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저대로 두면 죽겠는데 (1)
“아, 하하. 감사합니다.”
수혁은 예기치 않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고는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곤 이현종 원장의 주말 PBL 숙제에 대한 강의를 짤막하게 들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20분 정도밖에 안 되었다.
수혁의 강의가 예정보다 더 길어진 탓이었다.
하지만 이현종을 비롯해 누구도 수혁을 탓하진 않았다.
그의 강의는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심지어 재미도 있었고.
“야, 수혁아.”
“네.”
이현종은 강의를 빠르게 마친 후,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혁을 향해 말을 걸었다.
수혁은 애초부터 모든 신경을 이현종에게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답은 즉각 나왔다.
“너 오늘 진짜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빈말이 아니고, 재능이 있어. 그냥 환자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래. 사람 가르치고 발표하는 거에.”
“감사합니다, 교수님.”
“춘계는 이미 지나갔으니까, 됐고. 어때, 추계에 발표 하나 해 보는 게. 저기 그 뭐야. 그래. 김진실 교수랑 뭐 한다며. 그거 발표해 보지.”
“아…….”
수혁은 그제야 김진실 교수와의 공동 연구를 떠올릴 수 있었다.
‘간암에 대해 뭔가 하자고 했었는데…….’
아직 아이디어를 내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정 안 되겠으면 김진실 교수가 주겠다고 하긴 했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바루다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꼭 스스로 아이디어를 내어서, 연구에도 역량이 있음을 증명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수혁으로서는 무조건 좋은 일이었기에 그냥 두고 있었고.
“한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바루다가 저토록 벼르고 있다면 뭐가 나와도 나올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수혁은 제법 자신 있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이현종 원장의 마음에 든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좋아. 그거 그냥 혼자 낑낑대지 말고 저기 신현태……. 아니. 걔는 란셋밖에 못 냈거든. 나쁘지 않은 곳이긴 하지만……. 알지?”
“아, 네…….”
사실 란셋 정도면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학회지라고 보면 되었다.
실제로 거기 낸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NEJM 뽕에 심취해 있는 이현종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NEJM만 진짜 학회지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 그거 초록은 나랑 같이 써. 뭐 내가 소화기 교수는 아니지만……. 대강은 알거든.”
아마 대강이 아니라 어지간한 교수만큼은 알고 있을 터였다.
수혁이 바루다에 의한 후천적 천재라고 한다면, 이현종은 진짜 천재였으니까.
“네, 교수님.”
“어우, 이젠 좀 덥네, 걸으니까.”
이현종은 병원 1층 뒷문으로 들어서면서 중얼거렸다.
그 잠깐 사이에 난 땀 때문인지 뭔지 에어컨 바람이 더더욱 시원하게 느껴졌다.
“그렇네요. 여름인가 봅니다.”
“여름이 좋은 계절이야. 나처럼 심장 보는 사람한테는 특히 그렇지.”
“아……. 확실히 심장 질환이 줄겠죠?”
“그럼. 확 줄지.”
둘은 뒷문에서 병원 메인 복도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걸어가면서 계속 대화를 나눴다.
환자들이나 보호자들은 걸어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이 길은 바로 의대와 기숙사 및 동물 실험실, 조교수 연구실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제법 후미진 곳에 있었으니까.
때문에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죄다 의사들뿐이었다.
“야야. 저거 봐라. 원장님이랑 완전 다정하지?”
“저게 그냥 이쁨받는 거라고? 김진용 이 새끼 진짜 미쳤나.”
“와……. 나 그 새끼 말 믿고 쟤 노티 씹을 뻔했네. 와……. 좆될 뻔했네, 진짜…….”
그리고 그들 중에는 내과 3년 차들도 대거 끼어 있었다.
이제 슬슬 논문을 내긴 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부리나케 실험실이나 조교수 연구실을 들락거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3년을 죽도록 고생을 했는데 논문이 없어서 전문의 시험을 못 치르게 된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 억울한 일 아니겠는가.
“안녕하십니까! 원장님!”
그들은 그렇게 수군거리다가 바로 앞으로 다가온 이현종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이현종은 늘 그렇듯 너무 따뜻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미온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확실히 수혁을 대할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대응이었다.
“어, 수고한다.”
“네, 교수님!”
덕분에 김진용과 황선우 등에 의해 슬금슬금 퍼져 나가던 이수혁 흙수저 설은 다시금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또 다른 오해를 쌓은 둘은 계속해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환자분!”
“응?”
그리고 우측에서 들려온 고함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응급실이 있는 곳이었다.
“파이팅 넘치는 친구가 내려왔나 보네. 목소리가 쩌렁쩌렁해, 아주.”
원장은 잠시 그곳에 멈추어 선 채 중얼거렸다.
원장이라 엄청 바쁠 줄 알았는데, 매일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수혁이라고 해서 원장과 같이 걷는 것보다 중요한 일정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이현종 옆에 나란히 멈추어 섰다.
타닥.
그렇지 않아도 지팡이를 짚은 채 성질 급한 이현종 걸음에 맞춰 걷느라 힘든 참이었던지라 잘됐다 싶기도 했다.
“환자분! 이거 멘탈 완전 나갔는데! MRI실 연락된 건가!”
그사이 환자의 상태가 더 나빠진 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데 이제야 발견을 한 건지는 몰라도 고함의 다급함은 더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다다다다!
그와 동시에 인턴과 응급실 레지던트들이 고함이 들려온 곳을 향해 달렸다.
그냥 걸어가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처치실…….’
응급실로 온 환자 중에서도 특히 상태가 안 좋은 환자들을 보는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게다가 그곳을 향해 여러 의사가 부리나케 달려갔다?
거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둘 수 있었다.
드르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가 누운 침대가 여러 의사 손에 이끌린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환자의 목에는 튜브가 박혀 있었고, 인턴으로 보이는 녀석이 인공호흡 주머니를 죽어라 짜고 있었다.
‘의식이 없어. 자발 호흡도 없고.’
[MRI는 아무래도 Brain MRI를 말하는 걸 겁니다.]
‘의식 소실을 동반하는 뇌혈관 질환이라.’
[예후는 무척 나쁘겠군요.]
수혁과 바루다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사이 이현종도 입을 열었다.
“지금 MRI실 가는 건가?”
뭔가 좀 마음에 안 든다는 투였다.
자연히 수혁의 고개가 이현종을 향해 돌아갔다.
“네, 아마도. 머리 쪽 찍을 거 같습니다. 방금 뛰어간……. 아까 그 소리치던 사람 얼굴은 아는데, 신경과 선생님입니다.”
“아, 신경과 레지던트. 음.”
“왜……. 그러시죠?”
“아니, 그냥 감이 안 좋아서.”
“네?”
“내가 지금 회의만 아니면 가서 한번 보고 싶은데……. 음…….”
이현종은 멀어져 가는 환자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수혁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가서 좀 봐.”
“네? 제가요? 이미 신경과로…… 노티가 넘어간 환자 같은데요?”
“응. 그래도 좀 봐. 내 이름 팔아. 그럼 애들 말 잘 들어.”
맞는 말이긴 했다.
원장이 시켰다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하겠는가.
게다가 이 말을 수혁이 하게 되는 순간 그 위력은 배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는 이현종의 숨겨 둔 아들이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환자 상황에 대해서도 알려드릴까요?”
“응. 회의 들어가니까. 그냥 신경과에서 봐도 되는 거면 노티하지 말고. 좀 이상하다 싶으면 불러.”
“회의신데 그래도 괜찮나요?”
“돈 얘기라 재미없어. 나오면 나는 좋아.”
부원장과 내과 과장 신현태는 괴롭게 되겠지만.
그건 이현종이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원장이 할 일은 그저 얼굴마담일 뿐이라고 딱 정해 놓고 있는 위인이었기에 그러했다.
“아, 네…….”
수혁은 이 병원이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환자는 점점 더 멀어져서, 이제는 MRI 안으로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본 이현종은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댔다.
“인사 그만하고, 얼른 가 봐.”
“네, 교수님.”
“이상하면 꼭 연락해. 꼭 순환기 아니더라도.”
“네.”
이현종은 뭔가 재미난 일이 생기길 바라기라도 한다는 듯한 얼굴로 휘적휘적 복도를 향해 걸어 나갔다.
수혁은 그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MRI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타닥.
타닥.
지팡이 소리를 내면서.
생각 같아서는 후다닥 달려가고 싶었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익숙해지지는 못한 참이었다.
아마 익숙해진다고 해도 달리는 것까지는 못하겠지만.
‘왜 교수님이 가서 보라고 한 거지? 무슨 근거가 있으신가?’
어차피 느려 터진 걸음.
수혁은 가는 길에 생각이나 정리해 볼 요량으로 바루다에게 말을 걸었다.
바루다 또한 이현종의 발언을 분석 중이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결과를 얻어내진 못한 모양이었다.
[이현종 원장이 발화했던 당시, 수혁의 시각 정보를 저장한 것입니다.]
‘오.’
수혁은 마치 사진처럼 나타난 당시 장면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환자에 대해 보이는 건 심장박동 수, 62회. 약간의 노이즈가 있군요. 이동에 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혈압이……. 이게 뒷자리가 잘렸네요.]
‘안 보이네 하나도?’
[두 자리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수축기 혈압이 100이 안 된다는 뜻인데, 의식 소실 상황에서는 드문 일은 아닙니다.]
‘호흡이야 짜고 있었고……. 포화도야 당연히 100이고. 뭘 보신 거지?’
[정말로 감일 가능성이 더 크겠습니다.]
‘감이라.’
수혁의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이현종 같은 진짜배기 내과 의사가 감이라는 이상한 말을 쓰다니.
‘하긴 이현종 교수님이 괴짜긴 하시지……‘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이현종이니까 그럴 수 있단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 사람은 진짜로 꽤 이상한 사람이긴 했으니까.
똑똑.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수혁은 어렵사리 MRI 촬영실 앞에 도달했다.
해서 노크를 한 후,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는 전에 봤던 신경과 레지던트 그리고 방사선사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어? 이수혁 선생?”
방사선 괴사를 진단할 때 당시 수혁의 활약이 워낙 대단했던 터라 신경과 레지던트도 수혁을 아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덕분에 수혁은 딱히 이현종을 팔지 않고도 아주 자연스럽게 끼어 들어갈 수 있었다.
“아, 네. 지나가다가 봤는데 뭔가 좀 급해 보여서요.”
“그렇구나. 네, 환자가……. 의식 소실로 왔는데, 보통 이러면 예후가 안 좋거든요. 경색이나 출혈로 의식이 흔들려 버리면…….”
대개 영구 후유증이 남게 마련이었다.
그대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엄청 많았고.
당연하게도 신경과 레지던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비록 응급실 내려와서 본, 이름도 얼굴로 익숙지 않은 환자긴 했지만.
아무튼, 자기에게 주어진 환자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 예상되는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영상 넘어옵니다.”
그런 레지던트를 향해 방사선사가 말을 걸었다.
화면을 가리키면서였다.
워낙 영상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즉시 고개를 돌렸다.
“음. 경색이…… 있네. 아, 이런……. 망할.”
그리곤 환자의 뇌경색 소견을 보며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어 댔다.
수혁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네요. 음.”
이현종에게 연락할 일은 없겠단 판단을 하면서였다.
하지만 바루다의 의견은 좀 달랐다.
[뇌경색은 있지만, 의식 소실의 원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응? 무슨 소리야?’
[수혁, 잘 보십시오. 범위가 너무 작습니다. 저 정도 뇌경색으로는 의식 소실이 오지 않습니다.]
‘어?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