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가진 거 내놔 보셔 (1)
“정말 면폐증…… 이로군. 음.”
엡스는 환자를 문진하고 다녀온 후, 환자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마를 다루는 사람들에게서는 아직도 종종 발견된다는 보고가 있긴 했는데…….’
케이스 리포트에서는 몇 번 접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바로 연결 짓지는 못했어.’
엡스는 아직 40대 중반의 젊은 교수였다.
학회에서 슬슬 보직 받고 활동하는 게 50부터니까 아직은 어리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실력의 미숙함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당당히 3차 의료 기관의 교수로 활동해도 좋을 만큼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친구는 바로 알아차렸다……. 이거지?’
행크에게 수혁의 우수함을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건 우수하고 어쩌고 하는 차원이 아니지 않은가.
교수보다 뛰어난 레지던트라니.
그런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닥터 리는 이전에 본 적이 있는 모양이죠? 대마에 의한 면폐증을?”
해서 당연히 수혁은 이런 케이스를 자주 접해 봤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이나 이런 데는 마약이 엄청 많잖아.’
심지어 소위 골든 트라이앵글이라 불리는, 미얀마 접경 지대는 거의 무법지대라 공공연히 코카인 재배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한국은 거기랑 아예 상관이 없는 지역이었으나.
미국인인 엡스가 그런 거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게 아시아는 그냥 다 같은 아시아일 따름이었다.
“네?”
수혁은 뭔 개소리냐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 대마 환자를 많이 봤냐고요. 대마에 의한 면폐증은 드문데……. 그걸 바로 연결 지은 것이 신기해서.”
“아……. 아뇨. 사실 대마 관련한 환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없어요? 거기 재배하고 그러지 않나요?”
“네? 아뇨. 마약 관련해서는…….”
수혁은 한국은 마약 청정국이라는 말을 하려다 그건 좀 아니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정말 청정국이라고 굳게 믿었었지만.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 이후로는 그러한 믿음이 많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보다는 마약 면에 있어서만큼은 훨씬 깨끗하지 않은가.
해서 다시 당당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상당히 타이트하게 관리하는 편입니다. 유통은 될지 몰라도 생산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럼 대마로 인한 면폐증을 본 적이 없어요?”
“네.”
“근데 어떻게…… 진단을 했죠?”
“네? 아니……. 책에서도 봤고, 케이스 리포트에서도 봤으니까요.”
모두 다 겪어 봐야 진료할 수 있을 거 같으면 뭐 하러 책을 본단 말인가.
그냥 1학년 때부터 냅다 병원에서 굴리지.
물론 이런 어려운 난도의 진단은 바루다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수혁은 굳이 그러한 것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잘했습니다. 벙찐 얼굴, 보기 좋네요.]
바루다 또한 괜히 이상한 소리 하는 것보다는 수혁이 천재 취급을 받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게 된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진짜 본인 힘으로 진단했다고 믿는 건 아니죠?]
‘아냐, 아냐. 됐냐?’
[불안해서 그렇죠.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하다가 사고 치면 저도 곤란해집니다.]
‘후.’
물론 깐족거리는 것도 잊지는 않았지만.
“그래……. 직접 본 적도 없는…….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진단했다 이거지.”
수혁이나 바루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엡스는 나름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작은 동양인 의사가 저 나이 때의 자신은 물론이오, 지금의 자신 또한 압박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행크……. 이건 그냥 똑똑한 게 아니잖아.’
천재니 뭐니 하는 친구들을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엡스도 수재 소리 한창 들으면서 대학 다녔고, 그 덕에 교수가 되었으니까.
그보다 더 우수했던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 세간에서 말하는 천재에 부합되는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들과도 또 달랐다.
‘이건……. 이건 괴물이야.’
면폐증을 진단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그러던 것이 외래가 끝나갈 때쯤에는 확신으로 변했다.
일개 레지던트가 놓치는 질환이 하나도 없는 것은 물론이오, 세우는 치료 계획마다 완벽하지 않은가.
‘이수혁……. 전문의 따고 나오면 치열하겠는데…….’
엡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오후 스케줄을 위해 떠나가는 수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여러 건 했군요.]
바루다는 그저 흡족할 따름이었다.
인공지능인 그가 판단하기에도 조금 혹독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혁을 몰아붙인 보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정 봤냐?’
[네.]
‘분석해 보면 어때?’
[놀람과 경악의 연속이죠.]
‘하긴 내가 봐도 놀란 거 같긴 하더라.’
바루다는 수혁의 말 또한 흡족한지 껄껄 웃더니 광기에 찬 목소리로 한 마디 더 보탰다.
[이게 메이드 인 코리아의 힘이다, 양키놈들아.]
‘양키란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날 만든 사람들이 노상 하던 말인데요. 양키 타도. 태화 만세.]
‘아…….’
수혁은 이현종이 데려왔던 몇몇 연구원들을 떠올렸다.
모두 죽을죄를 지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여 댔는데, 그중 하나가 안대훈처럼 정수리가 훤히 비어 있어서 별말을 못 했던 기억이 있었다.
‘수혁아, 이 사람들이 지금 모금 진행 중이거든? 1억 원 준비해 줄 거야.’
‘네? 원장님, 1억이라뇨. 저희 넷밖에 없는데…….’
‘수석 연구원 연봉을 내가 빤히 아는데 1억도 못 모아? 우리랑 연구 안 할 거야?’
‘와…….’
사과를 하러 온 건지 강탈을 당하러 온 건지 헷갈리는 순간이었는데.
아무튼, 그때 받은 인상은 ‘참 얌전하다’였더랬다.
‘그 점잖아 보이던 태화 전자 사람들이 일할 때는 또 양키, 양키 하는구나?’
[욕 엄청 많이 하는데요? 한번 들어볼래요?]
‘아, 아니. 됐어.’
[보세요.]
‘됐다고.’
둘이 쓸데없는 논쟁을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던 스티브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또 무슨 진단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혼자 저렇게 중얼대면서 걸어갈 리가 없지 않은가.
‘천재인데……. 노력도 한다 이거지.’
이런 점은 반드시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행크가 했던 당부 또한 떠올랐다.
‘어떻게든……. 이놈……. 아니, 이분의 비결을 배워야 해.’
솔직히 오늘 외래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행크의 부탁 때문에 배울 생각이 들었었는데.
호흡기 외래를 거의 찢다시피 하는 것을 보고 나자 태도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굳이 행크의 부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수혁에게는 좀 배우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실력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 건지를.
“저…….”
해서 스티브는 아주 어렵게 수혁을 불렀다.
천재의 깊고 깊은 사유를 방해한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수혁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였다.
어차피 잡담 중이었지 않은가.
“아, 스티브.”
“괘, 괜찮으면……. 점심이나 같이 하실래요?”
“오.”
의외의 제안을 받은 수혁은 서둘러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바루다가 부지런히 데이터화해 둔 덕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분명 여기 왔던 선배들은 거의 혼밥했다고 들었는데?’
[네. 담당 레지던트가 밥을 먹자고 제안한 건은 0입니다. 교수는 한두 번 있었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겠죠.]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할 생각이 들진 않았다.
‘미국에 끈 남겨 두는 건 나쁘지 않겠지.’
[뭐……. 그렇게 쓸 만한 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연수생 담당 레지던트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고 듣기는 했어.’
연수생을 보내는 병원이야 당연히 병원에서 제일 우수한 레지던트를 연수생으로 보내는 것을 관례로 삼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연수생들을 받는 병원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
당연히 우수한 레지던트들로 하여금 응대를 하게 만들어 둘 터였다.
뭔가 가르치지는 않아도, 최소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긴 할 테니까.
물론 지금의 스티브는 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좋죠. 어디 아는 데라도 있어요?”
“음.”
스티브는 짐짓 손목시계를 보는 척했다.
원래 같으면 행크와 함께 연구소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한국의 대학 병원들과는 달리, 미국에 있는 대학 병원에서는 레지던트들에게 비단 진료만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였다.
“시내로 갈까요? 제 차로 가죠.”
“시내? 나가도 돼요?”
“네. 3시까지만 들어오면 됩니다.”
“오…….”
지금이 1시니까, 무려 2시간이나 비는 셈이었다.
‘이런 건 좀 부럽다.’
[그러게요. 뭔 놈의 레지던트가 이렇게 여유가 있어? 우리는 인마. 어? 얼마나 혹독하게.]
넘치는 여유에 바루다가 성질을 냈다.
마치 꼰대 같은 모양새였다.
인공지능 주제에 꼰대라니.
수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랑은 나라가 다른 애들이잖아.’
[이렇게 설렁설렁하니까 실력이 개판이죠.]
‘아니,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게 나쁜 건 아니잖아.’
[그건……. 음. 그렇네요?]
하지만 곧 바루다는 객관적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이러지?]
수혁의 말대로 스티브의 실력은 여느 3년 차 못지않았으니까.
물론 바루다의 눈에 차는 3년 차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긴 했지만.
아무튼, 그 와중에 실력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위에 있다는 얘기였다.
근무 시간은 절반 정도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얘들은 틈만 나면 배우잖아. 교수들이……. 진짜 기를 쓰고 가르치더만.’
[아, 오늘도 그랬죠.]
‘대학 병원이 진짜 교육 기관이라는 느낌이야.’
[우린 노예 양성소인데.]
‘그……. 그런 말은 하지 말자.’
[사실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원래 세상에서 제일 아픈 폭행이 팩트 폭행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여기서 본 여유 넘쳐 보이는 여러 레지던트들을 보다 보면 태화 의료원의 레지던트들의 삶은 노예 그 자체로 보이는 마당이거늘.
굳이 노예 양성소라는 말을 붙여 놓는 것을 보니 마음이 아파 왔다.
[노예한테 노예라고 하는 게 뭔 잘못이야.]
물론 인공지능인 바루다는 전혀 공감하지 않았지만.
“이쪽으로 오시죠.”
아무튼, 그사이 수혁은 스티브의 차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땅덩이가 넓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지하 주차장이 아니라 그냥 평지에 세워져 있었다.
심지어 레지던트 주제에 지정 주차였다.
“이름이 쓰여 있네요?”
“아, 네. 셔틀도 있는데……. 그걸로 못 타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자리가 나옵니다.”
“오.”
태화는 조교수도 자리가 안 나올 때가 있는데.
수혁은 스티브가 태화에 대한 어마어마한 환상을 품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계속 부러워하고만 있었다.
“여기예요.”
잘빠진 중형 세단과 함께 10분 정도 내달려 도착한 곳은 작은 햄버거 가게였다.
딱 봐도 허름한 것이 기대감을 확 낮춰 주는 외양이었지만, 스티브는 자신만만했다.
“여기가 중부 제일의 맛집이라고 자부합니다.”
고향이라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이 짙었지만.
어찌 됐건 사 주겠다는 놈이 맛있을 거라는데 초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향했다.
“기대되는데요?”
“절대 실망 안 하실 거예요. 저쪽에 앉죠. 창가 자리가 풍경도 이뻐요. 딱 나무도 보이고.”
“오, 진짜 그러네요.”
스티브는 수혁이 자리에 완전히 앉기까지 기다린 후, 조금은 진지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근데 닥터 리.”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공부를 하시는 건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저희 쪽 시스템이 부족하다면 좀 배우려고 합니다.”
“아…….”
수혁은 이게 연수생으로 온 사람에게 할 소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배우러 온 사람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는 거 맞지?’
[딱 잘라서 거절하십쇼. 감히 태화를 무시한 주제에.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병원이 뭐 잘난……. 아, 아니지.]
‘왜 그래?’
[아마 여기 메이요, 엠디 앤더슨, 하버드에서 합작으로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이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인공지능으로 공부한다고 하고, 왓슨 좀 보여 달라고 하죠. 그럼 아마 보여 주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