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도장 깨기 (2)
수혁은 가드 한 번 돌아보고, 또 한 번 스티브 쪽을 돌아보았다.
스티브 또한 가드만큼은 안 되겠지만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이었다.
그에 비하면 눈앞에 선 환자는 인상만 험악하지 체격이 그리 좋진 못했다.
[그래도 여차하면 도망가는 겁니다. 우린 안 됩니다.]
‘알아, 나도.’
물론 아무리 그래도 수혁보다는 커다랬다.
“음.”
게다가 목까지 뒤덮은 문신은 덩치와 관계없이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해서 수혁은 목을 한 번 더 가다듬은 후, 입을 열었다.
“환자분, 전 이수혁입니다. 반갑습니다.”
하지만 한 번 입을 떼고 난 후에는 역시나 청산유수였다.
덕분에 환자도 큰 경계심 없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리 친근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적대감이 서려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혁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말을 이어 갔다.
“성함이……. 제시 앳우드시군요.”
“그냥 제시라고 부르면 돼.”
“네, 제시. 혹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괜찮은가요?”
수혁의 시선이 잠시 환자가 들고 온 소견서에 머물렀다.
한국과는 달리 소견서의 항목이 정말 상세했다.
당연하게도 직업란도 있었다.
[마트 직원이라…….]
‘너 같으면 뽑겠냐?’
[아뇨.]
‘거짓말 같지?’
[네, 아마도. 미국이라서 혹시 모르겠지만.]
이런 인상을 가진 사람을 마트에서 쓴다니.
제아무리 미국이 자유로운 나라라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제시라는 자의 말투나 행동거지 전반에 묻어나는 껄렁거림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바루다와 수혁의 판단은 그러했다.
“거기 쓰여 있잖아? 마트 직원이라고.”
“네, 뭐…….”
하지만 대뜸 ‘당신 거짓말하는 거지’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저 정체불명의 반지를 잔뜩 낀 주먹이 날아들 수도 있었으니까.
“그럼 마트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죠?”
“뭘 했냐고?”
“네.”
“그…….”
환자는 잠시 고민에 빠지는가 싶더니 대뜸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게, 중요해? 여긴 병원이지, 경찰서가 아니라고!”
상당히 소리가 컸는지 가드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스티브 또한 수혁을 잡아다 끌어 놓을 기세로 손을 뻗었다.
[분석 결과 이 사람의 감정은 두려움이지, 분노가 아닙니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 덕에 어느 정도 상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해서 수혁은 손을 내저은 채 말을 이었다.
“중요합니다. 환자분의 병은 환자분의 직업과 연관이 있을 수 있어요.”
“뭐……? 무슨……. 내 주변에 기침하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담배 피우는 사람이 모두 폐암에 걸리는 건 아니죠. 하지만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잖아요? 환자분도 그럴 수 있어요.”
“그…….”
제시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기가 찬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벌어진 입을 통해 수혁은 제시의 이를 볼 수 있었는데, 역시나 엉망이었다.
아니, 그냥 엉망이라는 말로도 좀 부족할 지경이었다.
적어도 한국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치아 상태였다.
[역시 마트 직원은 아니겠죠?]
‘마약 때문이지, 저거?’
제시의 치아는 군데군데 새카맣게 변해 있었는데, 그냥 충치 먹은 것과는 좀 달랐다.
마치 타 버린 것과 같은 형상을 띄고 있었다.
[네. 메스암페타민을 피우는 형태로 흡입하는 경우 저렇게 된다고 케이스 리포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메스암페타민이면……. 히로뽕이지?’
[네.]
‘아무리 미국이라도 히로뽕 하는 사람을 마트에서 쓰진 않을 거 아냐.’
[당연하겠죠.]
덕분에 수혁은 환자의 진짜 직업은 마트 직원이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말투가 아까보다도 더 또박또박해졌다.
자신감이 넘친다고 할까.
아무튼, 그랬다.
“그러니까 정확히 마트에서 뭘 하시는지 말해 주시죠.”
“그…….”
그에 반해 제시는 눈동자만 바쁘게 돌아갈 뿐 정작 입을 열진 못했다.
마트에서 일해 본 적이 있어야 뭘 한다고 말을 할 거 아닌가.
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주로 언제 일을 하시는지 말해 주세요. 그건 어려운 질문이 아니잖아요?”
“아…….”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던 제시의 얼굴이 약간이나마 편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그래. 주로 금, 토, 일. 금, 토, 일에 일해.”
“음. 특이하네요?”
“트, 특이할 게 뭐 있어?”
“아무튼, 알겠습니다. 금, 토, 일이라.”
수혁은 ‘금, 토, 일’을 몇 번인가 되뇌며 눈을 감았다.
남들이 보기엔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실은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맞는 거 같죠?]
‘어, 근데 안전하기는 하겠지?’
[뭐……. 설마 병원에서 난동이야 부리겠어요? 가드 뚫고 튈 수도 없을 텐데.]
‘하긴.’
이미 가드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아까 수혁이 손을 내저은 것 때문에 달려들진 않았지만.
그저 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위안이 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제시에게는 압박이 될 테고.
해서 수혁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럼 혹시 제일 증상이 심한 게 금요일 아닌가요?”
“음?”
“기침이 금요일에 제일 심해지지 않아요?”
“아……. 음. 그러고 보니…….”
수혁의 질문을 들은 제시는 아래턱을 긁으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제멋대로 자란 턱수염엔 케첩 비슷한 것이 묻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비싼 대학 병원 진료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당당히 와 있는 것을 보면 이놈의 기침과 숨찬 증상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와,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돈이 많을 거라는 것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거 같은데…….”
“그때 가슴이 조이는 거 같은 통증이 있거나 하진 않나요?”
“어……. 음. 맞아. 그런 것도 써 있나?”
이제 제시는 상당히 놀란 얼굴이 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1년간 다른 병원을 다닐 땐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던 질문이 연속해서 들어오는데, 그 질문들이 하나같이 족집게 같지 않은가.
“아뇨.”
“근데 어떻게 알았지?”
“제가 생각하는 질환의 증상이 딱 그렇거든요.”
“내, 내 병이 뭔데?”
덕분에 제시는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간절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옆에 서 있던 스티브 또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해야 엑스레이 하나 보고……. 대화 몇 번 나눠 보고 진단을 내린다고?’
자신은 아예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거늘.
아니, 아마 엡스 교수가 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MRI, CT를 찍는다 해도 정확한 진단명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까.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원래 간질성 폐렴은 그랬다.
괜히 난치성 폐렴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걸……. 이렇게 쉽게 진단해? 에이, 설마…….’
당연하게도 스티브는 수혁이 착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제 보여 준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너무 나갔다 싶었다.
하지만 수혁의 얼굴엔 한 점 의심도 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만한 표정만이 떠 있을 따름이었다.
“진단명을 말씀드리기 전에, 다시 한번 질문드릴게요. 대답해 주실 수 있죠?”
“다, 당연하지. 뭐든지 말해 줄게.”
“금, 토, 일에 정확히 뭐 하세요?”
“아까 말했잖아! 마트에서 일한다고!”
“거짓말하시면 고쳐드릴 수가 없어요.”
“거짓말이……. 음.”
제시는 막무가내로 소리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의사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거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짓말을 하면 못 고친다고 하지 않는가.
‘하…….’
이놈의 병인지 뭔지 때문에 그간 얼마나 고생을 해 왔던가.
시도 때도 없이 기침이 나고, 숨은 차고.
심지어 일 좀 하려고 하면 가슴은 조여 오고.
요샌 부하 놈들 앞에서 지시라도 내리고 있을 때조차 기침이 치밀어 올라오는 통에, 정말이지 죽을 거 같았다.
‘위에서도……. 은퇴시킬까 말까 하고 있다던데.’
은퇴라니.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일단 몸 성히 나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일 아니던가.
“그……. 의사들은…….”
해서 제시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말고 입을 열었다.
시선은 어쩐지 가드를 향하고 있었는데, 적대감보다는 두려움이 가득 섞인 눈빛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그……. 환자 비밀 보장인지 뭔지 하죠? 선서에도 나와 있잖아.”
말투마저 변해 있었다.
“아, 그렇죠, 진료 목적으로만 공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저 사람 잠깐 나가라고 해 줘요. 절대로 난동 안 피울 테니까. 여기에 대고 맹세합니다.”
심지어 ‘플리즈’도 붙일 지경이었다.
[팔뚝에 저거 십자가였어요?]
‘그렇네. 교회 다니나 봐.’
거기에 더해 십자가를 걸고 맹세까지 했다.
딱히 믿음이 가는 맹세는 아니긴 했지만.
바루다의 분석에 따르면 정말로 난동을 피울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괜찮죠?”
해서 수혁은 가드에게 잠깐만 나가 있을 것을 당부했다.
가드보다는 스티브의 표정이 흔들렸지만, 그 또한 의사 아니던가.
그것도 상당히 젊고 의욕 넘치는 의사였다.
그 대가가 너무 가혹하지만 않다면, 이 환자의 진단명을 꼭 듣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부를게요.”
때문에 스티브 또한 가드를 밖으로 떠밀었다.
“그……. 알겠습니다. 대신 이상하면 바로 들어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가드의 역할은 뭐가 되었건 진료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돕는 거 아니던가.
지금 진료 담당인 스티브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안에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가드는 부리나케 환자의 몸만 수색한 후 밖으로 향했다.
제시 또한 자신에게 아무 무기도 없음을 증명해 보였다.
“자, 그럼 말씀해 보시죠. 금, 토, 일에는 어떤 일을 하죠?”
그렇게 셋만 남게 된 진료실에서 수혁이 재차 물었다.
그러자 제시는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후.”
“괜찮아요. 비밀은 보장합니다. 치료를 위해서만 공유할게요.”
“그……. 알겠습니다. 대신 꼭 치료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알겠어요. 음.”
제시는 몇 번인가 손가락을 두드리고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는 대마 사업자예요.”
“네? 대마?”
“에헤이! 큰 소리 내지 말고!”
“아, 죄송합니다.”
의외의 말에 놀란 스티브를 향해 제시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조용히 하란 뜻이었는데, 문신이 더해지자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덕분에 스티브는 정말이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에 반해 수혁은 여유가 넘쳐 흘렀다.
‘역시 그 엑스레이 패턴에…….’
[약을 써도 잘 듣지 않는 기침이라면 이 진단명을 의심해야죠.]
이미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이제 말씀드렸으니까, 진단명을 말해 주세요. 치료도 해 주시고.”
“네. 당연하죠. 환자분의 병명은 ‘면섬유증’입니다.”
“면……. 뭐요?”
“면섬유증. 보통은 환기가 안 되는 섬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서 흔히 나타나는데……. 요샌 그런 일이 없어요. 허가받은 공장이라면 설비가 되어 있으니까.”
잊혀 가는 병 중 하나라는 뜻이었다.
다만 어떤 직종에 있어서만큼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원인 중에 대마도 있거든요. 대마…… 를 취급하는 곳이 허가를 받을 리가 없으니, 여기선 잘 생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