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추계 (1)
“끝났다고요?”
대략 10분 만에 헉헉대며 뛰어온 흉부외과 펠로우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비록 나이가 좀 있긴 해도, 몸이 불편한 수혁보다는 아무래도 좀 행동이 빠른 이현종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수술 가운은 벗어 던진 지 오래였고, 이제 막 납복을 벗는 중이었다.
다리를 깽깽이걸음으로 뛰며 쩔쩔매고 있는 수혁과는 대조적이었다.
“어, 끝났어. 저기 보여? 마지막에 찍어 둔 거.”
“어…….”
흉부외과 펠로우 또한 심장에 관해서라면 전문가 아니겠는가.
모니터에 뜬 짤막한 동영상 정도는 한눈에 보자마자 뭐가 어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설마……. 그 상태에서 또 다른 혈관으로 들어가신 거예요? 그것도 저렇게 혈관이 꼬였는데?”
영상을 보아하니 펠로우는 아예 처음 보는 형태의 관상동맥이었다.
하나의 관상동맥에서 시작한 것이 세 갈래로 갈라져?
그것도 좌측으로 향하는 혈관은 위아래가 꼬이면서?
교과서에서는 아예 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펠로우의 목소리에는 힐난의 뜻이 잔뜩 담겨 있었다.
죽을 수도 있는데 그냥 감행했냐, 뭐 이런 뜻이었다.
“어, 아……. 자네는 이런 거 처음 보나 보지? 이게 1994년에 말이야.”
그런데 이현종은 아주 뻔뻔스러운 얼굴을 한 채 천연덕스러운 답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찌나 뻔뻔스러운지, 뒤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수혁으로서도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물론 바루다도 수혁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1994년? 설마?]
‘원장님…….’
[사기꾼인데요?]
‘그러게…….’
그렇다고 해서 수혁이 끼어드는 일은 없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었으니까.
“1994년이요? 그게 무슨…….”
이현종 교수조차 몰랐던 케이스였다.
이제 막 펠로우 2년 차가 된 사람이 알 리가 없었다.
수혁도 바루다 때문에 꾸역꾸역 데이터를 쌓지 않았다면 굳이 찾아볼 일이 없었을 테니.
“역시 모르는구만. 수술할 시간에 공부 좀 해.”
“어…….”
이현종은 어이없는 얼굴이 된 수혁을 뒤로 한 채 말을 이었다.
“어바인 대학교라고 있어. 엘에이 밑에. 알아?”
“아, 아뇨.”
“병원 이름도 좀 알고 그래야지. 아무튼, 거기서 1994년에 발표한 케이스가 있다고. 모털리티 케이스야.”
모털리티 케이스란, 살릴 수 있었던 환자가 죽은 케이스를 의미했다.
당연하게도 그 중요도는 상당했다.
때문에 펠로우도 아까보다는 표정이 조금이나마 달라졌다.
‘막무가내로 했다고만 들었는데…….’
원장도 모자라서 석좌 교수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병원 내에서 그 입지가 대단한 이현종이었지만.
적어도 흉부외과 쪽에서는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사실 옛날엔 순환기내과 쪽에서도 그랬다.
너무 무모하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그런데 케이스를 들먹이다니.
펠로우로서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때만 해도 내가 적극적으로 논문 발표하고 할 때가 아니라, 아직 스텐트 넣고 하는 게 보편화되지 않았단 말이야.”
이현종은 그런 펠로우를 보면서 허허 웃었다.
얼굴엔 자부심이 가득했는데, 그럴 만한 일이긴 했다.
전 세계적으로 스텐트 시술을 널리 퍼트린 장본인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심근경색 오면 무조건 열었는데……. 자네도 알지? 해부학적 변이 있으면 수술 난도 올라가는 거.”
“네.”
“게다가 이거 열고 어쩌고 하는 게 시간 보통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그……. 네.”
“그 케이스에서는 그렇게 하다가 죽었거든. 아 뭐 흉부외과 흉보는 게 아니고. 뭔 뜻인지 알지?”
“네.”
이현종은 눈앞에서 먹이고 있는 주제에 말은 이렇게 했다.
펠로우로서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상황이었다.
‘아니……. 저들이 하다가 사고 치면 뒷수습은 맨날 우리가 하는데…….’
심지어 지금 눈앞에 있는 이현종도 몇 번인가 부탁했더랬다.
심장을 다루는 순환기내과 의사라면 일종의 숙명 같은 일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얼굴을 하고 있다니.
괜히 이현종이 흉부외과의 공공의 적이 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케이스 해부랑 이 환자랑 정확히 같다 이거야. 돌연변이가 아니라 지극히 드문 해부학적 변이라 이거지.”
“어…….”
“그래서 미리 알고 들어간 거란 거야. 공부해 두면 이럴 때 다 도움이 된다고.”
“네…….”
“아무튼, 와 줘서 고맙고. 근데 환자는 우리가 살렸으니까 좀 쉬어도 돼. 여기 앉아 있다 가든지.”
이현종은 거기까지 말한 후 이수혁을 돌아보았다.
‘이 양반 보소?’
수혁은 정말이지 놀랜 얼굴이었다.
자기도 조금 전까지는 1994년이고 나발이고 하나도 몰랐던 주제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잘난 척을 해 댈 줄이야.
[머리가 좋긴 좋네요. 얘기를 아주 잘 짜 맞추시네.]
‘그러니까. 원장 안 됐으면 사기 쳤겠어.’
이현종은 수혁이 머릿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허허 웃었다.
벌써 펠로우는 자기 과로 돌아간 후였다.
“환자 중환자실로 옮기자.”
“네, 교수님. 인턴 샘, 저 좀 도와주세요.”
수혁은 그의 명에 따라 인턴과 함께 침대를 끌었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아무래도 침대 끄는 것도 좀 힘들었다.
이현종은 그제야 수혁을 도울 생각이 들었는지 침대 끄는 것을 거들었다.
끊임없이 입을 놀려 대면서였다.
“그리고…… 너 김진실 교수랑 뭐 시작했어?”
“아, 내년 연…… 아니, 연구 말씀이시죠?”
수혁은 연수 얘기를 꺼내려다가 인턴을 힐끔 돌아보고는 서둘러 말을 바꾸었다.
어차피 인턴이야 자세한 연유 따위는 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거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역시 세심하기까지.’
이미 콩깍지가 씌어 버린 이현종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좋아 보였다.
“그래.”
“실험 연구 하나를 제안해 드리긴 했습니다.”
“실험? 뭐. 아, 일단 환자 정리하고 계속 얘기하자.”
“네, 교수님.”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내과 중환자실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쿰쿰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러 들어왔다.
딱 보니 자리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는데, 베테랑들인 방사선사들이 이미 연락을 취해 둔 덕이었다.
이현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환자를 그쪽 자리에 위치시켰다.
“처방은 뭐 이렇게 내도록 하고. 어, 그래. 그렇게. 잘하네?”
그사이 주치의를 맡게 된 수혁은 빠르게 인공호흡 기기 정리를 함과 동시에 처방을 두두두 내렸다.
정말이지 ‘두두두’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걸 지켜 보고 있던 이현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내 밑에서 돈 적이 있나? 어떻게 내가 좋아하는 약만 쓰지?’
바루다의 분석 능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한 달간의 이현종의 처방을 비교 분석한 결과,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이현종의 취향에 맞는 처방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현종의 마음이 흡족해진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고 하면 이 정도였다.
“야, 수혁아.”
“네.”
“그 김진실 교수랑 하는 거 시간 좀 걸리지?”
“네? 음……. 실험 자체는 시간 걸리는 게 아니긴 한데, 김진실 교수님이 바쁘셔서요. 아마 겨울이나 되어야 같이 해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
이현종은 굳이 뭔 실험인지는 묻지 않았다.
‘김진실이면 뭐…… 논문 쓰는 기계잖아.’
원래 원조 영상의학과 기계였던 이하언이 나이 들고 보직 맡고 하면서 주춤하나 싶었는데, 바로 대체자가 나타나 버린 셈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뭐.’
논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는가.
이현종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번 추계에 발표 하나 만들자.”
“추계요?”
“그래. 아직 뭐 누구 초록 내라고 한 사람 없지? 1년 찬데.”
이현종은 혹시 모른다는 얼굴로 물었다.
1년 차한테 추계 학회 발표 주는 놈이 없을 거 같긴 하지만.
이수혁은 그냥 1년 차가 아니지 않은가.
신현태는 물론이고 조태진도 눈독 들이고 있는 녀석이었다.
“없습니다.”
“좋네. 그럼 이 케이스로 하나 만들자.”
“아…….”
수혁이나 바루다나 논문은 읽기나 해 봤지 써 본 적은 없지 않은가.
방금 케이스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감이 오질 않았다.
[뭔 논문일까요?]
‘케이스 리포트 아니겠어?’
[그거 교수 될 때 도움 많이 됩니까?]
‘아니……. 뭐 그렇겠냐? 케이스 리포트는 논문으로 안 쳐 주는 곳도 많아.’
학회 발표야 어떻게 해 볼 수는 있겠지만.
논문은 어불성설이었다.
수십 년 전에는 꽤 좋은 학회지들에서도 케이스 리포트를 정식 논문처럼 게재해 주기도 했지만.
이젠 시절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던가.
[그럼 괜히 고생만 하고 얻는 게 없겠군요. 노 합시다.]
‘미친. 원장님한테 어떻게 노를 해.’
[수혁이 노 하면 받아 주긴 할 겁니다.]
‘그건…….’
해서 둘은 이러쿵저러쿵 어떻게 하면 거절을 슬기롭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토의를 시작했다.
물론 이현종은 원래 그러하듯 남의 속내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나 해 댈 뿐이었다.
“1994년 논문 찾을 수 있는 거지? 그거 레퍼런스 삼아서 이게 돌연변이가 아닌 해부학적 변이다, 이렇게 가면 교과서 실리는 거야.”
“교과서요?”
그리고 그 말은 수혁에게 참으로 의외인 말이었다.
교과서라니.
[귀에 문제가 생겼나?]
‘아냐?’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럼 리얼 교과서?’
이현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수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교과서. NEJM 감이야 이거.”
“인용해도 고작 둘인데요?”
“해부학적 변이에 관한 내용이잖아. 그것도 한 번도 언급된 적 없는. 야, 나도 모르는 얘기야 이거. 이런 건 무조건 실리지.”
“와……. NEJM에……. 제가…….”
“그래. 너 교수 생각 있지? 그럼 무조건 도움이 되는 거야. 설령 뭐 카운트가 안 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무조건 도움 되지. NEJM이야. NEJM. 알지? 신현태는 아직 못 쓴 거. 이거 가서 이르지는 말고. 속이 좁아, 걔가. 생각보다.”
“네. 교수님. 무조건. 무조건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음…….”
이현종은 아까 시술하느라 빼 놓았던 손목시계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어 들었다.
그리곤 재차 수혁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수혁의 다리와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였다.
“10분. 10분 뒤에 내 방에서 보자. 바로 초록 써서 추계 내지, 뭐.”
“네? 바로요?”
“얘기 나온 김에 바로 쓰지 뭐.”
“초록을…….”
“어려운 거 아냐. 너도 한 번 보면 할 수 있을걸? 아무튼, 이따 봐.”
“아, 네. 알겠습니다. 원장님.”
수혁은 멀어져 가는 원장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NEJM이라…….’
아직 터무니없이 멀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계 최고의 의사에 조금은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