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9 – 이리 와 (305/306)


#외전 09 – 이리 와
2023.06.01.


집으로 돌아온 은하는 다른 모든 일을 뒤로하고 일찍 잠에 들었다.

기억이 돌아온 지금, 그녀에게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이 돌아왔음을 협회에 알리는 일보다 우선적으로.
잠에 푹 빠져든 은하가 의식을 차렸을 때, 그녀는 늘 그랬듯 고요하고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은하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멀리 가지 않아도 곧 누군가 제게 말을 걸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은 일찍 왔네?”

사아아…….

진회색 안개가 걷히며 특이한 동공을 가진 붉은 눈이 드러났다. 졸린 듯 나른하면서도 미약하게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 에단이었다.

“응, 너를 만나려고.”

“나를?”

잠이 덜 깬 것처럼 반쯤 감겨 있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씨익 웃은 그가 자연스럽게 다가와 옆에 털썩 앉았다.

“알겠다. 내가 보고 싶었구나?”

나도야, 은하.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은하의 어깨에 기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만약 이곳에 루시나 시우가 있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하고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에단과 은하만의 공간이었으니 그런 것 따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는 적막한 공간이었지만, 에단은 이 점 하나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아, 좋다.”

은하의 어깨에 코를 파묻은 에단이 자신의 분홍색 앞머리를 살짝 비벼 댔다. 보드랍고 포근한 감촉이 어깨에 닿았다.

에단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었다. 마치 은하의 체취를 확인하는 듯한 그 행동은, 매번 꿈에서 만날 때마다 가장 먼저 그가 하는 일이기도 했다.

늘 그렇듯 에단의 행동은 별다른 생각도 없어 보이고 그저 가벼웠다.

하지만 이제는 알았다.

이 쓸쓸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그는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은하가 오길 매일 밤마다 기다리면서.

은하가 잠을 자는 시간이 7시간 정도라고 쳤을 때, 그 시간 내내 에단과 함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면에도 종류가 있고, 그 종류마다 깊이가 달랐다. 에단과 은하가 여기 무아의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가장 깊은 잠에 빠졌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짧을 때는 10분 정도, 길어도 한 시간은 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지루하진 않아?”

“별로.”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에단은 그리 즉답하며 크게 하품을 했다. 하암, 소리와 함께 입가를 두드리자 손목에 묶여 있던 쇠사슬이 부딪히며 나직하게 울었다.

살짝 고인 눈물을 닦아 내며 에단이 픽 웃음을 흘렸다.

“지루하기는 예전이 더 지루했지.”

데바와 시답잖은 계획이나 세우며 채널을 전전하던 그때 말이다.

사람들의 꿈을 양식 삼아 힘을 키우는 것이 즐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자신은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에 이르러 뒤돌아보면 그랬다. 그 증거로, 에단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의 혀에 새겨진 별자리 문양과 큰 X 자뿐이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넌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

에단의 낯빛을 가만히 살피던 은하가 물었다.

나가고 싶냐, 라. 에단은 허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굳이?”

누구에게도, 은하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에단은 사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은하의 꿈을 먹고 다시 힘을 키운 에단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곳에 갇혀 지내는 것이 데바가 원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만큼 재미없는 일도 또 없긴 했다. 다만 어차피 여기서 나가 봤자, 그가 탄생하고 지내 온 ‘채널’과는 전혀 다른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반대로 이곳에 있으면 매일 밤마다 은하를 볼 수 있는 데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녀를 독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꿈은 달콤하고 안락했다. 수만 명의 꿈을 먹는 것보다 훨씬 더 만족감을 느꼈다. 아니, 오히려 때로는 갈증이 더 깊어질 정도였다.

그럴수록 에단은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은 그녀와 다르다는 것을.

‘너와 나는 유일한 형제이자 이해자다. 네가 아니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에단, 너와 나는 같다.’

그 빌어먹을 황소 자식의 말이, 어쩌면 사실이었던 것이 아닐까.

──차라리 이곳에 묶여 있는 편이 그녀에게도 내게도 낫지 않을까.

에단은 장난스러운 미소 속에 속내를 모두 숨기고 은하의 어깨에 제 이마를 가볍게 비볐다.

“지금은 적어도, 매일 밤마다 널 만날 수 있잖아.”

“그걸로 충분하다는 거야?”

“왜 그런 걸 물어봐?”

어깨에 기대고 있던 에단이 살짝 시선을 들었다. 일부러 그러는지 조금 더 목을 빼내서 은하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간 그가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뭔가를 더 원한다면, 줄 거야?”

그게 무엇이든? 그의 붉은 눈매가 길게 찢어졌다. 긴 속눈썹 아래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한 동공이 은하를 흡수하듯 빨아들였다.

“나는…….”

그것을 응시하던 은하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려던 순간, 그가 훅 멀어졌다.

“농담이야.”

그렇게 중얼거린 에단은 다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은하에게 어깨를 기댔다.

“은하, 나 졸려. 오늘 본 드라마 이야기나 해 줘.”

칭얼거리듯 조른 에단이 살짝 눈을 감았다.

……도무지 그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억을 잃었을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였다.

힐끗 곁눈질로 에단을 쳐다보자 그는 이미 팔짱을 끼고 본격적으로 잘 태세를 잡고 있었다.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해 놓고 자신은 푹 잠이라도 잘 생각인 건가.

‘드라마 이야기는 딱히 자장가가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은하는 얌전히 무릎을 안고 정면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여주인공이 지하에 갇히게 되었는데, 거기서 어떤 남자를 만났어.”

은하가 꺼낸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던 드라마와는 전혀 이어지지 않는,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긴, 그가 이전에 은하가 해 주었던 드라마의 내용을 기억할 리가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드라마의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은하의 차분하고도 나직한 목소리일 테니까.

은하는 그걸 알고서도 매번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이다. 지금처럼.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거기에 혼자 갇혀 있었던 모양이야. 그동안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고. 그래서 여주인공은 자기가 먹으려고 남겨 두었던 음식을 그 사람한테 나눠 줬는데…….”

그게 아주 맛이 없는 괴물 고기였지. 은하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에단이 제 얘기를 듣고 있는 건지, 아니면 곯아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하는 꿋꿋하게 이야기를 이어 갔다.

“둘은 어느새 꽤 가까워졌어. 남자는 여주인공에게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고, 여주인공도…… 언제부턴가 그와 이야기를 하는 게 꽤 즐겁다고 생각하게 됐지.”

움찔.

에단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어깨를 통해 느껴졌다. 은하는 일부러 그것을 모른 체하며 차분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여주인공은 남자의 도움을 받고 그곳을 탈출할 수 있게 됐어. 하지만 거기를 벗어나면 남자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던 거야.”

“…….”

“결국 여주인공은 그를 데리고 돌아가기로 결심했어.”

거기까지 말한 은하는 다시 살짝 시선을 돌려 제 어깨에 기댄 에단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그는, 웬일인지 붉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은하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너…….”

작게 입술을 달싹이던 에단은 다시 말문을 닫고 가만히 은하를 응시했다.

눈치챈 것이다. 지금 은하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드라마 내용이 아니라, 은하와 에단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녀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가 한참 동안 은하를 담았다.

스스스…….

때마침 검은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인간의 손처럼 뻗어 나온 안개는 서서히 은하와 에단 사이를 갈라놓았다.

─잠에서 깨고 있는 것이다.

은하의 모습이 점차 어두운 안개에 잠식되어 가는 것을 바라보며, 에단이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붉은 눈은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은하의 모습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래서─.”

검은 안개 너머로 말꼬리를 길게 늘인 은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랑 가족이 됐지.”

화악!

안개를 걷고 드러난 하얀 팔.

은하는 잡으라는 듯이 에단에게 손을 쭉 뻗었다. 에단은 또르륵 시선을 떨구어 제게 내밀어진 그 손을 멀거니 응시했다.

“에단.”

재촉하듯, 그러나 차분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은하가 말했다.

“돌아가자, 집으로.”

돌아, 간다고……?

에단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그녀와 나는 다르다. 자신은 은하의 채널에 속할 수 없다. 이 적막하고 까마득한 공간에 혼자 있을 때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고민과 상념이 무색하도록 지금 그녀는 함께 가자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

돌아갈 곳도 가야 할 곳도 없는 자.

다른 곳에서 살아왔고 전혀 다른 태생을 가진 자.

은하는 지금 그런 자에게 선뜻 손을 뻗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네가 내게 해 주었던 말과 행동이, 도대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알고 있을까.

아니, 아마 모르겠지.

모르고서 그녀는 손을 뻗고 있는 것이다.

“……왜 날 데리고 가려는 건데?”

에단은 제게 내밀어진 손에 시선을 고정하고서 확인하듯 물었다.

“약속했잖아. 내가 너 데리고 가겠다고.”

그 순간, 에단을 깨달았다. 차은하.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에단은 고민했다. 내가, 이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이리 와.”

탓!

그의 고민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지 은하의 손이 강하게 에단을 끌어당겨 붙잡았다. 그 하얗고 단단한 손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꽈악.

손과 손이 맞닿았다. 은하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에단에게도 서서히 옮겨졌다. 몸을 감싼 안개로부터, 그리고 손으로부터 따듯한 온도가 전해져 왔다.

처음 느껴 보는 온도에 낯선 기분이 들었다. 에단은 저를 잡고 있는 은하의 손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 정도 힘, 쳐 내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네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하얗고 강인한 손을 쳐 낼 수 있는지, 에단은 몰랐다.

‘먹어.’

‘배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어쩌면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 앞에서 에단의 고민이나 상념 따위는 의미 없는 일이었다.

그녀야말로 제게 유일한 구원이니.

채애애앵─!

검은 안개에 완전히 잠식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그를 속박하고 있던 무언가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와 같았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그녀가 에단에게 감긴 쇠사슬을 풀어 줬을 때처럼, 이번에도 그녀는 기꺼이 그를 해방시켜 주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에단은 매달리듯 은하의 손을 강하게 잡고 있었다.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이것 말고 다른 것 따위 필요 없다는 듯이, 아주 단단하게.

“너 지금 큰일 날 짓 하는 거다.”

에단이 작게 속삭였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녀 또한 같은 힘으로 그의 손을 잡아 주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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