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다학제 (2)
수혁의 말대로 콘퍼런스 룸은 복작거렸다.
그냥 되는 대로 막 진행하는 게 아니라 자리가 딱 잡혀 있는 듯했다.
[맨 앞이 교수들 자리군요.]
‘혈종, 외과, 이비인후과, 흉부외과, 신경외과에……. 방사선 종양, 핵의학, 영상의학, 병리과까지 총출동이네.’
[다학제라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태화 의료원의 다학제는 이렇게 규모가 크지 못했다.
한 번에 한 명의 환자만 선별해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수술 과는 딱 한 과에서만 왔고, 심지어 그 과 인원들조차 다 오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대한민국 의료에서 다학제는 진료의 일환이 아니라, 그냥 의사들이 알아서 하는 일종의 소학회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학제를 한다고 해서 돈을 주기는커녕 그거 한다고 다른 진료에 방해가 된다고 시간마저 오후 6시 이후로 밀어 버린 마당 아니던가.
[대낮인데……. 이렇게 많이 모일 수 있다니. 환자는 누가 보는 걸까요?]
‘그러니까……. 병원을 놀러 오나.’
수혁이나 바루다에게는 한창 환자 보고 수술할 시간에 콘퍼런스 룸이 꽉 찬 거부터가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닥터 리. 여기 서 있지 말고 저리로 가지.”
그렇게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행크가 어깨를 두드렸다.
“아, 네네.”
“원래는 교수들 앉는 자린데, 오늘 닥터 제레미가 휴가라. 거기 앉으면 돼.”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교수 자리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주변에 앉은 사람들 면면이 다들 나이가 지긋했으니까.
수혁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자리란 뜻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거부하기도 뭐했다.
행크라는 외국인 교수가 권하는 자리 아닌가.
해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았다.
“아, 네.”
“편히 앉지. 별로 신경 안 쓰니까.”
그러자 행크는 주변에 다리 꼬고, 심지어 주머니에 손을 넣을 채 껄렁대고 있는 한 명을 가리켰다.
“쟤 1년 차야.”
“아?”
“여긴 원래 그래. 한국이랑은 달라.”
“아, 네. 알겠습니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좀 편하게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다리를 꼬거나 하진 않았지만.
“다학제 콘퍼런스 시작하겠습니다. 첫 환자분은 토머스, 남자 67세. 본원에서 시행한 건강 검진에서 경부 식도에 2cm가량 되는 덩이가 관찰되어 조직 검사 시행하였고, 선암으로 진단되어 금일 입원하였습니다. 익일 수술 예정으로 다학제 논의드립니다.”
그사이 다학제 콘퍼런스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바루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려울 거 없는 환자 아닙니까?]
이미 전면에 뜬 세 개의 화면 중 가장 우측에는 내시경 사진이, 중앙에는 CT가, 왼쪽에는 PET CT가 떠 있었다.
일반 레지던트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바루다나 수혁은 아니었다.
이미 딱 보자마자 플랜이 딱딱 세워졌다.
‘음……. 그냥 절제술 하고 당겨다가 이어 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절제 마진을 아무리 여유롭게 준다고 해도, 위치가 저기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정 안될 거 같으면 소장이라도 떼어 와서 이식하면 되고요.]
‘수술 후 처치도 그냥 항암……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요.]
하지만 교수들은 아주 심도 있는 토의를 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행크였다.
“환자 지금 일상생활 수행 능력은 어떻지? CT 보니까 목이 꽤 두꺼운데.”
“아……. 혼자서 일상생활이 가능하긴 합니다만, 체중이 많이 나가서……. 수술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당뇨나 고혈압은?”
“둘 다 있습니다.”
“흐음……. 수술 안정성이 걱정되는데. 어떻습니까?”
행크의 말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교수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니, 역시나 흉부외과였다.
“접근이 문제긴 한데……. 그건 여기 이비인후과에서 해 주기로 했습니다. 경부 임파선 정리까지 해서.”
“네. 저희 쪽에서 처리하죠. 다행히 영상에서 기도 쪽으로 침범이 관찰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들어가면 될 겁니다.”
그러더니 앞에 놓인 종이에 슥슥 그림을 그려서 이비인후과와 함께 대강의 접근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잠깐, 잠깐. 경부 임파선은 어디까지 정리할 건데요? 좌측 레벨 4번 쪽에 전이 의심되는 병원이 있습니다.”
설명이 이어지고 있으려니 영상의학과 교수가 끼어들었다.
중앙에 있던 CT 화면을 움직이면서였는데.
과연 그가 말했던 곳에 덩이가 관찰되었다.
“PET CT에서 당 섭취 보면 전이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그 말을 핵의학과 교수가 보완해 주었다.
좌측의 영상을 움직여 주면서였다.
그러자 이비인후과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좌측은 아예 외측 경부 절제술 하고……. 우측도 그렇게 하죠.”
“좋습니다. 답이 되었나요?”
그리곤 재차 행크를 바라보았다.
행크는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병리과 쪽을 바라보았다.
“음. 조직 검사상 악성도는 중증도라……. 안전 마진은 2.5cm 정도만 확보하면 될 겁니다. 아마 충분히 당길 수 있는 수준일 겁니다.”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뚱뚱하고, 전신 질환도 있지만 수술적 접근 및 절제는 어렵지 않다.
그러니 일단 절제하고, 경부 임파선까지 정리한 후 항암 치료를 시작하자.
“좋습니다. 그럼……. 절제술 후 마진 결과 보면서 항암 프로토콜은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절제만 잘 되면 굳이 방사선 치료까진 필요 없겠는데, 어떤가요?”
“동의합니다. 하지만 마진에서 암세포가 나오면 반드시 항암 방사선 치료가 필요합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케이스.”
정신을 차려보니 무려 30분이 지나 있었다.
진단, 수술, 추후 관리까지 여러 명의 교수가 토의를 해 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레지던트들 또한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듯했고.
그러나 수혁이나 바루다는 아니었다.
[장난 아닌데요?]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모든 환자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건가?’
무슨 아주 고차원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실제로 수혁이나 바루다가 생각했던 결론에서 눈에 띄게 달라지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식도암 케이스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식도암에 걸린 환자를 보고 있었다.
어차피 같은 환자를 진료하는 거니 말장난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필드에 있는 의사인 수혁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누가 치료해도 실수가 없겠는데요.]
‘그래……. 시스템이……. 완벽해.’
게다가 이 다학제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검증이었다.
누군가 한 명은 실수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든 교수가 동시에 한 환자를 두고 실수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런 시스템이 자리 잡게 된다면 태화 의료원은 아니, 대한민국의 의료는 단숨에 도약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생각이 깊어지면 질수록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져 왔다.
‘배울 점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당장 태화 의료원에서 시행할 수는 없는 시스템입니다.]
‘그러니까…….’
수혁이 보기에 대한민국의 의료 체계는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우수한 편에 속해 있었다.
실제로 대학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더더욱 그러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수혁은 아직 현대 의학의 한계로 환자를 떠나보낸 적은 있어도.
환자가 돈이 없어서 떠나보낸 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미국은 어떠한가.
당장 오늘만 해도 외래를 봤던 환자 중 둘이나 자신이 든 보험이 반드시 받아야 하는 치료를 커버하지 못해 돌아가고야 말았다.
돈이 없어 죽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가장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보는 시스템을 구축한 덕이라고 보면 되었다.
[진료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어떻게 모든 환자를 다학제로 처리하겠습니까?]
하지만 부작용이 아주 없진 않았다.
비용을 줄이면서 최대한의 효과를 보려면 어찌해야겠는가.
설비나 약에 대한 비용을 줄이는 건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사람을 쥐어짜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대학 병원은 한 명이 휴가라도 가면 바로 곡소리가 나게끔 만들어져 있었고.
‘하긴 그것도 그렇네…….’
[다만 이런 토론 자체를 보는 건 좋군요. 토의 방식에 대해 재차 분석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그래. 음. 일단 보자, 그럼.’
[네.]
둘은 잠시 현실화 방안에 대해 떠들어 대다가 제풀에 지친 채로 다시 토론으로 돌아갔다.
아까까지 설명을 이어 나갔던 흉부외과 레지던트 대신 다른 레지던트가 앞에 나가 있었다.
거리가 좀 되어서 가슴팍에 무슨 과라고 쓰여있는지 보이진 않았지만.
뒤에 뜬 화면만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비인후과군요.]
‘두경부암……. 음.’
둘의 말대로 우측 화면엔 후두 내시경 사진이, 중앙에는 경부 CT가, 좌측에는 전신 PET CT 사진이 떠 있었다.
“다음 케이스는……. 벤, 남자 42세. 1년 전부터 목의 앞부분에 만져지던 덩이가 있었으나 자의로 경과 관찰 하다가 쉰 목소리 및 사레 걸림 등이 발생하여 2주 전 시행한 초음파에서 갑상샘 덩이 관찰되어 전원되어 온 환자입니다. 총 덩이는 두 개인데, 그중 중앙 부위 덩이에서 시행한 세침 흡입 검사에서 유두암종 관찰되었습니다.”
레지던트는 발표 중간에 좌측 화면을 클릭했다.
그러자 사진인 줄 알았던 것이 움직였다.
동영상이었던 모양이었다.
[좌측은 움직이질 않는군요.]
‘성대 마비가 생겼다, 이건데.’
[이상하네요.]
‘그러니까.’
갑상샘 유두암종.
우리가 흔히 착한 암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암이었다.
암한테 착하니 어쩌니 하는 게 과연 온당한가 싶긴 했지만.
아무튼, 그 성향이 대단히 온건한 편이긴 했다.
심지어 1cm가 안 되는 경우에서는 수술하는 거나 경과 관찰하는 거나 비슷하다는 식의 논문까지 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암이 고작 저만한 크기에서 성대 마비를 시켜?
이상한 일이었다.
그건 비단 수혁만의 의문은 아니었는지, 행크 또한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 좌측 상단에 있는 덩이에서는 세침 흡입 검사를 하지 않은 이유가 있나요?”
“음……. 기록을 보면 앞쪽으로 반흔 조직이 있어서 바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흠. 반흔 조직이 있어?”
행크의 중얼거림을 들은 영상의학과 교수가 마우스를 움직였다.
그러자 중앙에 있던 경부 CT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좌측 상단 덩이 쪽으로 이동했다.
“예전에 여길 다친 적이 있는 모양인데. 여기 보면 반흔이 있어요.”
“아……. 정말 그렇네. 근데 이 정도 덩이에서 성대 마비가……. 그러니까 반회 후두 신경(Recurrent laryngeal nerve)를 건드리는 게 일반적인가?”
“그건…… 그건 아니지만 일단 접해 있긴 합니다. 여기 보면.”
“그렇네. 음…….”
영상에서 분명히 덩이가 갑상샘 캡슐을 뚫고 신경을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비인후과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일단 전절제술하고 경부 절제술에……. 추후 성대 내전술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젊은 데다가, 영업직이라…….”
“성대 내전술이라. 가능할 거 같긴 하네요.”
“네.”
“하지만 아무래도 전 이게 찜찜한데.”
이비인후과 쪽은 이미 수술 계획에 추후 계획까지 세운 참이었다.
그러나 행크는 좌측 상단의 덩이가 못내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수혁이나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상……. 잘 보면……. 좌측 상단은 유두암종 아닐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
‘동시에 두 암이 있다고? 무슨 그런…….’
[안 보여요?]
‘보이긴 보여.’
[그럼 손 들어요. 토의 끝나 가잖아. 이대로 끝내면…….]
‘죽겠지?’
[네. 죽을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