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0화 (90/1,303)

90화 외래 (1)

‘뭐래?’

수혁의 안내를 맡은 것으로 보이는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 내과 3년 차 닥터 스티브는 절대 수혁은 들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소리로 중얼거린 참이었다.

제아무리 수혁이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다고 해도 안 들리던 게 들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그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후진국에서 온 놈 가르쳐야 한다고 귀찮아하는군요.]

하지만 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바루다는 입술을 읽어 낼 수 있었고.

수혁에게도 방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공지능에게는 퍽 쉬운 일 같았지만.

‘후진국?’

[미친놈인가? 감히 이 바루다 님을 탄생시킨 대한민국을 후진국이라고 해? 죽일까요?]

‘응? 죽인다니……. 뭔 소리야, 인마.’

[제 위대한 조국을 비하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조국이라니…….’

바루다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그럴 수도 있나 뭐 이런 생각도 들긴 했다.

아무튼, 녀석의 말대로 대한민국은 녀석을 만들어 준 나라였으니까.

인공지능 주제에 어딘가에 소속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스티브……. 이 자식…….]

‘아니, 너 갑자기 내 몸 통제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수혁은 바루다의 격렬한 반응에 우려를 표했다.

혹시나 바루다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스티브를 죽이거나 위해를 가할까 봐서였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180을 훌쩍 넘고, 100kg도 넘어가 보이는 스티브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수혁이 어떻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아주 없던 일도 아니지 않던가.

이전에도 바루다가 수혁의 입 정도는 통제했던 일이 있었으니까.

비록 아주 잠깐이었고, 아주 간단한 발화이기는 했지만.

[무슨 소립니까? 제가 무슨 기생수도 아니고.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도 복수는 해야겠어요.]

‘무, 무슨 복수?’

[의사가 할 만한 복수라는 게 달리 있겠습니까?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겠습니다. 후진국에서 온 의사한테 발리면 어떤 표정이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군요.]

‘그……. 뭐, 그래.’

동기가 불순하기는 한데.

뭐가 어찌 되었건 결론이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다.

바루다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마 이곳 미국에서라도 녀석과 대적할 수 있을 만한 의사는 거의 없지 않겠는가.

사실 태화 의료원이면 세계적인 수준인데, 거기서도 그랬으니.

[일단 스티브에 대해 알아보죠……. 아, 이현종이 이 병원과 주고받았던 메일에 스티브에 관한 파일이 있었네요.]

‘응?’

[특이한 이력이네요. 부모가 둘 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교직원이라 평생 여기서 살았습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고등학교, 대학교, 병원 모두 지역이 다르다던데. 아무튼,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군요.]

‘여기가 시골인가?’

[공항에서 숙소 올 때 양옆으로 펼쳐져 있던 옥수수밭 못 보셨습니까?]

‘아, 하긴.’

대학 건물이 워낙 장엄하게 들어서 있어서 초라하다는 인상을 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동네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서울과 비교하자면 그 비교가 미안해질 정도로 처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적어도 수혁은 아까보다는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청년이 지껄인 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에 반해 바루다는 정반대로 사고를 굴렸다.

[감히 깡촌 출신이 대한민국 최고 기업 태화 그룹의 총아인 나를 무시했다 이거지?]

사실 스티브가 무시했던 건 바루다가 아니라 수혁이었지만.

돌아버린 바루다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한숨을 쉬고 있던 스티브가 물끄러미 수혁을 바라보았다.

“일단 일로 와요. 영어는 하죠?”

아주 도발적인 발언이었고, 이건 수혁의 기분 또한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새끼 봐라? 영어는 하냐고?’

사실 바루다가 없을 땐 그렇게까지 훌륭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진 못했지만.

아무튼,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만큼은 바루다도 수혁과 통했다.

강대한 적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쓸데없이 시비를 걸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고.

“네, 잘합니다.”

해서 이렇게 대꾸를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와, 자기 입으로 잘한다고 말하는 동양인은 처음 보네. 진짜 잘해요?”

심지어 일부러 더 빨리 말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바루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연산 처리 속도가 오히려 스티브보다 훨씬 더 빨랐으니까.

“네. 근데 어디 가는 거죠?”

“아. 일단……. 교수님 인사부터 하려고요. 닥터 앨리슨이라고 혹시 알아요?”

스티브는 네가 알 리가 없지, 하는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에게는 퍽 아쉽게도 수혁은 앨리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앨리슨이면 순환기내과 쪽이군요.]

‘심혈관계 논문에 자주 이름이 보이더라.’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논문이라고 한다면 역시…….]

심지어 그가 쓴 논문도 줄줄 꿰고 있었다.

“네. 작년 12월에 미국 심장 학회지에 실렸던 ‘향후 5년간 심혈관계 질환을 겪을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인자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오……. 오. 그, 그랬군요.”

바루다는 약간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스티브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이거 모르고 있던 모양인데요?]

‘그러게. 잘난 척만 할 줄 알지 공부는 안 하는 거 같아.’

사실 수혁도 바루다를 만나기 전이라면 공부보다는 오프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나가서 놀까, 또는 어떻게 해야 전문의 따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해 더 심도 깊은 고민을 했을 테지만.

이미 사람이 바뀐 상황이지 않은가.

어지간한 대학 교수들보다도 더 공부를 중요시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네. 그러죠.”

아무튼, 앨리슨 교수의 연구실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진 않았다.

원래 내과 의국이 있는 층 전체가 교수 연구실로 쓰이고 있는 곳이라 그러했다.

아무래도 땅덩이가 좁은 서울보다는 땅 씀씀이가 넉넉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교수님, 한국에서 온 이수혁입니다. 오늘부터 한 달간 연수 예정입니다.”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스티브는 앨리슨에게 고개를 숙인 후, 수혁을 소개했다.

“아.”

앨리슨 교수는 짤막한 신음을 흘려 대곤 수혁을 아주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게……. 이현종 교수가 자랑하던 그 친구란 말이지?’

원래 같으면 수혁과 같은 연수생을, 그것도 한 달짜리 단기 연수생을 알아보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은 그 자체가 상당히 좋은 병원일 뿐만 아니라 교육이 아주 잘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으로 유명했기에 그러했다.

이번 달만 해도 수혁처럼 단기 연수생으로 오는 인원이 너덧은 될 지경이었다.

물론 연수생들이 내는 돈이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제일 큰 이유이긴 했지만.

아무튼, 한 과의 과장이 단기 연수생을 알아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빨리 보여 주고 싶어서 일정을 당겼다고 했었는데……. 흠.’

이현종은 비단 한국에서만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월드 스타 이현종이겠는가.

심지어 한번은 국제 심장 학회 회장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위상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못한 데다가, 한국의 순환기내과 의사 중 이현종을 질시하던 사람들의 입김으로 인해 무산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현종은 앨리슨도 인정하는 명의였다.

‘뭐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건 없는데.’

지팡이가 좀 인상적이긴 했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약점이지, 개성은 아니지 않은가.

해서 앨리슨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 의료원에서 왔죠? 앞으로 한 달간 잘 지내 봅시다. 아무래도 한국하고는 시스템이 많이 다를 거예요. 배워 가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브와는 또 다른 자부심이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배워 가는 게 있을 거라니,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어투나 표정 등이 사뭇 달랐기 때문에 그리 기분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친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네, 앨리슨 교수님. 평소 교수님이 쓰신 논문에서 많이 배웠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특히 작년 12월에 미국 심장 학회지에 실렸던 ‘향후 5년간 심혈관계 질환을 겪을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인자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아, 오. 그거 읽었어요?”

대학 병원 교수들의 특징을 특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워낙에 이상한 인간들도 많고, 또 워낙에 수도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기는 했다.

바로 자신이 쓴 논문을 읽은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점.

제아무리 앨리슨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네. N수가 10만 단위로 이루어진 연구는 드물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많은 변수까지 대입시킨 연구라……. 정말 인상이 깊었습니다. 유용하기도 했고요.”

“하하. 그거 쓰느라 고생깨나 했죠.”

앨리슨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어 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읽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이 고생하고 고민했던 지점을 딱 짚어 주었으니까.

그렇게 웃던 그는 돌연 창문 밖을 가리켰다.

아름드리나무가 사방에 널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쪽이었는데.

앨리슨이 가리킨 곳은 정원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아, 저기 제 연구소가 있어요. 시간 되면……. 안내를 해 줄까 하는데, 괜찮죠?”

“네, 물론입니다. 영광입니다.”

수혁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임상 수준이야 솔직히 태화 의료원이나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이나 별 차이가 있진 않을 터였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 수준이 떨어져서는 아니었다.

그저 태화 의료원이 너무 우수하기 때문일 뿐.

하지만 연구 역량은 비교하기가 좀 우스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애초에 들이붓는 돈 차이가 어마어마하기에 그러했다.

[잘됐군요. 참고가 될 겁니다.]

‘그래, 뭐 배우는 게 있겠지.’

그런 연구소를 들러 본다면 뭔가 노하우를 얻을 수 있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혁이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앨리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오늘 조영술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이수혁 선생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스티브를 향해 질문을 던지면서였다.

스티브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수첩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답을 할 수 있었다.

“네. 오늘은……. 혈액종양내과 행크 교수님 입원 환자 워크업하는 거 참관입니다.”

“아……. 스티브 선생이 지금 행크 주치의인가?”

“네.”

앨리슨은 고개를 끄덕이는 스티브에게서 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럼 잘 보고……. 내일 오전에 콘퍼런스에서 보죠.”

“네, 교수님.”

그리곤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순한 양처럼 있던 스티브가 돌연 태도를 바꾼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논문 그거, 여기 오느라 읽어 본 거죠? 잘됐네요. 앨리슨 교수님 까다로운데, 그나마 앨리슨 교수님 참관할 때 덜 혼나겠어요.”

지가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그렇게 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수혁은 대번에 뭐라 할 생각이 들었는데, 의외로 바루다가 말렸다.

[외래에서 발라 줍시다. 내과 의사답게, 지식으로.]

“음?”

“행크 교수님. 오늘 참관할……. 그…… 아, 한국에서 온 이수혁입니다.”

“아……. 그래, 그래. 네가 좀 잘 챙겨.”

“네, 교수님.”

행크는 스티브와 아주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는 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반가워요.”

악수를 건네면서였는데, 손이 어찌나 큰지 진짜 솥뚜껑만 했다.

수혁은 그 큰 손을 보면서 약간은 의사다운 궁금증이 일었다.

‘장갑 사이즈가 대체 몇일까.’

[9? 8 반? 모르겠네요. 수혁이 7이죠?]

‘어. 진짜 크네…….’

그냥 보기에도 컸던 행크의 손은 잡고 보니 더더욱 거대하게만 느껴졌다.

거기에 더해 팔뚝에는 북슬북슬한 털까지 잔뜩 나 있었기 때문에 의사보다는 어쩐지 형사나 산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대머리군요.]

게다가 행크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었다.

애매하게 남아 있었으면 우스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예 하나도 없으니까 조금은 무섭다는 인상을 주었다.

물론 수혁은 그러한 속내를 드러낼 정도의 애송이 시절은 넘어간 지 오래였기 때문에 전혀 티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

“네, 교수님, 이수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뭐. 참관인데. 첫 환자……. 누구지?”

행크는 약간은 귀찮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없게 느껴질 수도 있는 모습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또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가면 대강 시간 때우면서 놀다 와.’

‘아이오와랑 시카고랑 가깝거든? 주말마다 놀다 왔어.’

이게 수혁이 이곳에 오기 전, 선배들에게 들었던 조언 대부분이었으니까.

그 말은 곧 가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그저 반쯤은 놀러 온다는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이었다.

그게 벌써 수년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행크와 같은 교수들에게 열의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란 얘기기도 했다.

[놀라게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네요.]

물론 수혁과 바루다는 생각이 좀 달랐지만.

“첫 환자분은 1번 방에 오셔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래? 그럼 일단 가서 진찰하고 있어. 토마스 씨지?”

“네.”

“오케이. 난 너네 다녀오는 동안 차트 검토 좀 하고 있을게.”

“네. 그럼 저는……. 저기 연수생이랑 다녀오겠습니다.”

“어. 뭐……. 얌전히 있겠지만, 그래도 주의는 시켜.”

“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행크나 스티브나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동양권에서 오는 의사들은, 특히 한국에서 오는 의사들은 얌전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막상 말하는 거 보면 영어를 아주 못하는 것도 아닌데도 마치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 가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때문에 스티브는 별걱정 없이 수혁과 함께 1번 방으로 향했다.

너무 방심하고 있던 탓에 수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흠. 외래가 무슨 수술실처럼 방이 많네?’

[그러니까요. 특이하네요.]

복도를 따라 1번부터 4번까지 방이 쭉 늘어서 있었는데, 딱히 행크 말고 다른 교수가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혼자 다 쓰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미국은 규모가 좀 다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 씨.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네, 반가워요.”

“잠깐 차트를 볼게요.”

수혁이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스티브가 환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행크가 하도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서 재진 환자인가 했는데 옆에 뜬 차트를 보니 신환이었다.

[멜라노마. 흐음, 피부암이네요?]

‘드문 암인데.’

[코카시안 인종에서는 그렇게 드물지 않죠.]

‘아, 그렇지. 인종별 차이가 있지. 피부암은.’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위치도 희한하네요.

‘그러니까. 비강에 멜라노마라니.’

수혁은 아까보다도 좀 더 흥미가 돈 얼굴로 환자를 돌아보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환자였고, 아마 앞으로도 볼 일이 거의 없을 만한 환자이지 않은가.

인종 구성이 다른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야 쉽게 접할 수 있는 케이스라는 뜻이었다.

여기 왔을 때 잘 봐 두지 않으면, 나중에 혹 다른 케이스를 접할 때 실수할 가능성도 있었다.

“자, 일단 비강 안쪽을 볼 건데요. 마취 먼저 하겠습니다.”

스티브는 차트를 보고 상당히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일단은 친절하게 웃으며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수혁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싸가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을 함부로 하던 녀석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놀라운 변화였다.

“약간 불편합니다.”

수혁은 스티브가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환자의 비강에 국소 마취액 뿌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도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비강 뒤쪽의 비인두라면 몰라도, 비강 내부 관찰에서까지 마취액을 뿌리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환자에게 최대한 불편감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군요.]

‘이건 배울 점인데.’

[싸가지 없는 놈 주제에……. 배울 점이 있긴 있군요.]

‘아마 시스템이 이렇겠지.’

[그럴 겁니다.]

설마 스티브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지 않겠는가.

그냥 이곳 병원의 시스템이 이렇다고 봐야 했다.

태화 의료원의 시스템도 후지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태화는 사람 생명을 효율적으로 살리는 데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에 반해 이곳은 환자를 불편하지 않게 하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비강 내시경이라는 상당히 간단한 술기조차도 손을 닦고, 장갑을 끼고 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코피가 나거나 하진 않았나요?”

“통증은요?”

“귀는 괜찮으세요?”

스티브는 마취액이 효과를 보일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수혁이 보기에 딱히 지금 질환과 연관이 없어 보이는 질문들도 있었다.

시간 낭비가 되겠지만, 저런 식으로 하면 적어도 안 물어봐서 놓치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안을 좀 보겠습니다.”

“네.”

“약간 불편합니다.”

“네.”

스티브는 충분히 기다린 후에야 비강 내시경을 코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래 봐야 아주 약간 들어갈 뿐이었다.

그냥 넣었어도 그렇게 불편하진 않았을 터였다.

아무튼, 모니터를 통해 멜라노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좌측 비강의 외측 벽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일반 점막과는 달리 시커먼 색이었다.

주변으로는 염증을 일으킨 건지, 아니면 괴사를 일으킨 건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저런 색이구나. 기억했어?’

[물론입니다. 데이터베이스화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루다는 즉시 멜라노마의 형태와 색을 데이터에 집어넣었다.

물론 이미 공부한 내용에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아무래도 좀 느낌이 달랐다.

“음.”

한창 수혁과 바루다가 난생처음 보는 케이스에 부산을 떨고 있을 무렵, 스티브가 어두운 얼굴이 되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환자에게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섰다.

수혁은 연수생으로 온 것인지, 의사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혼자 남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서 스티브의 뒤를 따라 방을 나왔다.

“으음.”

바로 행크에게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스티브는 복도에 서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고뇌에 빠진 듯한 얼굴이었는데, 바루다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 새끼도……. 방금 본 질환 처음 본 거 같은데요?]

환자를 보긴 봤는데, 개뿔도 모르겠는 의사의 표정이었다.

수혁에게도 익숙한 표정이었으니 바루다가 분석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런가 본데? 하긴 그냥 멜라노마야 코카시안에게 많긴 하겠지만…… 비강 내에 발생하는 건 드물지.’

[위험 요소가 자외선이니까요.]

자외선에 많이 쬐면 쬘수록 많이 생기는 암이 자외선이라고는 평생 가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위치인 비강 내에 생겼다.

아주 잠시만 생각해 봐도 무척 드문 컨디션 아니던가.

제아무리 미국에서 수련받고 있는 스티브라 해도 처음 봤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 뭐라고 말씀드리지.”

스티브는 누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중얼거리다가 마침내 수혁을 발견했다.

‘얘가 알 리가 없는데.’

물론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대한민국은 후진국이었으니까.

비록 그가 살고 있는 아이오와보다 서울이 훨씬 더 대도시였지만.

심지어 시카고조차 서울과 대등하단 평가를 받기 어려웠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깨지기 어려운 편견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어차피 이대로 행크에게 돌아가면 교육을 빙자한 토론이 시작될 터였다.

행크는 다른 교수들과 마찬가지로 질문하는 것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의 무식은 금세 들통이 나고 말 터였고.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줄어들고 있는 상급 병원 스태프 자리에 자신을 추천해 줄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껏 전문의를 땄는데 별 볼 일 없는 병원으로 가서 일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해서 스티브는 여전히 별 기대는 없는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 연수생?”

“네, 스티브.”

“혹시 방금 본 질환……. 뭔지 알아요?”

“알죠.”

“역시 몰……. 응? 알아요?”

수혁은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얼굴로 스티브를 바라보았다.

넌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으면서였는데, 아예 바루다의 조언까지 받아 가면서 지은 표정이었다.

‘와……. 띠껍다…….’

덕분에 수혁은 세상에서 제일 띠꺼워 보이는 표정을 지을 수 있었고.

그런 종류의 표정은 만국 공통인지라, 스티브에게도 그 띠꺼움은 가감 없이 전달될 수 있었다.

‘더 묻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안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모르는 놈이 물어봐야지.

“그…….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모르고 들어간 거예요? 외래?”

“환자 이름만……. 이름만 알고 들어간 거예요. 초진이잖아요.”

“멜라노마를 몰라요?”

“아니……. 그건 알죠……. 하지만 비강에 생긴 건……. 처음 봅니다.”

그럴 터였다.

방금 바루다가 찾아낸, 이전에 수혁이 읽었던 내용을 보니까 그럴 거 같았다.

[익스트림리 레어……. 극히 드물다는 표현을 쓰는군요.]

‘케이스 리포트 감이었다, 이거지?’

[네.]

극히 드물다는 표현은 의학계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었다.

퍼센트라는 훨씬 객관적인 지표가 있으니까.

그런데도 썼다는 건, 정말 드물어서 통계로 잡히지도 않는다는 얘기였다.

그런 질환을 평범한, 물론 미국이긴 하지만, 내과 3년 차가 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하긴 드물긴 하죠.”

“보, 보신 적이 있어요?”

“많이 봤죠. 논문도 많이 봤고.”

“아, 그, 그렇군요.”

“아까 본 환자는 아주 전형적인 모습이던데…….”

“그…….”

스티브는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대놓고 가르쳐 달라고 하진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수혁이나 바루다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지만.

굳이 도움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도움이 아니라 개박살 내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끼익.

해서 수혁은 입을 여는 대신 문을 열었다.

행크가 앉아 있는 바로 그 문이었다.

“와, 정말 인상적인 진료였습니다.”

수혁은 행크를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그리곤 최대한 늦게 들어가려고, 그 짧은 시간에 구글링하기 시작한 스티브를 끌어다 안으로 내보냈다.

“여기 스티브 선생님이 너무 능숙하시던데요?”

“그래요? 스티브가 똑똑한 편이긴 하지. 그럼 진찰한 결과 좀 말해 봐.”

“어…… 그…….”

“왜 그래?”

행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혁이 입을 열었다.

“알려 주신다고 했잖아요.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누가 봐도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밉상 얼굴을 하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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