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외래 (2)
‘이, 이 개새끼가?’
스티브는 수혁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마 밖이라면 그렇게 어렵지도 않을 터였다.
스티브는 180이 훌쩍 넘어가는 거구였고, 수혁은 그냥 평범한 체격인 데다가 한쪽 다리가 불편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병원이었고.
심지어 행크 앞이었다.
“왜 그래?”
행크는 자신의 민머리를 긁적이면서 입을 열었다.
얼굴에 옅은 짜증이 지나갔는데, 아마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서일 터였다.
제자랍시고 먼저 진료를 보게 했는데 다녀와서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연수생 앞에서.
어차피 별 신경도 안 쓰이는 연수생이라고 하지만, 그 앞에서 망신당하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그…….”
“뭐, 너 왜 그래? 가서 본 걸 얘기하라고.”
“그……. 네. 알겠습니다. 음.”
“그래. 잘하면서.”
해서 스티브를 다그쳤다.
당하는 스티브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아는 것도 없는데 아는 척을 해야 한다니.
해 본 사람은 다 아는 고통일 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교수가, 그것도 스티브가 지망하고 있는 혈액종양내과 교수 중 가장 영향력이 큰 행크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 일단 환자는……. 멜라노마입니다.”
“그건 알아. 아이오와 시티 병원에서 소견서 보내 왔잖아. 진단명 붙여서.”
“어…… 네. 코피를 흘리기 시작한 것이 6개월 됐고……. 코가 막히기 시작한 건 한 달입니다.”
“으음.”
증상에 관한 얘기는 사실 별 새로울 것이 있진 않았다.
물론 의료진마다 반복해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긴 했다.
의료진도 질문을 놓칠 수 있지만, 일단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점검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단서를 떠올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스티브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소견서에도 다 있는 내용이었다.
생각보다 스티브가 오랫동안 진료를 보는 바람에 행크는 벌써 소견서를 두 번이나 읽은 참이었고.
그 말은 곧 지겹다는 뜻이었다.
“아니, 네가 본 걸 얘기하라고.”
“아……. 네. 비강 내에……. 멜라노마가 있습니다.”
행크는 스티브의 말에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즉시 날카로운 눈빛을 하더니, 마구 캐묻기 시작했다.
“크기는?”
“어. 한 2cm?”
“깊이는?”
“그건……. 모르겠습니다.”
“멜라노마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뭔데?”
“기, 깊이입니다.”
“그걸 확인 안 했어?”
“그…….”
아까까지만 해도 덩치가 좀 위압적이긴 하지만 웃는 상이었던 대머리 행크는 그야말로 형사와 같은 느낌으로 확 변해 있었다.
마치 취조라도 하듯이 질문을 던져 대는데, 그 앞에 서 있지도 않은 수혁의 오금이 다 저려 올 지경이었다.
“아무튼, 비강 내 멜라노마라 이거지?”
“네, 네.”
“예후가 어떻지? 보통?”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자, 행크는 다리를 앞에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질문의 성질을 바꾸었다.
케이스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질환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었다.
원래 같으면 이쪽이 훨씬 쉬웠다.
병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건 학생 때부터 해 왔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질환에 대해 아예 모르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그…….”
“몰라?”
“좋…… 을까요? 수술로 제거 가능하다면?”
“어휴. 그럼 치료를 수술로 하나?”
“어…….
행크는 계속 우물쭈물하기만 하는 스티브를 보며 고개를 다시 한번 가로저었다.
“아는 게 없구나, 너? 이 질환에 대해서.”
“그……. 죄송합니다. 공부하겠습니다.”
“이제 9월이면 4년 차인데. 그럼 곧 전문의인데 이걸 몰라?”
“그…….”
“나 원. 아무튼, 음.”
행크는 그대로 진료실로 직행하려다 말고 벽에 걸린 시계와 수혁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좀 남긴 하는데.’
원래 같았으면 케이스에 관한 심도 있는 토의가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레지던트는 배우고, 교수는 자신의 지식과 계획을 점검할 수 있었다.
환자에게는 조금 지루한 과정일 수 있겠지만, 대학 병원으로 오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편이 좀 더 안전하고, 정확하기도 했고.
‘물어나 볼까. 어차피 알 거 같진 않은데…….’
행크는 잠깐 더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아까 스티브가 그랬던 것처럼 전혀 기대감이 서려 있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이 질환은 너무 드문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아이오와 주립 병원의 내과 레지던트도 모르는 것을 저 변방의 레지던트가 알 것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 연수생 생각은 어때요?”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는지, 호칭은 연수생이었다.
게다가 생각이 어떠냐니.
질문도 성의 없지 않은가.
어떤 생각인지 묻지도 않고.
[이 새끼들이 정말 하나같이.]
‘발라줘?’
[네. 준비됐습니다. 시작하죠.]
‘좋아.’
하지만 수혁은 질문이 그렇다고 해서 답변을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방금 말한 것처럼 본때를 보여 줄 심산이었으니까.
“일단 비강 내에 발생하는 멜라노마는 무척 드문 병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케이스 리포트 감이었죠.”
“오.”
행크는 그대로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적어도 수혁의 답이 스티브의 그것보다는 훨씬 그럴싸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수혁은 아직 입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케이스 리포트가 상당히 쌓여서 더 이상 미지의 병은 아닙니다. 이 환자……. 토마스의 경우에는 상당히 전형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고요.”
“음, 음. 그래. 더 해 봐요.”
행크의 표정이 아까와는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뭔가 말하는 투가 아주 노회한 의사의 그것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분명 논문을 아주 많이 써 봤거나, 또는 아주 많이 읽고 분석한 사람의 말투였다.
그러니까, 일개 레지던트가 교수 수준의 발언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좌측 비강 외축에 발생해 있는데, 이것도 전형적인 양상입니다. 코피가 6개월 전에 생겼다고 진술한 것으로 볼 때. 적어도 발생 시기는 6개월 전일 겁니다. 그런데 크기가 2cm라면 조직학적 특성이 아주 공격적이진 않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죠. 물론 이건 예측입니다.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호…….”
수혁의 발언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행크의 자세가 점점 더 바뀌었다.
심지어 처음에는 못마땅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스티브조차도 그러했다.
근거와 예측이 딱딱 이어지는 것이 마치 잘 짜인 한편의 추리 소설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원래 내과학이라는 것이 일정 부분 그런 면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즉석에서 이런 식의 답변을 아니, 거의 발표에 가까운 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뭐야, 이거?’
행크는 미쳤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수혁은 여기서 중단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깊이가 예후에 중요하긴 하지만,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진 않았습니다. 조직 검사 하기 전에 MRI를 반드시 찍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행히 환자를 처음 진료했던 병원에서는 조직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검사가 가능할 겁니다.”
“그래, MRI…….”
“또한 조직 검사는 아예 수술장에서 제거하면서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손을 댔다가 인위적인 전이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비강 내 멜라노마는 다른 위치에 있는 멜라노마와는 많이 다르니까요.”
“그렇죠. 전이가 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네. 또……. 일단 정확한 것은 조직학적 특성을 봐야겠지만 뭐가 되었건 자외선이라는 자극이 없이 발생한 멜라노마이기 때문에 예후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행태가 좀 다릅니다.”
일반 피부암의 경우엔 대개 자외선으로의 노출이 높은 부위에 생기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콧잔등이라든지, 목 뒤라든지 하는 곳들.
그런 부위의 멜라노마도 물론 무섭지만.
그래도 제거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었고, 약에도 잘 듣는 편이었다.
그에 비하면 비강 내에 발생하는 멜라노마는 아예 다른 암이라고 봐도 좋을 지경이었다.
“물론 환자의 나이가 평균 발생 나이인 60세보다는 젊어서……. 조금 낫기는 하겠지만. 지금까지 발표되었던 케이스 리포트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를 보면 5년 생존율이 겨우 40%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환자분에게 충분히 전달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와우.”
그냥 완벽한 답변이라고 보면 되었다.
심지어 행크가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내용보다도 더 좋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리고는 손을 휘휘 내 저었다.
수혁이야 그게 뭔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스티브는 알고 있었다.
‘진짜……. 진짜 놀랐구나.’
행크는 그렇게까지 감정 표현이 풍부한 인간이 아니었다.
애초에 혈액종양내과라는, 그러니까 대학 병원에서도 가장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과의 의사가 그러기란 쉬운 일도 아니었고.
그런 행크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딱 두 가지였다.
기가 막힌 발표를 들었거나, 아니면 신약이 발표됐거나.
“이름이 뭐라고요?”
“이수혁입니다.”
“이수혁……. 병원은?”
“태화 의료원입니다.”
“아, 거기. 거기 논문 많이 내던데. 조…… 누구더라?”
“조태진 교수님이 활발히 논문을 내십니다.”
“아, 맞아. 그런 이름이었어. 미안해요. 한국 이름은 저한테 좀 어려워서.”
“아닙니다, 저도 다른 나라 사람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무척 놀란 얼굴의 행크는 다시 한번, 이번에는 상당히 성의 있게 수혁의 호구조사에 들어갔다.
“지금 4년 차? 3년 차?”
“아뇨, 2년 차입니다.”
“2년 차? 와우.”
행크는 평생 낼 감탄사를 오늘 다 터뜨리기로 작정이라도 했는지 연신 ‘와우’를 연발했다.
그렇게 한참을 ‘와우’하더니 재차 수혁을 돌아보았다.
“주말에 뭐 해요?”
“네? 뭐 별건 없습니다. 차도 렌트하지 않아서……. 그냥 숙소에 있을까 하고 있었습니다.”
수혁은 자신의 불편한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런다고 운전을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운전에 자신이 없다는 말을 구구절절하기보다는 핑계 대는 편이 보다 있어 보여서 하는 짓이었다.
다행히 만국 공통으로 아주 잘 먹혀들어 갔다.
“아,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토요일 저녁에 내과 교수들끼리 조촐한 파티가 있는데, 한번 오시죠. 다들 음식을 잘해서 올 만할 겁니다. 제가 라이드해 드릴게요.”
“아, 감사합니다.”
“그때 교수들한테 소개를 좀 해 드리죠. 연수생들이 워낙 많이 왔다 가서 사실 그렇게 신경을 못 쓰는데……. 그래도 이름이라도 알면 더 신경을 쓸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갈까요?”
“네.”
행크는 스티브 대신 수혁의 어깨를 두드린 채 외래로 향했다.
그리곤 수혁이 세운 계획대로 진료를 본 후, 수혁과 스티브를 또 다른 환자에게로 보냈다.
이번에는 2번 방이었다.
아무래도 여긴 환자가 방에서 기다리고, 의사가 그 방으로 가는 시스템인 듯했다.
낯설기는 하지만 두려울 건 전혀 없었다.
이번에 확실히 알았으니까.
‘내 실력이……. 미국에서도 통해.’
[당연하죠, 이 바루다가 있으니까요.]
‘당연하다고 하기엔 너무 들뜬 거 아니냐?’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만들어진 이유가 미국의 왓슨에 대항하기 위해서였으니까요.]
‘아무튼, 이번엔 뭘까?’
[뭐든 상관있습니까? 수혁과 내가 모르는 질환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