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왓슨 (2)
수혁은 바루다가 바보라고 지칭한 엘리슨, 행크,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모두 바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똑똑한 위인들이었다.
하지만 전공 외에도 과연 똑똑할까?
그건 아닐 터였다.
‘이현종 원장님도 의학 말고는 골프밖엔…….’
그 양반은 그 정도가 좀 심해서 운전도 잘 못 할 지경이었다.
신현태는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현종이 골프 칠 때 꼭 신현태를 대동하는 게 운전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둘을 어지간한 교수들보다 더 가까이에서 보아 온 수혁이 보기엔 거의 맞는 말이었고.
아무튼, 조금 논리는 이상했지만, 수혁 또한 이 셋이 적어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음……. 교육 시에 본 게 있긴 한데……. 저희 쪽에서 쓰는 거랑 이게 같은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아 그럼 해 볼 수는 있어요? 망가지면 안 되는데.”
“절대 망가뜨리진 않습니다.”
“그럼 해 보시죠.”
“네.”
과연 엘리슨이 이 왓슨의 하드웨어적인 면에 관해 아는 건 전원 버튼이 다인 듯했다.
심지어 행크나 스티브는 그 전원 버튼조차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해서 수혁은 그 어떤 견제도 없이 프로그래밍석에 앉을 수 있었다.
아마 기술자나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컴퓨터에 관해 아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결단코 말렸을 일이었지만.
의사들은 정말이지 환자 보는 일 외에는 관심도 별로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위인들이었다.
[이렇게 쉽게 여길 앉게 될 줄이야. 진짜 멍청하네.]
‘그런 말 하지 말고……. 선의로 해 주는 일이잖아.’
[그러는 수혁도 해킹 공범 아닌가요?]
‘그건…….’
[잔말 말고 표정 연기나 잘하고 계십쇼. 뭔가 어렵다는 듯. 연기 잘하잖아.]
‘아, 맡겨 둬.’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수혁은 이제 연기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바루다가 읊어 주는 것을 마치 자신의 말처럼 바꿔야 할 때도 있었고.
때론 그 말을 좀 더 그럴싸한 시나리오로 말해야 될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엘리슨을 비롯한 세 명의 의사들은 수혁이 무척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줄로만 알게 되었다.
[오케이. 불러 주는 대로만 눌러요.]
‘응.’
실상은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키보드를 두드려 왓슨의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제일 처음 접근한 곳은 역시나 왓슨의 진단 과정을 다루는 프로그램이었다.
대체 어떤 알고리즘을 짜 놨길래 그토록 라이벌 의식을 불태웠는지 못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흠.]
‘왜? 뛰어나?’
수혁의 눈에는 그저 숫자들과 알 수 없는 문자의 나열만이 들어올 뿐이었다.
“잘돼 가는 겁니까?”
그리고 약간 떨어져서 화면만 보고 있는 세 명의 의사들에게도 그러했다.
“아, 네. 좀 달라서 그렇기는 한데……. 곧 될 겁니다.”
“네네. 원래 시간이 좀 걸리더라고요.”
“네.”
덕분에 둘러대기는 쉬웠다.
하지만 이게 실시간으로 해석이 되는 바루다에게는 상당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음…….]
‘왜?’
[납득이 가질 않네요.]
‘뭐가?’
[왜…… 이런 과정으로 진단을 내리게 놔뒀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음?’
관점에 따라서 상당히 기이한 광경이었다.
기계가 기계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바루다는 진심이었다.
[보시면……. 아니, 봐도 모르겠구나. 자, 이렇게 보면 좀 쉽죠?]
‘아.’
그리고 바루다가 해석해 준 버전의 화면을 보게 된 수혁 또한 바루다와 비슷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상한데? 왜 이딴 식으로 진단을 내려?’
[그러니까요. 이게……. 이 바루다가 개발되기 전까지 세계 최고의 진단 목적 인공지능이었다니…….]
‘왜 폐기됐는지 알겠다.’
[네. 이건……. 이건 도저히 환자 치료에 쓸 수 없어요. 에러가 너무 많아요. 일단 이 녀석은 인간에 관해 너무 아는 게 없……. 아.]
바루다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왓슨과 자신과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알게 된 모양이었다.
녀석 혼자만 알게 되었다면야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아쉽게도 수혁은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다 내 덕분이었네? 우리 바루다가 반쪽짜리 인공지능이 아니라……. 지금처럼 우수하게 된 건.’
[그건……. 그건…….]
‘이걸 보고도 부정할 생각이 드냐? 이거 봐. 이거.’
게다가 지금 수혁은 알 수 없는 기호로 가득한 화면이 아니라, 바루다가 해석해 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말하자면 왓슨의 진단 과정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보고 있자니 어디가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가 너무도 명확했다.
‘얘가 사진을 이딴 식의 데이터 쪼가리나……. 텍스트로 보지 않고 계속 눈으로 봤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 같은데? 연산 속도 자체는……. 미친 수준이잖아?’
[아무래도 수혁의 뇌보다는 빠르죠.]
‘확 느려져도 제대로 된 과정으로 제대로 된 진단을 하게 해 준 사람이 누구죠?’
[수…… 수혁.]
제아무리 지랄 같은 녀석이긴 해도 바루다는 역시 인공지능이었다.
적어도 인간처럼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독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알고 보니까……. 누구 말마따나 내 머리에 바루다가 들어온 게 나한테 행운인 게 아니었네? 내가 바루다를 완성시켜 주고 있는 거였어.’
[그건 좀 비약…….]
‘비약이라니? 이거 봐. 얘가 소리를 들었으면 이렇게 진단했겠어?’
[아니죠……. 하……. 진짜 병신 같네, 왓슨…….]
‘너도 병신이었던 거 같은데? 네가 얘보다도 못했었다는 거 아냐?’
[그…….]
바루다는 정말이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한계를 쳐부술 정도의 의지는 아니었다.
[그런 거 같긴 하네요.]
‘에이……. 근데 그럼 여기 와서 얻은 게 하나도 없네? 어쩔 거야, 이거. 저기 엄청나게 수상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아뇨, 아니죠. 얻을 수 있는 게 있긴 있습니다.]
‘뭐?’
[데이터.]
‘데이터? 아…….’
인공지능이란 건 처음 만들 때부터 완전하게 나오는 게 아니었다.
이 왓슨은 무려 수년 동안 각 대학 병원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온 물건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적인 석학들이 딥러닝을 시켜 왔다는 뜻.
이미 폐기된 지 오래돼서 메인 서버에 접속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이곳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에서 입력한 데이터는 고스란히 남아 있을 터였다.
그리고 바루다는 그 데이터를 문자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대강 썰 풀고 있으면 데이터를 최대한 빼내겠습니다. 그럼 수혁이 직접 공부해야 할 내용이 그만큼 적어지겠죠.]
‘좋네. 여기 와서 들었던 중 제일 좋은 소식이야.’
물론 최근 수혁도 알아서 공부하고 있기는 했다.
아무리 공부를 하고 노력을 해도 교수가 되진 못할 거라고 여겼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교수 자리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 자체가 수월해진 건 아니었다.
이제 범위가 교과서를 벗어나기 시작한 지 오래라 아예 괴상한 내용까지 숙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같은 질환이라 해도 환자마다 각각 다른 경과를 밟게 된다는 것을 체득한 후로는 그놈의 케이스 스터디를 질릴 정도로 하게 된 상황이었다.
그걸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있다면 정말이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좀 알겠네.”
그래서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루다에게나 수혁에게는 당연히 헛소리 그대로의 의미로만 전달이 되었으나.
주변에 선 채 지리한 기다림만 이어 나가고 있던 나머지 셋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 알겠어?”
“네. 저희 쪽이랑 많이 달라서 헷갈렸는데, 이제 좀 알겠어요. 어디……. 저희가 쓰는 교육 프로그램을 적용할 수 있는지 좀 볼게요.”
“오. 고마워. 고마워.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네.”
수혁은 순진한 얼굴로 껄껄 웃고 있는 행크나 엘리슨을 보며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노다지네, 노다지. 케이스 교육을 진짜 빡세게 시켰어요, 수혁.]
‘그래?’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의 거의 10년 치에 해당하는 진료 경험이 들어가 있어요. 이걸 다 집어넣으면 좋겠지만…….]
‘좋겠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며칠은 걸릴 겁니다. 일단 선별해서 넣을게요.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해요.]
‘오케이, 좋아.’
눈앞에 놓인 막대한 자료 앞에서는 양심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옳지, 여기가 이렇게…… 아, 이런 식으로…….”
그래서 수혁은 본인도 그 의미를 모르겠는 말을 시부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는 그저 희망으로 들릴 뿐이었다.
‘아직 멀었냐? 나 이제 레퍼토리 끝나 가는데.’
[아, 거 첩보 영화 보면 다리도 좀 보여 주고 하면서 시간 잘만 끌더만!]
‘미친놈아 여기서 내 다리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럼 가슴이라도 좀 까 봐요.]
‘도움이 안 되네, 이 자식은.’
[저는 진짜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뭐라도 좀 해요.]
‘음.’
듣고 보니 그러긴 했다.
바루다는 수혁이 두통을 느낄 정도로 최선을 다해 데이터를 욱여넣고 있었으니까.
그럼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나 가슴이라도 깔 정도의 의욕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다고 뭘 깔 수는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으음…….”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치명적인 눈빛 연기라도 하려는 찰나, 바루다가 말렸다.
[그, 그만.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아, 그래?’
[일단 여기까지만 하죠. 최대한 뽑아냈어요. 어차피 대학 병원 경험이라고 해도 대부분은 중복이라.]
‘그럼 끝났어?”
[네, 대강 둘러대요, 이제.]
‘뭐라고?’
[그런 걸 물으면 어떡합니까. 수혁이 해야죠, 이 정도는. 저는 지금……. 어우 발열 나는 거 봐 이거. 이러다 수혁 머리도 타요.]
‘하.’
그러고 보니 머리가 아프다기보다는 뭔가 타는 듯한 느낌이 일었다.
여기서 더 바루다를 굴려 댔다가는 바루다의 말처럼 머리가 타 버릴 수도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엘리슨은 암만 봐도 바삐 움직이던 수혁의 손이 멈춰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질문을 던졌다.
얼굴만 봐도 됐다고 말하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간절한지 수혁도 하마터면 그렇다고 할 뻔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에 인공지능을 이용한 교육은 없었으니까.
하나 있기는 한데, 그건 공유할 수 없는 방법이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머리에 박힌 바루다가 수혁과 의사소통을 하는 건지 수혁도 바루다도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아……. 이게 들어가 보니까 좀 많이 다르네요.”
“달라…… 요?”
“네. 도움을 드리기가 어려울 거 같습니다.”
“아니, 여태 엄청 바쁘게 움직인 거 같은데?”
“그렇긴 한데……. 너무 달라서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어어, 그냥 가지 마시고.”
엘리슨은 어느 틈엔가 지팡이를 집어 든 수혁을 막아섰다.
몸이 멀쩡하다고 해도 뚫고 나갈 수 있을지 의심될 정도로 단단한 체구였다.
“아예……. 아예 달라요?”
“네.”
“그럼 조언이라도 해 줘요. 우리도 교육을 좀 개발해 보게.”
“음.”
수혁은 눈앞에 선 세 명의 전신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빠졌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말이 나가진 않았다.
그저 헛소리의 연속이었다.
“아, 그래요. 음. 인공지능은 딥러닝 하는 방식으로 실력을 키우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더 말해 봐요.”
엘리슨은 그 헛소리가 무슨 대단한 말이라도 된다는 듯 녹음기까지 꺼내 들었다.
그가 그럴수록 수혁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거랑 비슷한 방식으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태화는.”
“무슨…….?”
“레지던트들도 딥러닝 하듯이 계속 가르친다는 뜻이죠. 죽도록 읽게 하고, 복습하게 하고.”
“아……. 일리는 있는데…… 그건 인공지능을 이용하는 거랑은 좀 다른……?”
“아무튼, 지금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흠……. 죽도록 굴린다…… 이거지?”
엘리슨은 다시 한번 수혁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네.”
“음. ‘죽도록 굴린다’라.”
그 눈에서는 단 한 점의 거짓도 발견할 수 없었다.
수혁은 연기의 달인이었으니까.
해서 엘리슨은 이게 수혁을 탄생시킨 비결 전부는 아닐지라도, 비결 중 하나는 될 거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 우리도 굴려야지.”
어쩐지 스티브가 원망이 가득 서린 눈으로 수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