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8 – 그녀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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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8 – 그녀의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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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08 – 그녀의 대답
2023.05.31.
불멸 길드 본부 1층의 작은 온실.
사계절 내내 붉은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이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공간은 땀내가 진동하는 불멸 길드와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유환은 기어코 큰돈을 쏟아부어 온실을 완공했다.
표면적으로는 고된 훈련을 마친 불멸의 길드원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1층의 테라스를 개조하여 만든 공간이었으나 사실은 달랐다.
닥터 플랜트 금로제가 이따금씩 이곳을 방문하는 날, 유환은 꼭 이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오곤 했었으니 목적이야 뻔했다.
후덥지근하고 땀내 나는 불멸 길드에서 가장 낭만과 애정이 가득한 장소. 그곳이 바로 이곳 1층 온실이었다.
다른 이들이 모두 회장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터라, 지금 이곳에는 시우와 은하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다. 덕분에 시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기절할 지경이었으니까.
“…….”
힐끔.
호수를 담은 듯한 푸른 눈동자가 소리 없이 은하를 향했다. 온실 벤치에 앉은 은하는 맞은편의 작은 분수를 응시할 뿐 아직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로 호흡이 멈춰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우는 안간힘을 써서 입술을 달싹였다.
“……괜찮은 겁니까?”
“응. 꽤 많이 마셔서 잠시 쉬려고 나온 참이라.”
아니, 그게 아니라……. 시우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꼼지락댔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두통은 없습니까?”
“아아.”
그 얘기였어? 은하가 낮은 웃음을 흘리더니 시선을 들어 시우와 눈을 맞추었다.
“그것도 괜찮아. 오히려 머리가 아주 맑아졌어.”
“다행…… 큼, 다행이네요.”
목이 잠긴 탓인지 저도 모르게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헛기침을 두어 번 흘린 시우는 구두 앞코로 툭툭 흙을 긁었다.
“그때 말한 ‘대답’에 대한 이야기 말인데…….”
흠칫.
시우가 눈에 띄게 어깨를 떨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본론으로 들어간다고?
놀란 가슴은 주인의 제어를 무시하고 다시금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엔 조금 더 일상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이 축축하게 젖는 것이 느껴졌다. 시우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초연한 얼굴을 유지했다.
아니, 그럴 작정이었지만, 사실 스스로도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얼음과 물을 다루는 고유 능력을 각성한 이래, 시우는 늘 일반인들보다 체온이 낮았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지금 체온계로 체온을 잰다면 역대 최고의 기록일 것이다. 그것은 이곳이 따듯한 온실 속이라서가 아니었다.
아.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뙤약볕 아래 얼음처럼 이대로 녹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시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도망치고 싶은 마음보다도, 그녀의 속내를 듣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약속한 대로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 그때, 네 말에 대해서.”
드디어 은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내 대답은…….”
시우는 순간적으로 호흡하는 것도 잊고 그녀의 말투, 표정,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조금 이르지 않을까 생각해.”
여러모로 말이야. 은하가 덧붙였다.
‘아…….’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쿵쾅대던 심장이 이번에는 발등까지 덜컹 내려앉았다.
뭘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바보같이.
그래, 저게 당연한 것이다. 선배의 곁에 있고 싶은 것은 제 욕심에 불과했다. 선배는 딱히 자신을 이성으로 여기고 있지도 않을 거고, 그렇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역시…… 그렇죠.”
“응.”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시우의 손이 스르륵 작게 주먹을 쥐었다.
알고 있었는데. 그랬는데도.
─심장 부근이 저릿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배의 곁에 서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 사살 당한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여기서 시무룩하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선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제게 있어 그녀가 특별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자신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시우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선배의 말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 이상 한심한 꼴을 보이기 전에, 시우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게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다.
시우에게 있어 은하는 계속 특별할 것이고, 그는 앞으로도 그녀의 곁을 지킬 테니까.
다만 그것이 옆자리가 아닐 뿐.
단지 그뿐인 일이다.
그런데.
“그러니 앞으로는 너에 대해 더 많이 알려 줘.”
“……네?”
시우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푸른 두 눈동자를 느릿하게 깜빡이며, 시우는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삐거덕삐거덕 고개를 돌렸다.
“저에 대해서…… 요?”
“그래. 헌터 백랑이 아닌, 신시우 너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
“네 마음이 가볍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감사하게도 생각해. 하지만 지금 당장 대답하기에는 아직 나는 너를 잘 모르니까.”
거기까지 말한 은하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스르륵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벌떡!
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하와 복도에서 마주치고 온실에 들어와서 앉기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마주하지 못했던 그가, 지금은 호소하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자격이라니, 저는 선배를…….”
두 주먹이 터질 듯 세게 쥔 시우가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선배라서 좋아하고 있는데……!”
그에 은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우리 딸은 평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가고 싶은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무엇보다도 너를 소중하게 여겨 주는 근사한 남자친구도 만나면서…… 그렇게 사는 거야, 우리 딸은.’
‘그러면 엄마는 더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
언젠가 엄마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은하는 눈앞에서 저를 오롯이 담고 있는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구나.”
살짝 굳은 채로 침묵하던 은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마워.”
그리고 조금 멀리 시선을 던져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통유리로 된 온실 천장은 새파란 하늘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었다.
이렇게 평온한 기분으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새삼스레 느껴지는 평화가,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은하였다.
“나는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오랫동안 난…… 몬스터를 잡고 헌터로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만 살아갈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는 이런 게 좀 어려워.”
누군가에게 이성으로 보이는 일도. 누군가와 함께 미래를 약속하는 일도. 헌터가 아닌 평범한 ‘차은하’를 그리는 일도 모두 어색하고 어려웠다.
그럴 수 있으리라곤, 그래도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하지만 알고 싶다고는 생각해.”
은하가 시선을 들어 시우를 바라보았다.
“이런 대답으로도 괜찮을까.”
이번에는 은하가 시우의 대답을 기다릴 차례였다.
졸졸졸…….
분수대를 통해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물줄기가 작은 연못 위를 간질였다. 잔잔한 수면 위로 몇 번이고 물결이 겹쳐졌다가 퍼져 나갔다. 부드럽게, 천천히.
“그럼……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계속 선배의 곁에 있어도 되는 겁니까?”
시우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은하의 귀까지 닿았다.
“응.”
“연락도…… 해도 됩니까? 일이나 용건 같은 게 없어도.”
“응.”
“계속 좋아해도 되는 거죠?”
“……네가 그러고 싶다면.”
“정말요?”
“그래.”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물어보던 시우는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린 양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신시우?”
“괜찮…… 아니, 잠깐만. 잠깐만요.”
시우는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은하를 향해 손을 뻗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 탓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귀가 새빨개진 것이 보였다. 워낙 하얀 피부 탓에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푸쉬이…….
웬일인지 시우의 양어깨 위로 흰 수증기가 살짝 올라왔다. 동요 탓에 순간적으로 능력 제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쯤 되니 아무리 이런 쪽에 눈치가 없는 은하더라도, 지금 그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다.
“…….”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은하가 다시금 스르륵 벤치에 앉았다. 시우의 심호흡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지만 은하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반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 초 후. 드디어 시우가 일어났다.
“노력할게요.”
선배에게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
선배의 옆에 당당하게 설 수 있도록.
“잘 부탁해.”
은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그 웃음이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만 오롯이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시우의 심장이 또다시 눈치 없게 뛰어 댔다.
이상한 일이다. 벌써 오늘 몇 번이나 기분이 오락가락했는지, 이제는 셀 수도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은 최고의 날이었다. 태어난 이래 가장 눈부시고 벅찬, 그런 날.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가는 또다시 제어력을 잃을 것 같아서, 시우는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렸다.
“허락도 받았으니, 당장 내일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아, 아니지. 주말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에게 선보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보여 주고 싶은 것도, 데려가고 싶은 곳도, 알아줬으면 하는 점도, 하나하나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흘렀다.
하지만 그에게도 공부가 필요했다. 맛집이나 루트 따위에 대해 사전 조사도 해야 하고, 그곳이 위험하지는 않은지 알아봐야 했다. 아, 일정을 정리할 필요도 있겠다. 그 부분은 박 차장한테 맡기는 걸로 하고…….
아, 어쩌면 좋지.
기대가 돼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천천히 해.”
시우의 머리가 쉴 새 없이 굴러가는 와중, 은하 쪽에서 풋 하고 작게 웃음이 터졌다.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시간은 많았다.
지금까지 함께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그렇네요.”
시우는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조금 뺐다. 수증기 탓에 젖은 어깨가 그제야 신경 쓰이는지, 그가 어깨 소매를 만지작대며 조금은 머쓱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찾았다! 어디 갔나 했더니!”
저 멀리 씩씩대는 아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컥! 온실 문을 시원하게 열어젖힌 그녀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다가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여긴 또 왜 이렇게 추워?”
가만 보니 흙길 위로 하얀 서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 분명 온실 아니었던가? 냉실이었나?
─아니, 그런 건 모르겠고.
주변을 둘러보던 아연이 냉큼 걸어와 은하에게 팔짱을 꼈다. 그 뒤로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 들어오는 민주, 준환, 성윤, 재민…….
“뭐야, 형?”
시우에게 힐끗 시선을 던진 민주는 그의 젖은 어깨와 붉은 귀를 보고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 그렇게 생겨 놓고 생각보다 엉큼한 구석이 있네.”
“마스터,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투는…….”
“차 헌터님! 형님의 응접실에서 귀한 술을 꺼내 왔습니다. 가서 한잔 어떠십니까? 앗, 차가워! 뭐야, 이 얼음은?”
“아, 다들 왜 따라와! 이래서 눈치 없는 놈들하고는 상종하기도 싫다니까! 언니, 우리 저쪽으로 가요. 얼른!”
아연이 은하의 팔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은하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벤치에서 일어났다.
“야, 어디 가!”
“마스터! 뛰지 마세요!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질 수 없다는 듯 민주와 준환도 온실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성윤과 재민도 술병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시끌벅적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시우는 시끄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원래의 그였다면 당장 이곳을 벗어났을 것이다.
원래의 그였다면, 말이다.
“안 가?”
가장 먼저 온실을 빠져나가던 은하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시우를 뒤돌아보았다.
새까만 눈이 저를 바라보는 순간, 시우의 입가가 마법처럼 사르륵 풀렸다.
“……당연히 가야죠.”
─그곳에 당신이 있다면.
눈을 접으며 웃은 시우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온실에 핀 붉은 장미 꽃잎이 춤을 추듯 그들을 훑고 지나쳤다. 달큼한 술 냄새와 꽃향기가 뒤섞인 그곳에서, 모두의 웃음소리가 아득히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