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7 – 모두가 있는 곳 (303/306)


#외전 07 – 모두가 있는 곳
2023.05.30.


서울 강남구 수서동.

불멸 길드 본부는 평소보다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건물 2층에 자리한 널찍한 연회장에는 어젯밤 자정부터 지금까지 한창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마시고 죽자!”

“아니, 난 내일 임무가 있어서 과음은 좀…….”

“참나, 뭘 빼고 그러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몰라? 그냥 마시라니까!”

만일 그곳에 모인 이들이 검은 양복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오늘이 제천대성의 기일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회장의, 제실(祭室)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오늘이 잔치인지 제사인지 구별도 안 가네.”

회장을 둘러보던 민주는 삐딱하게 선 채 쯧쯧 혀를 찼다. 곁에 있던 준환은 조금 전 얼결에 받아 버린 술잔을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뭐…… 이것도 불멸 나름의 방식이겠죠. 제천대성은 무겁고 칙칙한 분위기를 워낙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 발코니의 난관에 팔꿈치를 걸치고 선 아연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뭐 찾냐? 아직 배고파?”

그런 아연 곁으로 재민이 다가왔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슨 조합인가 싶겠지만 사실 그들이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것은 알 사람은 알았다.

“뭔 소리임. 사람을 무슨 걸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취급하네.”

콧방귀를 끼며 자리를 벗어나려던 찰나 재민이 아연의 등을 향해 툭 내뱉듯 말했다.

“흑염의 프린세스라면 안 왔다.”

그에 아연이 멈칫했다. 역시 그녀를 찾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구나. 그렇게 판단한 재민은 아연이 방금 전까지 기대고 있던 난관에 편안히 등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찾아가지 그래. 어디 사는지 알고 있잖아.”

“…….”

“왜? 민폐라도 될까 봐?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쓰면서 살았다고.”

“…….”

“……뭐야. 왜 대꾸 안 해? 평소답지 않다, 너?”

평소의 아연이었다면 이 정도 빈정거림에도 닥치라든가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이고도 남았을 텐데, 웬일인지 오늘은 조용했다. 재민은 굳은 것처럼 보이는 아연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알았어, 내가 미안─.”

“……니.”

“어?”

“언니!”

타앗!

아연이 재민의 손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리벙벙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쫓던 재민의 시선이 문득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입구 쪽이 소란스러웠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니, 누군가 이제 막 회장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회장 가운데 있던 불멸의 현 마스터, 도성윤이 뒤늦게 도착한 손님의 얼굴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회장 입구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이 아닌가.

자연스레 그를 따라 재민의 시선도 움직였다.

그리고 보았다. 검고 긴 생머리의 낯이 익은 여자를.

“……흑프?”

한편 은하를 본 성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여, 여긴 어떻게…….”

아니, 아니지……. 어떻게 왔긴. 초대장을 보낸 것은 이쪽이 아니던가. 정신을 차린 성윤은 다시금 더듬더듬 시선을 들어 은하를 바라보았다.

“그…… 참석해 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와야죠.”

단정한 흑색 원피스를 입은 은하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차분히 덧붙였다.

“형님의 기일이니까요.”

“……네?”

형님…… 이라고?

성윤이 눈을 크게 뜨는 순간이었다.

“언니!”

와락!

어디선가 나타난 날렵한 그림자가 은하를 넘어트릴 기세로 덮쳐 왔다. 일찍이 은하를 발견한 아연이었다.

“아연아.”

은하는 제게 안긴 아연의 등을 살짝 쓸었다. 아연은 그녀의 품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다.

어떻게 된 거냐, 기억을 찾은 거냐, 그런 말 따위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내가…… 흑, 내가 얼마나…….”

그동안 쌓여 있던 모든 감정이 물밀 듯 들이닥쳐 폭발하는 탓에 어쩔 줄 몰랐다.

그런 아연을, 은하는 당황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고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 주겠다는 듯.

“누나.”

가까운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연을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은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방울만 한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소년. 이제는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 민주야.”

오랜만이라는 그 말에 민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키도 은하보다 조금 더 컸다. 무엇보다 모두가 이쪽을 보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볼썽사납게 눈물을 뚝뚝 떨구고 싶지 않았다.

민주는 손등으로 벅벅 눈가를 문지르고 은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가장 묻고 싶은 것은 한 가지였다.

“……이제 괜찮은 거예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질문이었다. 몸은 다 나았는지. 기억은 돌아왔는지. 이제는 눈앞에서 그렇게 사라져 버리지 않을 것인지.

─또다시, 함께할 수 있는 것인지.

그 물음에 은하는 그를 안심시키듯 웃었다.

“언제나 괜찮았지.”

그리고 아연이를 안고 있지 않은 다른 쪽 팔을 크게 벌렸다.

“이리 와.”

“……!”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소년의 결심은 물에 녹은 솜사탕처럼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고,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서, 그 품 안으로 달려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비켜, 미친놈아.”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을 들고 아연이 제 자리를 넘보는 민주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너나 비켜. 누나 옷 다 젖은 거 안 보여?”

“시끄러워.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서 우유나 마시지 왜.”

아연과 민주는 사나운 길고양이처럼 털을 세우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던 성윤과 준환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듯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은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웅다웅 싸우는 두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어색한 얼굴을 하고,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못한 채 쭈뼛쭈뼛 서 있는 재민이 보였다.

그는 어떤 면에서 보자면 성윤보다 훨씬 더 유환을 따랐던 자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갑작스럽게 ‘형님’과 가까워진 은하를 필요 이상으로 경계한 적도 있었다.

‘이 안에는 사부와 그자밖에 없는 거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야 해.’

‘정식으로 초청받고 오신 분이야. 실례되는 행동이란 생각은 안 드나?’

‘짧게라도 늑대에 몸을 담았던 자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은하를 신뢰하는 성윤과는 달리 재민은 끝까지 그녀를 온전히 신뢰하지는 못했고, 그 탓에 의견 충돌을 했던 적도 적지 않았다.

이제는 그녀가 적이 아니라는 걸 안다. 아니, 오히려 성윤의 말대로 그녀는 불멸의 은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날의 후회와 죄책감 탓에, 재민은 은하 앞에서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더니 다른 곳으로 은근히 시선을 피해 버리기까지 했다.

‘못난 놈.’

재민이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붓고 있던 중, 은하는 민주와 아연에게서 살짝 벗어나 그런 그에게 한 걸음 먼저 다가갔다.

또각─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자 재민이 슬쩍 시선을 들었다.

큰일이다. 무언가 제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그때는 미안했다든가, 와 줘서 감사하다든가, 무엇이든 좋으니 먼저 말을 꺼내야 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제 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막상 상황이 닥치니 머릿속이 새하얬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그녀를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사전에 연습이라도 해 두는 건데.

저벅저벅 걸어온 은하는 제자리서 우물쭈물하는 재민 앞에 멈춰 섰다.

새까만 구두코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재민이 뭐라도 말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그와 동시에 은하가 엷게 웃었다.

“술, 아직 남아 있으려나요.”

아…….

재민은 그 순간 굳어 있던 온몸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짧은 시간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머리가 터질 듯 고민했으나, 그런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대화 따위 애초부터 필요 없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흑염의 프린세스. 아니, 차은하. 그녀 앞에서는.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안면 근육이 거짓말처럼 스르륵 풀어졌다. 재민은 제 동료들에게, 제 형님에게 그러했듯 시원스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물론, 아주 많이요.”

* * *

길드 본부 입구를 지키던 불멸 길드원은 저 앞에 멈춘 검은 승용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도 올 손님이 남았나? 이제 제사도 거의 막바지인데……. 그렇다면 제사 참석이 목적이 아니라 다른 용무가 있는 손님일지도 모른다.

승용차 문이 닫히고 길쭉한 그림자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불멸 길드원은 제 앞에 선 남자를 보고 입을 도로 닫았다.

푸른 기가 감도는 어두운 머리카락에 얼음처럼 투명한 청안. 헌터계에 종사하는 이들 중 이 남자의 얼굴을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늑대의 주인, 신시우였다.

“2층입니다. 들어가시죠.”

“고맙군.”

시우는 그를 지나쳐 제실로 쓰이고 있는 2층 회장으로 향했다. 복도에 섰을 뿐인데도 알 수 있을 만큼 내부는 시끌벅적한 듯했다.

그는 곧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망설였다.

「대표님, 차 헌터님의 기억이 돌아오신 듯합니다.」

오늘 오전 제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시우 입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은하를 보았던 것이 며칠 전 국밥집에 들렀을 때였다. 그때는 아무런 차도도 없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일을 계기로 기억이 돌아온 걸까.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유나 계기가 무엇이든 선배의 기억이 돌아온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인 일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니 무슨 얼굴을 하고 그녀를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선배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은, 시우가 했던 모든 말 또한 기억하고 있다는 뜻.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선배의 곁에 있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읏.”

화아악.

그 일을 떠올리자 얼굴로부터 번진 열기가 전신에 뻗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시우는 저도 모르게 손등을 자신의 입가에 가져가 꾸욱 눌렀다.

‘생각해 볼게.’

‘네 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약속해.’

어쩌면 오늘, 그 답을 듣게 될지도 몰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도 고대하던 일이었지 않던가.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달려가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대답을 듣고 싶은 것 같기도 했지만, 영영 듣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늘 이랬다.

선배 앞에서는 늘 우유부단해지고 어리석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선배는 늘 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자신은 그 옆을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였다.

그 정도로 시우에게 은하라는 사람은 찬란하고 특별했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눈이 멀어 있었으니, 멈출 방법은 없었다.

‘선배…….’

문득 은하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안 되겠다. 이번에는 주변 공기까지 더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시우는 결국 검은 넥타이를 답답하다는 듯 풀어 헤쳤다. 그리고 제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고 깊이 심호흡을 했다.

‘제천대성에게 면목 없군.’

오늘 이 자리는 제천대성의 기제사다. 그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데도, 시우의 머릿속은 오로지 은하에 대한 생각으로 지배당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데 막상 은하의 얼굴을 보게 되면 고인을 추모할 경황도 없겠다. 시우는 회장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계단을 타고 한 층 더 올라갔다.

제사인지 잔치인지 모를 분위기인 2층과는 달리, 3층은 조용하고 엄숙했다. 오히려 이곳이 더 기제사에 맞는 분위기라 할 수 있었다.

향로 근처에는 제사상뿐만 아니라 제천대성이 즐겨 피우던 담배와 각종 술, 훈련용 쌍절곤 따위가 놓여 있었다. 제사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멸답다고 생각했다.

시우는 미리 챙겨 온 술을 제사상 부근에 조심스레 올려 두었다. 꽤 귀한 녀석으로 준비해 왔으니, 제천대성도 이만하면 기뻐하겠지.

한동안 제사상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시우는 곧 빙글 몸을 돌렸다. 그대로 불멸 본부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누군가와 떡하니 마주쳤다.

“아니, 백랑 님 아니십니까?”

불멸의 길드원 중 하나였다. 이름은……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불멸과 늑대는 견원지간이라고 불렸던 적도 있는 사이였다. 오랫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들이었으나,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불멸의 길드원이 시우를 보고 이렇게 반가운 얼굴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밑에 다른 분들도 다 계신데. 왔다 가시지 않고요.”

“……고맙지만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

“하지만 여기까지 오셨는데요. 아! 안에 그분께서도 계신답니다. 한 시간 전쯤에 도착하셨는데 혹시 이미 만나셨습니까?”

시우는 그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챘다.

“아니, 나는─.”

“신시우?”

톤이 낮으면서도 차분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 순간, 시우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점차 빨라진다. 내 것인데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들었다.

지금 당장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과, 그리했다가는 심장 마비로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그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 댔다.

결국 승자는 충동 쪽이었다.

스르륵 고개를 돌린 순간, 은하수를 머금은 듯한 새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코끝으로 훅 다가온 익숙한 향기에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시우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은하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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