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환자나 보자 (1)
“하, 시발.”
수혁은 지금 태화 의료원 지하 2층 구석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라 잃은 충의지사라도 되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였다.
[아, 이게 빗나가네.]
바루다는 마치 남 얘기를 하듯이 심드렁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당연하게도 수혁으로서는 열불이 터질 수밖에 없는 반응이었다.
‘아, 이게 빗나가? 이 개새꺄! 분위기 좋았는데! 거기서! 거기서 네가 손만 잡으라고 안 했으면…… 아오…….’
[그러니까요. 근데 왜 안 됐을까? 이상하네요. 제 분석은 완벽했는데. 이 오류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바루다는 여전히 냉철한 말투를 유지하고 있었다. 상당히 분석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도 했고.
일부러 그러는 거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바루다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는 수혁을 더더욱 열 받게 하기엔 충분했다.
수혁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아마 오늘 밤 이불이 찢어질지도 모를 터였다.
‘이……. 이 새끼 이거. 아오…….’
어떻게 하면 이 녀석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만 드는데, 환장할 노릇인 점은 방법이 아예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가장 단단하게 보호되고 있는 머릿속에 있는 새끼였으니까.
때리고 오만 야단법석을 피운다 해도 수혁이 더 괴롭게 될 공산이 컸다.
‘이……. 아……. 앞으로 교수님 얼굴 어떻게 보지.’
[제가 수혁의 기억을 들여다보니, 한 가지 지금 상황에 아주 적절한 말이 있던데.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니!’
수혁은 바루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절했다.
어차피 또 사람 속 뒤집어 놓을 소리인 게 뻔했다.
물론 바루다는 수혁이 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듣는 놈은 아니었다.
[그냥 하겠습니다.]
‘하지 마, 새꺄! 하지 마!’
[주식 투자 실패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어떻습니까. 아주 적절하죠?]
바루다는 다른 학계의 정설까지 예로 들어 가며 수혁을 놀리는 데 힘썼다.
‘와……. 이거 어떻게 부수지.’
[못 부숩니다. 신경외과 쪽 협진 결과를 보시면…….]
‘그만해 새꺄……. 음?’
수혁은 머리카락을 다 뽑을 듯한 기세로 머리를 쥐어짜고 있다가 바지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핸드폰 진동이었다.
당직은 아니지 않은가.
따로 전화 올 일은 없으니, 생각나는 발신인은 하나뿐이었다.
‘어, 답장 온 건가?’
수혁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핸드폰을 부리나케 꺼냈다.
<아까 정말 손에 모기가 있어서 잡은 거예요. 정말이에요.>
스스로 생각해도 개소리란 말만 떠오르는 문자를 보내지 않았던가.
잘도 이런 문자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만 들게 하는 그런 문자였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수혁은 긍정적인 사람이었으니까.
‘제발 하윤이! 제발!’
[성 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진 주제에…….]
‘넌 닥쳐!’
아무래도 손이 떨리다 보니 핸드폰 꺼내는 것도 일이었다.
[외과 안 하길 천만다행이네요. 이건 뭐, 어후.]
‘하.’
수혁은 이제 닥치란 말 하기도 지쳤는지 한숨만 쉬고는 핸드폰을 꺼냈다.
정말로 발신인은 우하윤이었다.
‘제발 쌍욕은 아니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자를 열었을 때, 수혁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미안해요, 그러신 줄도 모르고. 저도 너무 놀라서…….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왔어요. 미안해서 어쩌죠? 다음에 제가 밥 한번 살게요.>
조금 부끄러운 얘기였지만.
수혁이 살면서 지금까지 이성에게 받아 온 문자 중 제일 친절한 편에 속하는 문자였다.
가끔 동기들이 모솔이라고 놀릴 땐 아니라고 발끈했지만.
그가 그렇게 발끈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심지어 밥을 산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그, 그린라이트? 그린라이트지, 이거?’
이미 수혁의 머릿속에서는 손자의 손자까지 보는 중이었다.
[예의가 참 바른 사람이군요.]
‘지랄 말고. 잘난 분석이나 해 봐.’
[얼굴을 봐야 가능한데……. 지금은 어렵습니다.]
바루다의 말을 듣던 수혁이 됐다는 기색으로 고개를 저어 댔다.
‘아니다……. 어차피 백날 틀리겠지. 널 믿은 내가 바보지…….’
[방금 그 발언은 수용하기 어려운데요?]
‘틀렸잖아?’
[그 오류가 어디서 발생했는지 지금 분석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는 틀릴 일 없습니다.]
‘그. 그래?’
이번에야 틀렸다지만.
사실 감정 분석이 제대로만 된다면 앞으로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긴 할 것 같았다.
비단 연애에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교수를 향해 나아감에 있어서도.
더 나아가 교수로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도.
이놈의 지랄 맞은 언행을 참아 주기 위해서라도 뭔가 더 유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이 있다면 그게 공평한 처사일 것 같았다.
해서 수혁은 솔깃한 표정이 되어 바루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수혁의 기억을 분석하여 데이터를 쌓고 있음은 알고 계실 겁니다.]
‘알지. 그것 때문에 아주 환장하겠어.’
대체 왜 의학 지식이 아닌 다른 기억까지 헤집어 놓느냐고 하니, 그게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 등 오감과 관련한 데이터를 쌓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그게 앞으로의 진단의 정확성을 올릴 수 있다는데.
수혁으로서는 감수해야만 하는 불편인 셈이었다.
해서 일단 잘 때만 만지라고 해 둔 참이었다.
[이번 남녀 간의 연애 감정에서 제가 레퍼런스로 삼은 대상은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 「성균관 스캔들」, 「시크릿 가든」, 「도깨비」입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어쩐지 굉장히 상처받는 대화로 이어질 거 같은데? 하지 말아 줄래?’
[계속하겠습니다.]
‘아니, 그만해도 될 거 같아.’
수혁은 계속 머리를 흔들었지만 바루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자 주인공은 각각 정해인, 송중기, 현빈, 공유입니다.]
‘그만……. 제발 그만…….’
[시뮬레이션 결과 넷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매력을 수혁이 지니고 있었다면 오늘 하윤은 가지 않았습니다.]
‘제발 닥쳐…….’
[이번 사건을 교훈 삼아…….]
‘이게 사건씩이나 되냐?’
[입건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아, 하긴.’
그나마 하윤이 착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수혁은 병원 지하 2층이 아니라 구치소에 주저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아무 사이도 아닌 놈이 손을 덥석 잡았으니까.
[아무튼, 교훈 삼아 앞으로는 수혁을 기준으로 분석하도록 하겠습니다.]
‘흠…….’
[아무래도 최대한 보수적인 분석을 시행해야 할 거 같습니다. 아주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일단 답장부터 보내시죠.]
‘아, 맞네.’
수혁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화를 내다가 돌연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루다는 참 쉬운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렸으나 굳이 발언하진 않았다.
여기서 더 감정이 격해지면 건강에 해가 될 것 같아서였다.
이미 충분히 해가 될 정도로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수혁은 느릿느릿 문자를 적기 시작했다.
<고마워. 사…….>
[미쳤습니까?]
‘손이 미끄러진 거야. 진짜.’
[지랄…….]
‘욕은 또 어디서, 아니다. 아냐, 답변하지 마. 입 씰룩거리지 말라고.’
어차피 또 수혁에게 배웠다고 할 것이 뻔하지 않은가.
수혁은 무용한 입씨름을 하는 대신 썼던 것을 다시 지운 후, 재차 문자를 작성했다.
<어, 아니에요.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죠. 밥은 그냥 제가 살게요. 선배니까. 아마 다음 달 첫째 주쯤 시간이 날 거 같은데, 괜찮나요?>
[밥 먹자는 건 진짜 예의상 한 말 같은데. 그걸 또 진지하게 받으시네.]
‘초치지 마. 보낼 거야. 보낸다.’
[마음대로 하십쇼. 대신 상처받고 공부 안 하는 짓만 안 하시면 됩니다.]
‘내가 그럴 거 같아?’
[정확히 5년 2개월 11일 전…….]
‘아아, 그만!’
수혁은 아직도 가끔 자다 생각나면 이불 차는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다 그만 문자를 보내고야 말았는데, 어차피 보낼 생각이었으니 별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달 첫째 주 토요일에 뵙는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선배님.>
다행히 답문은 제법 성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휴. 진짜 좆되는 줄 알았네……. 휴…….’
[좆된 거 아닌가요? 첫 만남에 그런 식으로 헤어졌으면.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 너는……. 너는 정말…….’
[아무튼, 시간이 남았군요. 어쩌실 겁니까? 이대로 허송세월? 아니면 공부?]
묘하게 울컥하게 만드는 말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약속이 사라진 토요일 저녁에 할 일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기는 했다.
슬픈 일이었지만 다른 동기들도 1년 차 아니던가.
따로 만날 사람이 정말이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혼자……. 맛있는 거 먹고 공부…….’
[이것 참. 아주 훌륭하십니다.]
‘하아…….’
수혁은 잠시 한숨을 쉰 후, 배달 앱을 켰다.
보통 1인분만 시키면 배달 안 해 주는 집이 쌔고 쌘 것이 현실이었지만.
병원 근처의 배달 음식점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하나만 시키는 놈들이 한 곳에 죄 몰려 있었으니까.
한 번에 몰아서 갖다 주면 될 일이었다.
게다가 스트레스가 잔뜩 쌓여 있는 레지던트들은 대개 폭식을 해 대기 마련이었다.
‘간짜장에 탕수육에 군만두.’
[벌크업 하십니까?]
‘시끄러워……. 언제 이런 거 먹어 보겠어, 또. 한동안 병원 밥이나 먹어야 될 텐데.’
[하긴 부실하긴 합니다. 인정합니다.]
‘웬일이냐?’
[전 맞는 말만 하는 바루다이니까요.]
‘에이.’
수혁은 고개를 한 번 저어 대고는 음식을 시켰다.
왜 요리를 이렇게 시키는데 짜장면은 한 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병원 근처 배달 음식점으로서 경험을 쌓아 온 집다웠다.
후루룩,
[흠……. 이게 짜장면의 맛이로군요. 흠…….]
그렇게 배달되어 온 짜장면을 후룹 먹고 있으려니, 바루다가 뭔가 아주 만족스러워 보이는 투의 발언을 했다.
‘뭐야, 너 맛이 느껴져? 아, 느껴진다고 했지?’
[네. 그런데 이건 꽤 좋군요. 병원 밥에 비하면…….]
‘그래, 그렇다니까? 병원 밥은 쓰레기야.’
[확실히, 인정합니다. 쓰레기였네요.]
‘자, 그걸 알았으면. 이제 내가 부자가 될 수 있게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 봐.’
[얘기가 왜 그렇게 이어집니까?]
수혁은 당황한 듯한 바루다를 향해 말을 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면서였다.
그 바람에 입안에 들어 있던 면발이 조금 튀어나오긴 했지만.
수혁이나 바루다나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이런 거 계속 먹으려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거 아냐.’
[하아…….]
‘왜.’
[어쩐지 한심하지만. 인정합니다. 짜장면 훌륭합니다.]
‘새끼. 다음 주에는 치킨 먹어 줄게.’
[치킨?]
‘환장할 거다. 이것보다 더 맛있어, 인마.’
[그게 가능합니까?]
‘그렇다니까. 돈만 많이 벌어 봐라. 내가 진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