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헨리 (5)
우선 수혁은 헨리를 따라 연구소를 돌았다.
피차 바쁜 몸이니 후딱 돌자고 했던 때와는 당연히 들인 시간과 공이 달랐다.
덕분에 수혁은 아니, 바루다는 연구소의 구조를 상당 부분 수혁의 머릿속에 욱여넣을 수 있었다.
‘신기하네. 3D로 구조화되어 있어.’
[이 바루다니까 가능한 일이죠.]
‘인공지능은 다 되는 거 아닐까?’
[아뇨. 오직 바루다만이 가능합니다.]
‘갑자기 뭔 근자감이래.’
[아뇨, 진짭니다.]
얘기를 더 들어 보니 사실은 사실이었다.
현존하는 인공지능 중에서는 바루다처럼 인간의 감각을 사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없지 않은가.
따라서 그냥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실제 구조를 스캐닝해서 설계도화시키는 건 오직 바루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근데 별 효과가 없었나?’
수혁은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벌써 시카고 연구소에 다녀온 지 4일째 아침이었다.
아스피린을 그날 끊었다면 이명이 사라져야만 했다.
그랬다면 전화가 왔어야만 했고.
[그러게요. 뭐……. 안 낫는다고 해도 우리가 손해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잖아.’
[그러니까요. 감히 이 바루다가 관여한 진단이 실패했다 이건가?]
‘핀트가 좀 이상한데? 아스피린에서 부작용 떠올린 건 나거든?’
[수혁이야 제가 만들다시피 한 건데요, 뭐.]
‘이, 미친. 아.’
수혁은 욕설을 늘어놓다 말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다 남긴 냉동 피자와 김빠진 콜라 등이 놓여 있었지만, 그중에서 핸드폰 골라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헨리군요.]
바루다는 핸드폰에 뜬 번호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받았던 명함에 적혀 있던 번호가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나도 소용없다는 식의 전화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날 본 혠리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에 심력을 소모할 사람은 아니었다.
본인 건강을 그토록 강박적으로 챙기는 사람 아니었던가.
아마도 긍정적인 소식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 이수혁입니다.”
그래서 수혁은 아주 자신만만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아, 닥터 리. 헨리입니다.”
예상과는 달리 헨리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안 나은 거 아냐?’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수혁과 바루다 모두 당황시킬 정도로 퉁명스러웠다.
“네, 뭐……. 어쩐 일로 전화 주신 거죠?”
그러나 수혁은 아니, 바루다는 당황하지 않고 대사를 읊어 주었다.
[시나리오대롭니다.]
‘개소리 하지 마. 전화 걸자마자 울 거라면서.’
[그건 에이. 이건 비.]
‘비가 있다는 건 처음 듣는데?’
[임기응변이 비예요.]
‘그럼 없었다는 뜻이잖아!’
물론 수혁은 퍽 당황했지만.
다행히 통화 음질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헨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어쩐 일은. 그 아스피린 건 때문에 전화했죠.”
“아……. 좀 어떠셨나요?”
“우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아.”
“이명이 없어졌습니다. 하하.”
헨리의 웃음소리는 퍽 어색하게만 들렸다.
아마 본인도 어색할 터였다.
이명이 들린 이후론 이렇게 웃어 본 일이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웃음 자체에 허망한 감정까지 실려 있어서 더더욱 느낌이 묘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죠.”
헨리는 아주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냥 음성 통화였기에 수혁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아마 볼 수 있었다면 수혁은 몰라도 바루다는 그의 감정을 읽어 낼 수 있었을 터였다.
회한과 황당함 그리고 안도, 민망함 등등.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감정은 역시나 감사였다.
“닥터 리가 아니었다면 아마 나는 평생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겁니다.”
“아스피린에 대한 논문을 찾아봤다면 이유를 찾았겠죠.”
“아뇨. 아닙니다. 아스피린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검색을 해 봤을 리가 없어요.”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었겠지만.
의외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오히려 업데이트에 뒤처지는 것은.
수혁 또한 학생 때 몇몇 노교수들이 그러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았더랬다.
“뭐…….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이명을 고치셔서.”
“모두…… 수혁 덕분입니다. 그때 말했던 것들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헨리는 수혁이 만약 이로 인해 이명이 고쳐지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던 몇몇 것들을 떠올렸다.
그땐 정말이지 퍽 황당했더랬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보답을 요구할 줄이야.
그것도 의사가 환자를 치료한 것에 대해.
하지만 막상 이명이 사라지고 나자, 재산의 반절이라도 떼어 달라면 떼어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마 내후년이면 전문의 따고 펠로우를 하게 될 거 같거든요.”
“네. 그때 수혁이 하게 될 연구에 대한 비용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제 자리를 걸고 개런티를 약속합니다.”
일단 첫 번째는 연구비 지원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임상’ 연구는 그렇게까지 큰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특히 대한민국의 대학 병원에서 하는 연구들은 그러했다.
이미 쌓여 있는 환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후향적 연구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실험 연구로 넘어가게 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돈이었다.
“감사합니다. 연구소장님의 말씀이니까 틀림없겠죠?”
“당연하죠. 우리 회사에 제 위로 몇 명 있지도 않습니다.”
몇 명 있다고 해도 별문제는 안 될 터였다.
어차피 연구비 지원이라는 게 공돈 주는 건 아니었으니까.
만약 수혁이 그 돈으로 어떤 성과를 낸다면, 화이자에게도 이득 아니겠는가.
헨리 정도 되는 사람이 될 거 같다고 한 연구를 뒤집을 사람은 적어도 화이자에서는 없다고 보면 되었다.
“그리고 내년 홍콩에서 열리는 저희 주관 학회에 초청하겠습니다. 그때 지금 연구 중인 신약이나 저희와 협력 관계에 있는 병원들에서 연구 중인 치료 프로토콜들이 공개될 테니, 오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두 번째는 학회 참석이었다.
학회야 돈만 내고 시간만 있으면 다 가는 거 아닌가 싶겠지만.
그렇지 않은 학회들도 있기는 있었다.
특히 이렇게 다국적 제약 회사가 전세계적으로 분포해 있는 자기 회사 산하 연구소와 병원들을 모으는 학회가 그러했다.
이른바 그들만의 이너 서클 같은 모임이라고 보면 되었다.
“원래는 중견 연구자들만 부르는 건데……. 뭐, 태화 의료원이라고 했죠? 거기 교수님 중 한두 분 정도 대동하면 문제되지 않을 겁니다. 근데 교수님들은 좋아할까요?”
“이거 공짜죠?”
“물론이죠. 화이자에서 모든 참석자의 비행기 표와 숙박을 책임집니다.”
그렇다면 신현태는 몰라도 이현종은 좋아할 터였다.
하도 연구와 진료만 하고 사느라 가족도 없는 그가 아니던가.
하여간에 어디 갈 수만 있으면 좋아했다.
근데 그게 공짜인 데다가, 그가 최근 들어 세상에서 제일 이뻐하는 수혁과 함께다?
게임 끝이었다.
“그럼 좋아할 겁니다.”
“흠, 흠. 그렇군요. 흠.”
헨리는 대체 어떤 위인을 교수랍시고 데려올 건가 하는 생각에 헛기침을 해 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을 바꾸거나 하진 않았다.
그에게는 수혁이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물론 이제 아스피린을 대신할 영양제를 찾아야 하긴 할 테지만.
솔직히 이명으로 인해 먹던 수면제와 항우울제만 끊어도 살 것 같았다.
매일 아침 그의 머릿속에 드리웠던 짙은 안개가 거두어진 느낌이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이 두 가지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고마워요, 헨리.”
“별말씀을. 아이오와에서……. 남은 시간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혹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시고요.”
“네. 헨리.”
해서 헨리는 수혁이 요구한 두 가지 조건.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굉장히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조건을 아주 흔쾌히 들어주었다.
[역시 이명은 무시할 만한 증상이 아니에요.]
따지고 보면 다 바루다 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녀석이 지금까지 나온 이명에 대한 논문 중, 다는 아니고 수혁이 읽은 것 중에서, 이명 환자들의 실제 생활 불편 정도에 대한 것을 추려 내었으니까.
그 결과, 난치성 이명 환자들은 거의 암 환자에 필적할 만큼 정서적인 고통을 호소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것만 해도 논문 쓸 수 있겠더라.’
[너무 생뚱맞은 분야긴 한데……. 그래도 뭐 써 보려면 써 볼 수 있겠죠. 어쩌면 꽤 그럴싸한 데 실을 수도 있을 걸요?]
‘뭐, 시간 나면 하지 뭐. 일단 나는 내과 분야에서 찾아야 해. 결국, 그게 있어야 학회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임상 능력보다 그게 더 중요하다는 건 인정할 수 없지만, 실제로 그렇긴 하더군요.]
대학 병원에 있는 교수들이 정말 수술을 최고로 잘할까?
그건 아니었다.
업계에서는 재야의 고수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학 병원에 있는 교수들이 제일 연구를 잘한다는 건 사실이었다.
일단 연구를 하는 의사들 자체가 거의 다 대학에 있었고, 그걸 잘해야 대학에 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그게 임상적인 능력보다 우선시 되는 것을 볼 때는 이게 맞나 싶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시스템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아직 시스템을 바꿀 능력이 없다면, 그 시스템에 맞추는 것이 옳았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오늘 좀 재밌을 거 같던데?’
어느새 아이오와 연수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있겠는가.
수혁의 말대로 지금은 여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오늘은 진짜로 좀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요. 주립 교도소에서 환자들이 오는 날이라고 하더라고요?]
‘미국 죄수들이라니.’
머리를 그렇게 많이 굴리지 않아도 자동으로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험상궂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하도 영화에서 많이 봐서 그랬는데.
그게 실제로도 그런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것만 궁금해하지 마시고……. 교도소는 상당히 특이한 환경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거기에서만 특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질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걸 찾아보도록 하죠.]
‘좋지. 그럼 갈까?’
[그렇게 말 안 해도 어차피 저는 가지만. 뭐, 그렇게까지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면야, 네. 그럽시다.]
‘이놈은…….’
말을 해도 꼭 이딴 식으로 해야 한단 말인가.
수혁은 좀 더 투덜거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지 않았다.
헨리의 전화를 받다 보니 지체된 까닭이었다.
“어우 추워. 여긴 뭐 하루에 사계절이 있어.”
분명 낮에는 더울 텐데.
아침에는 눈이 내렸다.
미국 중부 날씨가 원래 변화무쌍하다고는 하던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더랬다.
“아, 닥터 리.”
의국에 들어가자, 스티브가 수혁을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요 며칠 거의 무슨 교수급으로 대우해 주고 있었는데.
오늘은 조금 태도가 달랐다.
“스티브. 왜 그렇게 봐?”
“긴장 안 돼요?”
“긴장? 아. 교도소.”
“장난 아니거든요. 뭐 교도관이 같이 오긴 하는데……. 그래서 더 무서워요.”
“음. 그건 좀……. 그렇긴 하네.”
“게다가 더 힘든 게…….”
스티브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질환이 기상천외한 경우가 있어요.”
“뭔데요?”
“보면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