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이건 좀 어려운데? (1)
혈종.
일명 혈액종양내과.
처음에는 그저 한 개의 분과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내과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과였다.
암이 현대 의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입원 환자분들은 오히려 너보다 더 병원에 익숙하신 경우가 많거든? 그러니까 대할 때 주의하도록 해.”
치프 레지던트 김인수가 환자 명단을 죽 훑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뒤에 선 수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어차피 다 숙지하고 있는 사항인데 뭐 하러 듣고 있습니까?]
바루다는 그새를 참지 못하고 수혁에게 딴지를 걸어 왔다.
‘미친놈아, 그럼 3년 차한테 닥치라고 하리?’
수혁은 아직 인간의 위계질서나 서열 따위는 고려 대상에 두지 않는 바루다를 향해 한 마디 했다.
[좀 더 순화해서 들려주면 들을 것도 같습니다. 뭐하면 제가 할까요?]
‘아니거든……. 절대 하지 마.’
사실 수혁은 바루다의 모든 말을 들으면서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바루다와 대화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심력 소모가 있었으니까.
“항암 치료 사이클 돌리시러 입원하는 분들은……. 약만 제대로 들어가면 사실 뭐 크게 어려울 건 없어. 합병증 발생하면 큰일이긴 한데, 조태진 교수님이 워낙 그쪽 방면으로는 연구 많이 하셔서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김인수는 교수를 꿈꾸고 있는 사람인 만큼 티칭 마인드가 제법 뛰어난 사람이었다.
덕분에 아래 연차 중 김인수를 퍽 좋아하는 사람들도 적진 않았다.
보통 위 연차들은 자기 올챙이 적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저 까대기만 하는데, 이 사람은 그래도 어지간히 가르친 다음에 혼냈으니까.
물론 지금 수혁을 두고 가르치는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한 적은 없긴 했다.
‘로열이라 이거지.’
대체 얼마나 뒷배가 든든해야 혈액종양내과 조태진 교수가 직접 찾아와서 주말 하루는 비워 주라는 말을 할까.
기껏해야 집 좀 사는 수준에 불과한 김인수로서는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문제는 이제 항암 치료 도중에 오시는 분들이야.”
“네, 선생님.”
“이런 경우에는 면역 결핍 문제도 있고……. 항암제 부작용 때문에 오시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재발해서 오시는 분도 있거든? 전이가 있거나 해서.”
“네.”
“지금 당장 입원해 계시는 분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플랜이 서 있으니까 괜찮을 텐데…….”
김인수는 스크롤을 죽죽 내렸다.
조태진 교수 앞으로 입원한 환자의 수는 모두 21명이었는데, 그중 중환자실에 있는 환자들을 제외하면 17명이었다.
그중 7명을 수혁에게 넘겨 줄 참이었는데, 당연하게도 로열에 대한 예우가 가득 담겨 있었다.
거의 반복 처방만 하면 되는 그런 환자들이란 뜻이었다.
[너무 쉬운 환자들뿐입니다. 연습이 되지 않습니다.]
‘흐음……. 진짜 그렇긴 하네.’
상당히 노골적인 편이었다. 너무 다루기 쉬운 환자들만 담당하게 하는 느낌이 진하게 들었다.
되도록 쉽게 가고 싶은 수혁마저 불만을 품을 지경이었다.
바루다 말처럼 환자 가지고 ‘연습’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려운 환자를 봐야 공부도 하게 되지 않겠는가.
괜히 교수들이 ‘최고의 스승은 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게 아니었다.
“응급실 통해서 오는 환자들은 좀 어려울 거야.”
하지만 어차피 응급실이나 외래를 통해서도 계속 입원을 하긴 할 터였다.
그리고 그 환자들은 발열 또는 기타 증상에 대한 원인을 찾는 거 자체가 굉장히 어려울 게 틀림없었다.
해서 김인수는 걱정 어린 눈을 한 채, 자신이 입국한 이래 최고 로열로 생각되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4월부터 혈종…… 솔직히 좀 빡센데…… 억지로라도 스케줄을 바꾸라고 할 걸 그랬나.’
물론 수혁은 전혀 딴생각 중이었다.
바루다 또한 그랬다.
[오늘 당직입니다. 될 수 있으면 어려운 환자가 오면 좋겠군요.]
‘하…….’
[왜 그러십니까?]
‘나도 그러길 바라고 있다는 게 참……. 이상해서 그런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정신 세계가 무너져 버린 걸까.
다른 1년 차 모두 당직 때 환자 안 오기만 바라고 있을 텐데.
누구라도 이런 말을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 터였다.
‘아니지, 그 정도가 아냐. 이러고 있는 거 들키면 진짜 맞아 뒈질 거야…….’
[그렇진 않을 겁니다.]
‘네가 뭘 알아.’
[누구 덕에 100일 당직 풀렸는데요.]
‘아, 하긴. 그건……. 그렇긴 하네.’
100일 당직.
비단 내과에만 있는 관습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과는 1년 차 첫 백 일 동안 병원에서 아예 못 나가게 하는 이 풍습을 굳이 유지하고 있었다.
괜히 나갔다가 콧바람 들면 도망치고 싶어진다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뭐, 어차피 전공의 주 88시간 근무 때문에 100일 당직 없어져야 했기는 했는데…….’
[그래도 다들 고마워하고 있긴 할 겁니다.]
‘다행이지 뭐.’
절대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판은 늘 중요한 편이었다.
특히 동기들 사이의 평판이 가장 정확한 만큼, 이를 신뢰하는 조직이 꽤 많았다.
“아무튼, 지금 입원해 있는 환자들 처방은 그냥 리피트(Repeat: 재처방) 하면 되고, 아니면 루틴 처방 따라가면 돼.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음.”
김인수는 자기에게 전화하라고 하려다, 금일 오전에 만났던 조태진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 걔가 그렇게 똑똑하다며. 나도 노티 한번 받아 보자. 진짜 그런가, 한번 보게.
확실히 내과 교수들은 다른 과 교수들보다는 아무래도 학자 태가 나는 편이었다.
아마 외과였으면 그냥 3년 차에게 다 맡겼을 텐데.
굳이 확인해 보겠다고 나서지 않는가.
“처방 관련한 거는 나한테 묻고. 응급실 환자 노티할 일 있으면…… 그건 조태진 교수님한테 직접 해.”
“네? 그렇게…… 해도 되나요?”
“감염 돌 때도 내내 그렇게 했다며.”
“그건…….”
“조 교수님 지시 사항이야. 그렇게 하면 돼.”
“아, 알겠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럼 난 간다……. 무탈한 밤 보내라.”
김인수는 터덜터덜 걸어 의국 옆에 마련된 3년 차 전용 당직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어깨가 처져 있군요. 거북목을 의심해 볼 수 있겠습니다.]
바루다는 평소처럼 지랄병이 도져서 대번에 진단명을 도출해 냈다.
이에 수혁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 댔다.
‘그런 거 아닐걸. 아직 논문 못 내서 그래.’
[논문이요?]
‘전문의 따려면 1저자 하나는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근데 아직 학술지에서 요구한 수정 사항을 못 맞추셨대.’
[흐음.]
바루다는 별다른 말 없이 침묵을 삼켰다.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벌써 심장이 벌렁대는 것을 느꼈다.
그 지랄 맞은 알람 소리를 내기 전에 꼭 이런 발언을 했던 것 같았으니까.
‘그 소리 낼 때마다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하루빨리 논문거리를 찾아야겠군요.]
‘이제 1년 차 4월이거든?’
[어영부영하다가 3년 차 되는 겁니다.]
‘웃기지……. 아.’
수혁은 그대로 바루다와 입씨름을 이어 나가려다가 가운 호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부우우웅.
치프 회진 시간이라 진동으로 해 놓았던 핸드폰이 사납게 울리고 있었다.
‘3777…….’
응급실이었다.
환자가 오기를 바라긴 했지만.
설마하니 치프 선생님이 가자마자 전화가 올 줄이야.
기도를 해도 너무 세게 했나 생각이 들었다.
[빨리 받으십시오.]
물론 수혁은 오래 상념에 빠져 있지는 못했다.
바루다가 빨리 전화를 받으라고 안달복달했으니까.
“네, 내과 1년 차 이수혁입니다.”
“아, 선생님. 비인두암으로 본원에서 3개월 전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은 남자 52세 환자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비인두암.
코 뒤의, 비인두라 불리는 공간에 생기는 암이었다.
보통 수술 없이 항암 방사선 치료만으로도 잘 회복되는 암이기도 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네. 어떤 거 때문에 오신 거예요?”
“그…… 갑자기 발생한 사지 마비로 오셨습니다.”
“사지…… 마비요?”
비인두암이 야기할 수 있는 증상은 제법 많았다.
코피부터 두통, 통증 등등.
하지만 사지 마비라니?
이건 좀 뜬금없는 증상이라 할 수 있었다.
수혁의 목소리에서 의문을 느꼈는지, 인턴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때문에 머리 쪽 문제 배제하기 위해 신경과 노티 드렸고, 지금 내려와서 검진 중입니다.”
“아……. 그래도 일단 저희 과 다니시는 분이니까 한번 확인해 달라 이거죠?”
“네, 그렇습니다.”
“네. 내려갈게요.”
기대했던 것만큼 어려운 환자는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신경과에서 이것저것 검진한 후, 머리 MRI를 찍고 신경과로 입원시킬 것이 분명했다.
혈액종양내과에서는 협진 형식으로 환자를 보게 될 테고.
그렇게 생각하며 1층에 내려선 수혁은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
바루다 또한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말이 없었다.
“환자 어딨죠?”
수혁의 말에 방금 그에게 연락한 것으로 보이는 인턴이 복도 쪽을 가리켰다.
이송 요원의 손에 이끌려 MRI실 쪽으로 이송 중인 침대가 보였다.
그 위에 누운 비쩍 마른 환자도 보였고.
“아, 고마워요.”
수혁은 그리 말한 후, 침대를 따라잡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타닥.
타닥.
지팡이를 짚는 거 자체가 익숙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수혁은 환자가 이미 검사실에 들어간 후에야 MRI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이제 더 인턴이 아니라 레지던트란 점이었다.
덕분에 별 제지 없이 방사선사가 있는 촬영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내과 선생님?”
안에는 미리 내려와 있던 신경과 레지던트가 있었다.
아마 다른 학교 출신인지 수혁으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네, 선생님.”
“그…… 지금 연락 안 해도 된다고 말해 놨는데, 인턴이 전화했나 보네요. 4월이라…… 너무 화내진 마세요.”
“아닙니다. 머리 쪽이라고 확신하고 계시나 보네요?”
“네. 검진상, 사지 위약 및 감각 소실이 너무 명확해요. 증상 발생 시점도 굉장히 갑작스럽고…… 혈종 원인은 아닐 겁니다.”
“그렇군요.”
“다만 의식이 있는 게 좀 이상하긴 한데……. 뭐 그럴 수도 있긴 하니까요.”
뇌경색 또는 뇌출혈이 아주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경우, 사지 위약.
즉 전신 마비가 나타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생겼다고 하면 역시 그렇겠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검사 확인은 필요합니다.]
‘그렇겠…… 아, 넘어오네.’
MRI 검사실에서 촬영된 영상이 실시간으로 방사선사가 있는 곳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신경과 레지던트도 수혁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해당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데?”
“아무것도 없는데요?”
전송되어 온 머리 사진은 그야말로 정상이었다.
‘시발 뭐지?’
[분석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