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학회 (1)
이현종은 생각 같아서는 그냥 지금 바로 발표장으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추계 학회는 늘 추석 전전주 주말에 한다는 것이 원칙이었고.
그건 제아무리 날고기는 이현종이라 해도 기다려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드디어, 드디어!”
덕분에 병원 로비 앞에 새벽같이 선 버스에 오르는 이현종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그득했다.
거의 무슨 소풍 가는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는 되어 보일 정도로 상기되어 있었다.
“원장님. 체통 좀 지키세요.”
보다 못한 신현태가 그런 이현종의 팔을 잡아다가 의자에 앉혔다.
“뭐 인마. 너는 몰라. 내가 이번 학회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제가 왜 몰라요, 다 알죠. 형님 때문에 수혁이가 진짜 고생 많았죠…….”
신현태는 그렇게 말하면서 뒤쪽 버스를 돌아보았다.
규모가 작은 과에서는 버스 하나 빌려서 학회를 가기도 하지만.
태화 의료원 내과 정도 되면 이런 대형 버스가 무려 석 대는 가야만 했다.
심지어 일부는 학회 기간 당직을 서고, 일부는 따로 내려가는데도 그러했다.
‘불쌍한 놈……. 하필 이현종 같은 독종한테 걸려서…….’
눈만 감으면 수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원장실에 불려 와서 발표를 달달 외워 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이현종이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수정해 주는 대본을 그 자리에서 덥석덥석 잘도 외웠다는 점이었다.
‘천재는 천재야.’
그리고 그 천재는 본인의 요청에 의해서 이현종과 같은 버스가 아닌, 제일 뒤 버스에 타 있었다.
‘하, 씨…….’
여기로 오면 더 이상의 지뢰는 없을 줄 알았던 수혁이었거늘.
[조태진을 생각 못 했군요.]
‘가는 내내 떠들게 생겼네……. 나 어제 당직 서느라 못 잤는데.’
뒤늦게 오던 조태진이 하필 딱 수혁이 세 번째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만 것이었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수혁에게 러브 콜을 부르게 된 조태진 교수였기에 두말할 것도 없이 수혁의 뒤를 따라 올라 버렸다.
교수들은 죄다 첫 번째 버스에 타라는 과장의 공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 수혁아. 이것 좀 먹어라. 이거 반숙인데, 맛이 죽여줘.”
“아, 네. 교수님.”
게다가 수혁은 최근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일종의 경원시 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노상 원장 아니면 과장이, 그것도 아니면 조태진이 싸고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왕따는 아니지만, 옆자리엔 앉기 싫은 그런 인간이라고 보면 되었다.
해서 수혁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고.
그 자리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조태진 교수의 몫이 되어 버렸다.
“이야. 달걀도 잘 까네. 너는 못 하는 게 뭐냐?”
“아……. 아뇨. 이건…….”
조태진은 말도 안 되는 구실까지 붙여 가며 수혁에게 칭찬을 늘어놓다가, 돌연 호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오는데 벨 소리가 병원 쪽 번호였기 때문이었다.
“아씨. 학회 가는 거 뻔히 알면서 전화야.”
비록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런데도 일단 전화를 찾아다 부리나케 받기는 했다.
대학 병원 교수를, 그중에서도 급한 환자들이 많은 혈액종양내과 교수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종의 숙명이자, 업이었다.
“혈종 조태진입니다.”
“교수님, 저 3년 차 김인수입니다.”
“아, 인수? 웬일이야? 우리 학회잖아. 너 왜 병원이냐?”
김인수라면 현재 3년 차 치프 아니던가.
다른 같은 연차 녀석들에 비해 똘똘하기도 하고, 또 열심이기도 해서 조태진이 꽤 이뻐하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목소리가 확실히 누그러들었다.
“저 오늘까지 당직 서고 내일 내려갑니다. 이번에는 발표가 없어서요.”
“아……. 3년 차라고 좀 쉬었구만.”
“네. 죄송합니다.”
“아니, 뭐. 근데 왜.”
“지금 응급실로 교수님께 팔로우 업 받는 환자분이 오셔서요. 김성원, 남자 42세, 골수섬유증(Myelofibrosis) 환자분인데 복통으로 오셔서, 아셔야 할 거 같아서 연락 드렸습니다. 교수님 지인분이라고 하는데, 맞나요?”
“아…….”
김성원이라면 조태진이 기억나지 않기가 어려운 환자였다.
바로 며칠 전에 외래로 찾아 왔던 환자였으니까.
아니, 그냥 환자가 아니라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아주 친하진 않았지만.
환자로 만나게 된 이후로는 가끔 만나서 점심이라도 한 끼 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연락이 20년 넘게 끊어졌다가 환자와 의사 관계로 만나게 된 것은 꽤 특이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골수섬유증이라는 게 그렇게 녹록한 병이 아니기도 했고.
“지인 맞아. 근데 복통으로 왔다고?”
“네.”
“음…….”
골수섬유증은 그 범위에 따라 여러 병을 지칭할 수 있는데, 김성원의 경우엔 특발성 골수섬유증이었다.
예후는 극히 좋지 못한 편에 속했는데, 김성원의 경우엔 앞으로 남은 기대 여명이 대략 5년가량밖에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뭐 또 안 좋은 거 생긴 건 아니겠지?’
조태진은 친구에 대한 걱정을 담아 김인수에게 물었다.
“뭐 검사한 거 있어?”
“일단 혈액 검사는 나갔고, 복부 CT 검사도 하려고 합니다.”
“어, 그래. 잘 생각했네. 그거 찍으면 바로 영상의학과 판독 좀 받아 둬.”
“근데 알아보니 오늘부터 3일간 복영 학회라 교수님들이 자리에 안 계신다고 합니다.”
“복영? 복부 영상의학회 학회야?”
“네.”
“이런.”
가을은 이게 문제였다.
여름 간 방학했던 학회들이 죄다 다시 개시되면서 간혹 이렇게 일정이 겹쳐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나라도 내려서 봐야 하나?’
뒤늦게 이런 후회도 들긴 했지만 이미 버스는 병원을 떠난 후였다.
더구나 조태진은 거의 도착하는 시간 즈음에 발표가 하나 있어서 내릴 수도 없었다.
“일단. 일단은 찍어야지. 찍어서 나한테라도 영상 보내. 알았지?”
“네.”
“뭐 다른 질환 명확하면 거기서 알아서 진행하고.”
“네, 교수님.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어, 그래. 고맙다.”
조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사이 수혁은 조태진과 김인수 사이의 통화를 토대로 바루다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특발성 골수섬유증이라?’
[정식 명칭은 만성 특발성 골수섬유증입니다.]
‘김성원이면 나도 아는 환자분인데.’
[데이터화했던 것 같습니다.]
수혁은 다른 분과들을 돌고 돌아 다시 혈액종양내과로 돌아온 참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다른 교수 밑으로 갔어야 했는데, 소문에 따르면 조태진 교수가 교수회의에서 바닥에 눕는 등의 기행을 보이는 바람에 또 조태진을 따라 돌고 있었다.
당연히 조태진의 외래에도 들어갔었고, 기억력이 아닌 데이터베이스화 하는 능력을 갖춘 수혁은 김성원에 대한 데이터 또한 가지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데 걸려서 뭔가 다른 거 아닌가 의심했었지?’
[네. 보통 50세 이후에 나타나는 드문 질환인데 환자는 젊으니까요.]
‘근데 다른 건 아니었어. 치료는 뭐 하고 있었지?’
본래 특발성 골수섬유증은 치료가 없는 병이었다.
치료가 필요 없어서는 아니었고, 방법이 없었다.
그때그때 증상에 맞춘 치료가 전부라고 보면 되었다.
즉 치료라기보다는 관리를 하다가 때가 되면 환자를 무력하게 보내야 하는 질환이라는 뜻이었다.
“수혁아, 너 김성원 환자 혹시 기억하니?”
바루다가 막 수혁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하려고 할 때쯤, 조태진이 말을 걸어왔다.
자연히 바루다는 입을 다물었고, 수혁은 조태진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네. 저번 주 교수님 외래에 왔었습니다.”
“그때도 복통 있었어?”
“간혹 있었다고는 했는데,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응급실로 왔다 이건데. 음.”
조태진은 혹시 자신이 뭘 놓친 건 아닌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동시에 수혁과 바루다 또한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심도 있는 토론에 들어갔다.
‘골수섬유증에서 복통이 가능한가?’
[가능은 하죠. 비장이 커지면 그로 인한 압박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 비장이 커지지 참.’
골수섬유증이란 골수가 섬유화되면서 제대로 된 피를 만들지 못하게 되는 병을 의미했다.
그렇다 보니 골수 외의 조혈 작용이 확 늘어나게 되는데, 그 조혈을 담당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비장이었다.
물론 이거로 치료되지는 않았으면 오히려 증상만 일으키는 경우가 더 많았다.
복부 팽만감이나, 복통이 주를 이루었는데 간혹 비장의 괴사 등과 같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아니지? 이 사람 그래서 비장 뗐는데?’
[기록상 1년 전에 비장 제거를 했군요. 그럼 비장으로 인한 복통은 아닙니다.]
‘뭐야 그럼.’
[환자 빈혈 증상에 대해 장기간 스테로이드를 쓴 병력이 있습니다.]
‘스테로이드라…….’
약간 마법의 비약처럼 쓰이는 약이라고 보면 되었다.
실제로 무척 다양한 병에서 결정적인 약으로 쓰이기도 했고.
심지어 이 약도 없는 골수섬유증에서도 빈혈에 대한 치료제로 쓰일 정도였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 부작용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특히 장기간 복용한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감염이 있으려나?”
그 비슷한 생각을 조태진도 떠올린 모양이었다.
스테로이드의 합병증 중 하나인 감염을 입에 올린 것을 보면.
마침 수혁도 사고 회로가 그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던 참이었어서 매우 격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네. 의심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검사 언제 되는 거야 이거. 궁금하네. 오.”
조태진이 막 투덜거리기 시작할 때쯤 그의 전화기가 울렸다.
그는 김인수가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전화를 받았다.
“어, 어떻게 됐어?”
“지금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내 드렸습니다. 혈액 검사 결과도 동봉했습니다.”
“CT 얘기하는 거지?”
“네.”
“네가 볼 땐 어떤데?”
“회장(Ileum)에 좁아지는 병변이 있고, 장간막 덩이들이 관찰됩니다. 결핵이 의심됩니다. 일단 영상의학과 당직도 그렇게 말은 했습니다.”
“말로 들어선 모르겠네.”
그건 수혁이나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김인수도 이렇게 말로 계속 이어나갈 생각은 없었다.
기껏 영상 찍어 놓고 말로 떠들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영상 보시고, 다시 연락 주십시오. 저희는 일단 환자분 증상에 대해서 처방 드리려고 합니다.”
“아……. 그래. 너무 고통스럽지 않게 좀 신경 써 줘.”
“네. 교수님.”
조태진은 그렇게 전화를 끊은 후 곧장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요새 발표하는 사람 치고 노트북도 없이 나다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어디 보자.”
조태진은 노트북으로 김인수가 보낸 동영상을 다운받은 후 재생시켰다.
역시나 센스쟁이답게 CT 영상을 쭉 스크롤 하는 장면을 카메라로 찍어서 보내 놓은 참이었다.
덕분에 조태진이나 수혁 그리고 바루다는 정말 병원에 있는 것처럼 영상을 똑똑히 살필 수 있었다.
“아……. 이게 이런 얘기였네.”
조태진은 환자의 회장 즉 소장이 대장으로 연결되는 부위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장들이 죄 좁아져 있었다.
주변으로는 덩이들이 놓여 있었고.
“결핵 맞네.”
누가 봐도 결핵을 떠올릴 수 있을 만한 병변이었다.
수혁이 보기에도 그랬다.
그래서 막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는데, 바루다가 끼어들었다.
[결핵이 아닙니다. 환자의 병력을 좀 더 고려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