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당직도 잘 서? (3)
“액티노마이코시스(Actinomycosis)…….”
바루다 덕에 상당히 방대한 지식을 쌓아 낸 수혁이 희한한 병명 하나를 내뱉었다.
적어도 바루다를 알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병명이었다.
[맞습니다. 방선균증. 보람이 있군요.]
동시에 바루다는 흐뭇하다는 말투로 같은 병명의 한글 이름을 말해 주었고.
2년 차 황선우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뭔 병이여 이건 또……. 액티…… 뭐?’
2년 차라고 해 봐야 이제 겨우 3월 아닌가.
당장 몇 주 전까지만 해도 1년 차였다는 소리였다.
내과 1년 차라는 건 주어진 일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정말 어지간히 부지런하거나, 어지간히 똘똘하지 않으면 방대한 양의 지식을 쌓긴 어려웠다.
불행히도 황선우는 전자에도 후자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또 버텨서 2년 차가 되었으니까.
해서 2년 차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지식 정도만 쌓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 이 새끼……. 다른 새끼면 그냥 윽박질러서 꺼지라고 할 텐데.’
황선우는 무척 곤란하다는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았다.
‘이 자식 백이 원장이랑 과장이라 이거지……. 하…….’
딱히 교수에 미련이 있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저 전문의만 딱 따고 나면 나갈 생각만 간절했다.
그에게 태화 의료원은 교육 기관이 아니라 감옥같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수들과 척을 져도 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그랬다간 일단 남은 2년이 죽도록 괴로워질 것이 뻔하지 않은가.
더구나 나갈 때 취직자리를 알아봐 주기는커녕 방해할 수도 있었다.
교수들이란 자리를 알아봐 줄 수는 없어도, 방해할 수는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르는 걸……. 어떻게 노티를 하냐고.’
액티노마이코시스라는 병명이 뭔지는 몰라도, 그 병명이 어떤 감염병을 가리킨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이코시스’란 진균증을 지칭하는 단어였으니까.
즉 앞에 붙은 액티노는 진균의 종류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 말은 곧 지금 노티해야 할 대상이 감염내과 교수이자 현 내과 과장인 신현태란 얘기가 되었다.
“저…….”
그렇게 한참 후달려하고 있으려니 수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무척 조심스러워하는 표정이었는데, 그래서 더 얄미웠다.
딱히 안 조심해도 건드릴 방법이 없었으니까.
‘웬일로 정강이를 안 찬대?’
반면 수혁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지금도 정말이지 있는 용기, 없는 용기 죄 끌어다 입을 연 참이었다.
“왜?”
“그……. 신현태 교수님께서요.”
“어, 과장님. 왜.”
황선우는 드디어 이놈이 둘의 친분 관계를 털어놓는 건가 싶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말을 하려나? 그래, 차라리 그래라. 그게 속 시원하겠다.’
치졸한 인간답게 치졸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수혁이 말을 이었다.
“노티 직접 하라고 하셨었거든요. 감염내과 관련한 거는.”
“어?”
황선우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수혁이 로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가 1년 차 노티를 직접 받아?
그것도 3월에?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 중에 헛소리가 절반을 넘는 시점이거늘.
이건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시발 진짜 숨겨 둔 자식이라도 되는 거야, 뭐야.’
잠시 뿌리 깊은 열등감이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왔지만.
이내 차라리 잘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이 까다로운, 어쩌면 정신 나간 듯한 노티를 수혁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
“네, 선생님.”
“흠.”
수혁은 짐짓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황선우를 바라보았다.
워낙 학창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와 다양한 가정집에서 과외를 해 왔던 그가 아닌가.
척하면 척이었다.
“선생님은 지금 중환자실 환자 보고 계신다고 하고, 전화를 드리면 될까요?”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듯한 발언이었다.
황선우는 자신의 기쁨을 너무 티 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뭐, 그렇게 해.”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혁은 별로 감사할 만한 일도 없지만, 습관처럼 감사하다고 말을 하곤 전화기를 빼 들었다.
부우웅.
곧 이제 막 9홀을 마치고 그늘집 안으로 들어서던 신현태 과장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야, 너는 골프 칠 때 폰 좀 끄라니까.”
그걸 확인한 원장이 그를 타박했다.
지금이야 그늘집에 들어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드라이버라도 치려는 순간에 진동이 울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비매너도 그런 비매너가 없었다.
“대학 병원 의사가 폰을 어떻게 끕니까? 게다가 나 오늘 원외 당직이라고.”
“원외 당직? 원장이랑 골프 약속이 있는 날, 원외 당직?”
“원장은 무슨. 선후배로 온 거지. 안 그래요, 김 교수?”
신현태 과장은 너스레를 떨며 옆에 선 김진실 교수를 바라보았다.
올해 막 태화 의료원 영상의학과 복부 파트 전임 교수를 달게 된 그녀는 약간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현태 과장한테야 이현종 원장이 그저 선배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새파랗게 어린 그녀에게는 하늘같이 위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신 과장은 눈치가 제법 있는 사람이었다.
“어? 이수혁이네?”
곧 전화를 받음으로써 김진실에게 집중되었던 신경을 분산시켰다.
“이수혁? 이 새끼는 골프 치는데 전화를 해?”
당연하게도 이현종 원장은 이수혁이란 이름에 발작하듯 반응했다.
그러면서도 귀를 핸드폰에 바짝 들이댔는데, 혹시 누구 쑤신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 교수님. 1년 차 이수혁입니다. 응급실로 내원한 환자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신지요?”
하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수혁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말투 또한 예의 바르기 그지없었다.
도저히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보기는 좀 어려웠다.
“어, 그래. 어차피……. 지금부터 한 30분은 할 거 없어. 쉬었다 갈 거죠?”
신현태 과장은 캐디에게 안내받은 빈 자리에 대충 뭉개고 앉으면서 사방을 돌아보았다.
김진실 교수야 선택권이 없는 사람이었으니, 원장의 허락만 받으면 되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아침 안 먹고 나와서 어차피 출출하긴 했어.”
그리고 그 원장은 대강 고개를 내저은 후, 메뉴를 뒤적이고 있었다.
“어, 얘기해 봐.”
해서 신현태 과장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수혁의 노티를 허락했다.
수혁은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본격적인 노티를 시작했다.
“네, 교수님. 45세 여환, 한 달 전부터 계속된 복부 팽만감 및 10kg의 체중 감소를 주소로 타 병원 내원하여 시행한 검진상 우측 대장(상행 결장) 주변 덩이 보며 본원 응급실로 전원되었습니다.”
“으음……. 체중 감소에 대장 근처 덩이?”
대번에 신현태 과장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져 나갔다.
동시에 이현종 원장의 얼굴엔 어떤 확신이 번졌다.
“거봐, 또라이 맞지? 암 환자를 왜 너한테 노티하냐고.”
물론 원장의 목소리가 수혁에게 닿지는 않았다.
덕분에 수혁은 계속, 하고자 했던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네, 교수님. CT상 아이씨 밸브(IC valve: 소장과 대장의 연결 부위) 근처에 대략 5cm가량의 메스가 5개 정도 관찰됩니다. 모든 메스는 융합되어 있습니다.”
“대장암……. 아니니?”
아직 수혁이 천재이길 바라는 신 과장이 조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수혁은 딱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급하게 대꾸했다.
“대장암이라고 하기엔 장 폐색 소견이 없습니다.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도 변비이지, 변을 아예 못 보진 않았다고 합니다.”
“흐음……. 5cm가 넘어가는 메스가 융합까지 됐는데 폐색이 없어?”
그제야 신 과장은 다소 안심했다는 얼굴로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시큰둥한 얼굴로 음식이나 기다리고 있던 원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교수님. 만약 대장암이라면 이만한 크기에서 반드시 폐색을 동반했어야 합니다.”
“흐음. 그럼 뭘 의심하고 있지? 우리 수혁이는?”
딱 부러지는 말에 신 과장은 다른 3년 차들이 들었다면 기함이라도 할 만한 호칭으로 수혁을 불렀다.
우리 수혁이라니.
아마 이 사람이 미쳤나 싶을 터였다.
원장도 그랬다.
“돌았어?”
하지만 신 과장은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수혁의 답변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심지어 스피커폰으로 돌려 놓아 버렸다.
“일단 들어나 보자고요. 이거 스피커폰이니까 실수하지 마시고.”
“에이.”
스피커폰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수혁은 예의 그 또랑또랑한 어조로 노티를 이어 나갔다.
“CT상 메스의 마진은 불규칙하며 일부 복벽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조영제에 의한 조영 증강 또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융합하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습니다.”
딱 암에 해당하는 소견이라고 보면 되었다.
“하지만 폐색은 없으며, 또 다른 특이 사항으로는 자궁 내 피임 장치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자궁 내 피임 장치.
일명 IUD.
안전한 피임 장치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지만, 합병증이 전혀 없는 건 또 아니었다.
경험 많은 내과 의사인 신현태 과장과 이현종 원장 그리고 복부 파트의 떠오르는 샛별 김진실 교수는 여기까지 듣고 나자 한 가지 질환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진단명은 수혁이 언급한 것과 정확히 같았다.
“위 소견을 종합해 보면 액티노마이코시스를 의심할 수 있겠습니다.”
“허…….”
그 말에 놀란 원장이 스피커폰이라는 사실도 잊고 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1년 차 중에 아니, 3년 차까지 통틀어서 액티노마이코시스를 진단해 낼 수 있는 녀석이 몇이나 있을까.
‘없을 거 같은데…….’
그렇다면 정말 천재일까?
과장이야 홀랑 넘어가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지만.
이쪽은 원장이었다. 무려 한국에서 가장 손꼽는다고 할 수 있는 태화대학교 의과대학의 원장.
“사진. 사진 보내 봐.”
수혁도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익숙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놀란 수혁이 되물어 왔다.
“누, 누구십니까?”
“원장이야, 원장. CT 사진, 방금 말한 그……. 아이씨 밸브 근처 찍어서 보내 봐.”
“아, 네. 교수님.”
과장한테만 어필해도 대박인데.
게다가 옆에 원장까지 있어서 일거양득이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수혁은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고 사진을 찍었다.
[221컷, 223컷이 적당하겠습니다.]
물론 바루다의 조언을 들어 가면서였다.
그렇게 전송된 사진은 원장에 의해 바로 김진실 교수에게 보였다.
“어때, 맞는 거 같아?”
김진실 교수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놀랐다는 표정을 하고서였다. 입을 섣불리 떼기가 어려운지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찬찬히 정보를 정리해 보는 듯했다.
“이 정보만 가지고서는……. 액티노마이코시스가 제일 합당해요. 얘 1년 차 맞아요? 이건…… 영상의학과 4년 차라고 해도 믿을 수준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