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05화 (105/1,303)

105화 헨리 (1)

부우웅.

수혁과 바루다가 또다시 외래를 찢어발겨 놓았던 한 주가 지나갔다.

“자리 괜찮죠?”

수혁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강요에 의한 건지, 아니면 그가 말하고 있는 대로 원래 시카고에 볼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황의 차였다.

연봉이 높아서 그런지 꽤 좋은 차였는데, 덕분에 수혁은 두 다리를 거의 쭉 뻗고 있을 수 있었다.

“네, 너무 편합니다.”

“다행이네요. 사실 버스랑 기차도 있긴 한데…… 가서 돌아다니기가 힘들어서.”

“괜히 저 때문에 너무 멀리 가시는 건 아닌가요?”

“아뇨, 아뇨. 시카고에 여동생 집이 있어서 가끔 가요. 걔 아니면 아이오와에서는 한국 음식 먹기가 좀 어려워서.”

황은 운전대를 잡은 채로 뒷좌석에 놓인 빈 반찬 통들을 가리켰다.

가서 한껏 받아 올 요량인 듯했다.

[하긴 아이오와같이 작은 동네에 한인 음식점이 있을 리가 없죠.]

‘교회에서 나름 준비해서 준다고는 하던데?’

[설마 평일에 먹을 거까지 주진 않겠죠.]

‘그건 그렇네.’

덕분에 수혁은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물론 아이오와에서 시카고까지 무려 4~5시간이나 걸린다는 걸 알고 난 후에는 다시 미안해지기는 했지만.

다행히 황은 장거리 운전에 아주 익숙한지 별로 힘들어 보이진 않았다.

“자, 여기네요. 화이자에도 워낙 연수생이 많이 와서, 기숙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1인실이고……. 앞에 셔틀이 주말에도 운영한다고 하니까, 밥 먹으러 시내 나가기도 좋을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일요일 7시까지 오겠습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아뇨, 별말씀을.”

황은 수혁을 화이자에 데려다주고는 차를 몰고 사라졌다.

여동생이 사는 곳이 정확히 시카고는 아니고 북쪽으로 조금 나간 곳이라고 했는데, 지명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곳은 아니었다.

사실 바루다 녀석이 힘을 써 줬다면 아무리 이상한 지명이라도 기억해 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 바루다는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병원 기록에 접근 할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헨리라고 하는, 시카고 화이자 연구소의 소장에 관해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설령 아픈 데가 있다고 해도……. 아이오와까지 오겠냐? 시카고에도 좋은 병원 쌔고 쌨는데.’

[지금이라도 노스 웨스턴 병원에 가서 뒤져 볼까요?]

‘그거 범죄야, 인마! 나 미국에서는 의사도 뭣도 아니라고.’

애초에 의사라고 해도 남의 병원에서 기록을 뒤지는 건 불법이었다.

아예 접근 권한이 없어서 가능한 일도 아니었고.

[미국 의사 면허증도 안 따고 뭐 했습니까?]

‘법 바뀌어서 한국에서는 못 따거든? 그리고 의사 면허 있어도 못 봐.’

[왜 못 봐요? 해킹하면 되지.]

‘이 미친…….’

[아무튼, 지금은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시카고는 총기 사고 빈번하다면서요.]

‘아, 그래.’

아이오와 사람들이 어찌나 겁을 주던지.

같은 미국이라고 해도 시카고와 같은 대도시와 아이오와는 아예 느낌이 다른 모양이었다.

수혁이 보기에도 그렇긴 했다.

도시 분위기가 달라도 아주 많이 달랐다.

‘하긴 대학 도시하고 이런 도시를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겠지.’

아이오와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태반이 대학교 교직원이라고 보면 되었다.

다들 책상물림이라는 뜻인데, 단점도 있겠지만 일단 순하고 착하다는 것 하나 만큼은 장점이었다.

[편히 잘 생각하지 말고, 뭐라도 단서를 찾아봅시다.]

‘탐정이야? 얼굴도 모르는 사람 단서를 뭘 찾아. 죽었어?’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요. 여기 기숙사잖아요.]

로니는 확실히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수혁은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 에스코트까지 받아 가면서 기숙사에 들어설 수 있었다.

기숙사는 수혁에게 익숙한 대학교 기숙사와는 많이 다른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일단 로비가 거대했으며, 안에 식당이 무려 네 개가 넘게 있었다.

지하에는 수영장에 피트니스 클럽까지 있었고.

[꼭대기 층에는 바가 있으니까……. 가서 물어나 봅시다. 헨리에 관해.]

‘그……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왜요? 부끄러워요?]

‘외국인들……. 그것도 처음 보는 외국인들이랑 얘기하는 건 조금.’

[뭔 걱정이에요. 내가 다 일러 줄 텐데. 그리고 여기 인맥 좀 만들어 두면, 어? 나중에 다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왜 이렇게 이상한 야망이 생겼어.’

[부자 되고 싶다면서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유일한 입출력자인 수혁의…….]

‘알았다…….’

짤막한 대화 끝에.

언제나 그렇듯 상처뿐인 대화 끝에 수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지팡이를 짚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확실히 돈을 들여서 지은 티가 나는 건물이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화이자 연구소에 일할 정도의 인재라면, 어지간한 대우는 성에 차지 않을 테니까.

띵.

그렇게 바에 도착하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아니, 바가 거의 꽉 차 있었다.

‘불타는 금요일 밤에 여기 모여서 뭐 하는 거냐……. 시내까지 차 타고 10분이라던데.’

[연구원들이지 않습니까?]

‘뭔가 편견이 다분히 박힌 뉘앙스였는데, 방금?’

[드라마 보면 알죠. 항상 성실하고 착한데 여주인공의 들러리 역할 정도로만 나오잖습니까.]

‘드라마는 드라마로 좀 봐 줄래? 현실은 다르다고.’

[제가 보는 현실은 수혁을 통해서 보는 현실이라는 점을 꼭 좀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이.’

수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무려 가드까지 있는 바였다.

가드는 잠시 처음 보는 얼굴인 수혁을 향해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짓고 걸어오다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도와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기 자리까지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수혁이 보니, 가드가 가리킨 자리는 꽤 중앙에 있는 빈자리였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남녀가 두런두런 떠들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좋네요.]

해서 수혁은 가드의 안내에 따라 빈자리에 앉았다.

가드가 미리 와 있던 사람들에게 양해까지 구해 주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아…….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에서 오셨구나?”

수혁은 굳이 한국인이네 어쩌네 하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바루다가 이편이 좀 더 낫다고 판단한 덕이었다.

“네. 화이자가 세계 최고니까요. 보면서 배우려고 왔죠.”

“세계 최고인 분야도 있죠. 하하.”

원래는 바에 가서 직접 시키고 직접 술을 가져와야 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수혁은 지팡이 덕에 가드가 대신 주문을 받아다가 술까지 배달해 왔다.

“화이자는 모든 인원이 다 연구에 참여한다고 들었는데.”

“아, 네. 여긴 직위와 관계없이 연구원은 다 직접 연구해요. 책임자라 해도 예외 없어요.”

수혁이 맥주를 한 모금 넘기고 질문을 던지자, 세계 최고라는 말에 웃던 여자 하나가 친절한 미소와 함께 답을 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술을 마신 데다가, 수혁이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까지 보고나자 경계심이 많이 덜어진 모양이었다.

수혁이나 바루다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그럼 헨리 소장도 연구를 이끄나요? 로니 씨에게 초청받아서 오긴 했는데, 정작 로니 씨는 안 계시고 헨리 씨만 계시다고 해서…….”

“로니?”

“네. 로니 씨에게 초청받았습니다.”

“로니……. 누구지? 아, 설마.”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아주 높으신 분을 떠올렸다.

“로니……. 굿맨?”

“아, 맞아요. 그 로니요.”

“로니 총책과 아는 사이예요?”

사실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부족한 사이긴 했지만.

어차피 더 볼일 없는 사람들이지 않겠는가.

해서 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금.”

“오…….”

당연하게도 관심을 확 끌어올 수 있었다.

심지어 다른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도 수혁을 향했다.

화이자에서 로니의 위치란 정말이지 대단한 것이었기에 그러했다.

이 자리에도 그가 진행 시켜 준 연구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도 했고.

“근데 제가 헨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혹시 실수라도 하면 로니에게 폐가 될까 봐 걱정입니다.”

바루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운을 탁 하고 띄웠다.

만약 처음부터 헨리에 관해 물었다면 조금 수상해 보였겠지만.

지금은 아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자세히 묻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술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헨리는……. 고집이 좀 세요. 남들 말 잘 안 듣고.”

“아, 원래 의공학 전공이에요. 인공 장기 만들다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화이자로 이직해 왔다고 들었어요. 근데 그래도 여전히 심장 쪽에 관심이 많아요.”

“맞아, 맞아.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딱히 심장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하도 연구를 그쪽으로 하다 보니까 겁이 나나 봐요.”

가만히 얘기를 듣던 수혁은 알만 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종도 그렇지 않은가.

심혈관계 보호한답시고 먹는 양이 수혁이 아는 약만 몇 개 되었다.

‘아직 동양인에서는 아스피린이……. 뇌출혈 위험을 높이는지 어떤지 확인이 안 됐는데…….’

그런데도 심근경색 예방 효과는 증명되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하면서 약을 엄청 챙겨 먹었다.

“혹시 또 뭐 주의해야 할 거 없나요? 제 다리같이 불편한 데가 있다고 하던지?”

그 후로도 대화는 상당히 길게 이어졌지만, 영양가 있는 얘기가 나오진 않았다.

그래서 바루다는 수혁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고, 수혁은 일단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에 충실히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아…….”

이게 수혁이 몸 아픈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상당히 곤란할 질문이었을 테지만.

수혁은 자기 자신이 다리를 저는 사람 아니었던가.

덕분에 제법 자연스럽고, 심지어 사려 깊어 보이는 질문이 되었다.

“그건 수잔이 제일 잘 알 거 같은데. 같은 팀이잖아.”

신나서 떠들어 대던 남자가 맨 처음 수혁을 받아 주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수잔이 모양인데, 성격이 아주 좋아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알지. 잘 알지……. 아, 헨리…….”

그에 반해 헨리는 썩 좋은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녀의 격렬한 반응에 다른 이들 또한 열렬히 환호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일단 고집에 세요. 자기 말에 토 달면 화내고.”

활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온 그녀의 울분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가질 법한 불만이었다.

하지만 바루다가 좋아할 만한 얘기도 있기는 있었다.

“아, 그리고……. 이거 진짜 짜증나는 건데. 어딜 가나 음악을 틀어 놔요. 아니지, 음악이 아니지. 그냥 소리?”

“소리요?”

“네. 그 뭐……. 종이 구겨지는 거……. ASMR인지 뭔지 죽으라고 틀어 놔요.”

“종이 구겨지는걸요?”

“네. 조용한 환경을 못 참는 건지 뭔지 몰라도……. 하여간 단 한 순간도 이상한 소리를 안 틀어 놓는 적이 없어요. 연구실에서도 그러는데, 진짜 환장한다니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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