 천천히 개선되어 가고는 있었다.

몇몇 암에 관해서는 완치율 90%가 넘어가는 약이 나오기도 했고.

그런데 탈모에 관해서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다음은 병원 케이스는 아니고, 거기서 만난 화이자 시카고 연구소의 소장 헨리에 대한 발표입니다. 우연히 파티에서 대외 연구 총책 로니라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 덕에 연구소에 참관을 하러 가게 되어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안대훈의 탈모는 비록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발표를 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래서 수혁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헨리는 25년간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명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 왔고, 이 때문에 항우울제 및 항불안제를 복용해야만 했습니다. 수면에 방해를 받아 수면제까지 복용해야 했고요.”

잠깐 조용해지나 싶었던 강당이 다시 한번 웅성거림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갑자기 웬 화이자 연구소장이 나온단 말인가.

심지어 이현종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로니? 설마……. 전에 학회에서 봤던 그 로니야?”

“대외 연구 총책……. 잠깐만요.”

신현태는 부랴부랴 자신의 핸드폰을 뒤졌고, 급기야 언젠가 찍어 두었던 로니의 명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맞는 거 같은데요?”

“아니……. 그런 사람이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고 막 그럴 수 있는 거야?”

“애초에 어떤 파티인지 얘기를 안 했잖아요.”

“아, 그렇긴 하네. 어떻게 된 놈이냐, 쟤는 정말.”

“그러니까요.”

수혁은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일단은 즐기듯 웃었다.

‘역시 화이자의 위력이란…….’

[전 세계 최고의 제약 회사 중 하나니까요. 거기 펀딩 받는 게 하늘에 별 따기라서 그렇지……. 따기만 하면 결과를 보일 수 있죠.]

꼴랑 한 달짜리 연수를 가서 그쪽과 연이 닿았다는 거 자체가 놀라운 일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수혁의 발표는 그냥 만났다는 데서 끝이 아니지 않은가.

무려 치료까지 다 하고 온 마당이었다.

“이건 제가 아스피린을 끊게 한 이후 받은 이메일입니다. 날짜가……. 아, 어제 또 왔네요. 내용을 보시면, 첨부 파일에 초청장이 하나 있습니다.”

심지어 헨리는 의리를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 약속을 지킬 줄 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벌써 내년에 있을 학회 초청장까지 미리 보내왔더랬다.

“전 세계 지부마다 열리는 행사인데……. 이번에는 홍콩이라고 하더라고요. 여기에 저 그리고 저와 함께해 줄 교수님 한 분까지 초대를 해 주셨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가서 많이 배워 오겠습니다.”

일반 학회였어도 어마어마하게 놀랄 일이었다.

일개 레지던트에게 비행기값까지 대 주면서 초청하는 학회는 없었으니까.

심지어 교수들이라 해도 소정의 강연비로 퉁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금 수혁에 관한 대우는 그야말로 VIP급이라고 보면 되었다.

“미쳤네?”

“대놓고 자랑질이네.”

“자랑할 만하지.”

“왜 자꾸 나한테 화내냐?”

“네가 속 좁은 티 내니까 그러지.”

이번에는 황선우를 비롯한 반 수혁파 몇몇이 투덜거리긴 했지만.

별로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는 없었다.

“야, 나! 나랑 가는 거지!”

이 자리에서 제일 나이 많은 어른인 이현종이 날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어어, 이 형 봐? 안 그래도 해외 학회 많이 가면서 이래?”

“장유유서 모르냐?”

“험험. 두 분 교수님들. 약 하면 역시 항암제 아닙니까? 수혁아, 나랑 가자.”

심지어 신현태와 조태진까지 참전해서 거의 아수라장이었다.

타과 앞에서 약간 개망신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 레지던트들은 뭐 하고 있나…….”

“야, 너희들 이따 의국 가서 보자.”

교수치고 공짜 해외 학회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화이자에서 주최하는 학회는 말이 학회지, 일종의 밋업(Meet up) 장소라고 보면 되었다.

실제로 저기서 발표하다가 연구비 지원받는 경우가 엄청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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