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4 – 당신이 원한다면 (300/306)


#외전 04 – 당신이 원한다면
2023.05.27.


“【보스, 다녀오셨습니까.】”

각진 안경에 깔끔하게 머리를 올려 묶은 여자, 캐서린은 개인적인 용무를 마치고 차로 돌아온 자신의 보스를 맞이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오셨군요. 혹시 몰라 다음 일정을 한 시간 뒤로 미뤄 두었습니다만.】”

“【그래? 그럼 잠시 차에서 쉬지.】”

“【제가 열겠습니다.】”

캐서린은 능숙하게 한 걸음 앞서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뒷좌석에 탄 이준은 푹신한 시트에 등을 기대고 누워 눈을 감았다. 뒤이어 운전석에 앉은 캐서린은 히터 온도를 살짝 높이고 룸미러를 통해 이준을 바라보았다.

“【어떠셨습니까?】”

딱히 주어나 설명이 붙어 있지 않은 질문이었으나, 이준은 그 의도를 알고 있다는 듯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짤막하게 답했다.

“【……좋았어.】”

“【그렇군요.】”

“【응.】”

이후 짧은 침묵이 흘렀다. 캐서린은 더 이상 자세한 것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보스께서 쉬시는 동안 오후의 밀린 일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캐서린이 가방에서 태블릿 PC를 집어 드는 순간이었다.

“【난 몰랐어.】”

뒷좌석에 나른하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이준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애를 오래전부터 봐 왔지만, 난 은하가 말수가 적다고만 생각했거든. 그렇게 잘 웃는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었지.】”

……정말로, 아는 것이 없었던 거야.

흐려지는 말꼬리 끝에 이준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그는 손등으로 자신의 눈 주변을 꾹 누르고 있었다.

룸미러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캐서린은 가방에 반쯤 걸쳐 있는 태블릿 PC를 완전히 꺼내 자신의 무릎 위에 탁, 눕혔다.

“【그건 그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무슨 소리지?】”

“【오래된 동료의 모친께서 좋아하시는 꽃이 무엇인지 30년이 넘도록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도, 원래 있던 일을 취소하고 갑작스럽게 일정을 변경하면서까지 묘비에 들르신 것도. 그리고…….】”

태블릿 PC 전원을 켜기 전, 그녀가 살짝 안경을 들어 올렸다.

“【혹시라도 폐가 될까 염려하며 모든 싸움이 끝난 지금도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고 계시다는 것조차도, 그분은 모르실 테니까요.】”

“【……비꼬는 건가.】”

“【감히 그럴 리가요.】”

지금 이 대화는 그녀가 맡은 업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데다, 보스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주제넘는 일이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원래의 캐서린이었다면 여기까지 하고 말을 줄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캐서린은 조금 달랐다.

“【다만, 보스가 어떤 사람인지 완전히 알지는 못했던 건 그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

“【기억을 잃은 지금은 더더욱 그렇겠죠.】”

거기까지 말한 캐서린은 뒷좌석에 앉은 이준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소립니다, 보스.】”

그 말에 이준은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각진 안경 너머에 있는 그녀의 눈은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응원한다는 듯, 걱정 말라는 듯.

“【……캐서린.】”

“【네, 보스.】”

“【넌 역시 유능해.】”

“【칭찬 감사합니다.】”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캐서린은 태블릿 PC를 켰다. 액정 빛이 반사되어 안경알이 푸르게 빛나는 탓에, 그녀의 눈이 웃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더는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이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은하와 함께 있었던 고즈넉한 언덕이 바로 저기에 보였다.

‘이제부터 시작…… 이라고.’

그곳에 시선을 고정한 이준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쪽 의수를 조용히 감쌌다.

* * *

어머니의 묘를 방문했던 은하는 학원에서 오후 수업을 받은 후,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짧은 쪽지와 함께 간단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사이 제휘가 다녀갔나 보다.

이상하게 집이 조용하다 싶더니, 루시는 은하가 집에 돌아온 줄도 모르고 소파 위에 뻗어 있었다.

동물…… 아니, 아이와 놀아 주는 데에 있어서는 은하보다 제휘 쪽이 훨씬 일가견이 있었던 터라, 언제부터인가 제휘가 다녀간 날이면 루시는 기절하듯이 뻗어 버리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사이가 좋아진 건지.’

소리 내지 않고 웃은 은하는 소파 아래에 널브러진 낚싯대 장난감, 캣닢 인형, 양모 볼을 대충 치워 담고는 조용히 침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루시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문을 닫고, 침대 곁의 서랍장을 열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잠든 루시를 바라볼 때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이었다.

서랍장을 부지런히 뒤지면서도, 은하는 머릿속으로 오늘 오전 어머니의 묘비 앞에서 만난 남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 이름은…… 백이준이라고 합니다, 은하 씨.’

남자와 헤어진 뒤 학원을 가기 위해 언덕을 내려오는 길. 은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뒤늦게 그 남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을 ‘은하 씨’라고 불렀다.

그가 어머니의 지인이라면, 어머니의 딸인 은하의 이름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야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백이준.

백이준…….

언덕을 내려가는 내내 되뇌던 은하는 드디어 그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해 냈다. 시우와의 대화에서였다.

‘학원비를 대신 내준 것도 그쪽이죠?’

‘아뇨, 그건…… 아마 다른 사람일 겁니다. 백이준이라고, 선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또 한 사람이죠.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까?’

맞아, 백이준.

기억을 떠올린 은하는 번쩍 고개를 돌려 언덕 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준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학원에 도착한 후로도 은하는 ‘백이준’이라는 이름을 되뇌며 그 사람에 대해 내내 생각했다.

시우와의 대화를 제외하고서도, 어디선가 분명 그 이름을 접했던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무언가를 꼭 떠올려야 한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 은하는 사실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긴 했으나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지는 않았다.

곁에서 도움을 주는 제휘가 ‘무리해서 기억을 되찾을 필요는 없다’고 늘 말해 주는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은하가 생활하는 데에 있어서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어떤 불편함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은하는 지금 생활이 꽤 만족스러웠다.

10대의 기억이 있는 지금의 은하에게 꿈이 있다면, 그것은 애견 미용사가 되는 일이었다.

나라에서 나오는 보훈 연금과 늑대 길드와 협회를 비롯한 주변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꿈을 좇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뿐이랴, 넓은 오피스텔은 은하의 명의인 데다 계좌에는 0을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 쌓여 있기까지 했으니.

돌아올 기억이라면 언젠가는 돌아온다. 은하는 제게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을 살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억지로 닫힌 뚜껑을 힘주어 열어서라도 과거를 꺼내려고 하고 있었다.

‘찾았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한참 서랍장을 뒤지던 은하는 손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닿자마자 그것을 말아 쥐었다.

차라랑…….

서랍 깊은 곳에서 꺼내 든 그 물건은 황금색 군번줄이었다. 은하의 목에도 똑같은 디자인의 군번줄이 걸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은하의 것과는 상이했다.

마침 구름 뒤에 숨어 있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며, 어두웠던 방 안이 아슴푸레 밝아져 왔다.

은하는 손에 쥐고 있던 군번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발견했다.

백이준

──그곳에 새겨진 이름 세 글자를.

이 군번줄은 오전에 만났던 그 남자의 물건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왜 자신이 이것을 가지고 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고 추측도 할 수 없었다.

은하는 왼손에 군번줄을 거머쥔 채 오른손을 들어 군번줄 표면을 살짝 쓰다듬어 보았다.

그 순간, 오전에 맡았던 그의 체취가 코끝에 은은하게 재생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진하고도 신비로운, 정신이 혼미해질 듯한 향수 냄새를 떠올리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아렴풋한 기억이 뇌리에서 잔잔히 물결치기 시작했다.

‘은하 너는 12신수 중에 용이 ───. 제일 ──니까.’

‘나중에 우리── 미용──.’

드문드문 끊긴 기억.

그 속에서 ‘백이준’은 웃고 있었다.

흐릿한 그 기억은 마치 욕조 안에 미온수가 퍼지듯 조금씩, 동시에 확실히 은하의 뇌리에 뻗어 나갔다. 그에 따라 꾹 닫혀 있던 은하의 입술이 조금씩 스르륵 벌어졌다.

‘난 있잖아, 너 같은 사람이 헌터라는 사실이 싫어.’

찌릿─

“읏…….”

돌연 은하가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이마 근처 모세 혈관이 모조리 터져 나갈 듯한 극심한 두통에, 결국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상체가 어둠 속에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감히, 몬스터 주제에.’

‘그 애는 너 따위 괴물이 흉내 낼 만한 애가 아니야.’

두통이 방아쇠였던 양,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일렁이던 단편의 기억들이 소용돌이처럼 몰아쳐 은하를 거침없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은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미안, 은하야.’

‘죽지 말고 살아남아.’

‘난 나보다 차은하, 네가 더 소중하니까.’

“으…… 읏.”

은하는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고꾸라지듯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은하의 손에서 이준의 군번줄이 힘없이 흘러내리는 순간,

“언니!”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루시가 은하의 침실로 달려왔다.

“루…….”

그러나 고통에 잠식된 은하는 루시의 부름에 응답해 주지 못한 채,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눈을 떴을 때, 웬일인지 은하는 침대에 누운 상태였다. 두통 탓에 정신을 잃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제는 에단과 만나는 꿈도 꾸지 않은 채 그대로 숙면했다. 그래서일까, 몸 상태는 오히려 평소보다 좋은 것 같았다.

은하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제 바닥에 떨어트린 이준의 군번줄은 은하의 베개맡에 고이 놓여 있었다.

“언니이!”

어디선가 작고 검은 그림자가 퐁! 날아와 은하 품에 안겼다. 루시였다.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데에……!”

루시는 엉엉 울며 은하의 가슴팍을 팡팡 두드렸다. 루시의 울음소리를 들은 것일까, 주방 쪽이 소란하더니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은하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조심조심 문이 열렸다.

“……선배.”

제휘일 줄로만 알았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푸른 눈동자의 청년, 신시우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은하가 쓰러진 직후 깜짝 놀란 루시는 바로 은하의 가방을 뒤적여 휴대전화를 꺼냈고, 앞발을 열심히 움직여 전화번호부를 뒤졌다고 했다.

적지 않은 전화번호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시우의 번호였고, 마음이 급했던 루시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루시의 전화를 받은 시우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액셀이 터질 듯 차를 몰아 여기에 도착했다고.

“괜찮은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큰일은 아니었고, 억지로 기억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몸이 좀 놀랐나 봐요.”

“기억…… 이요?”

시우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기억을 찾으려 했다는 은하의 말에 대한 의문이 뒤섞인 얼굴이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무리를 해서까지 기억을 찾고자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길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은하가 지금까지 기억을 되찾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았다는 건 시우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녀에게 기억을 되돌릴 만한 훈련이나 치료를 굳이 강요하거나 제안하지 않았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선배가 지금 이대로가 좋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시우는 은하와 시선을 맞추고 진지한 어투로 물었다.

“선배, 기억을 되찾고 싶으신 겁니까?”

그 물음에, 이번에는 은하 쪽이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지금까지는 기억을 찾는 일에 그렇게까지 목매지 않았다. 충실한 매일을 보내고 있었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그녀의 까만 눈이 베개맡 황금색 군번줄에,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흰 봉투에 닿았다. 불멸. 그 두 글씨를 눈에 담은 은하는 손끝으로 하얀 침대 시트를 살짝 말아 쥐었다.

“……네, 찾고 싶어요.”

침대 곁에 앉아 있던 시우는 호수처럼 푸른 눈에 그녀를 잠시 담았다가 이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함께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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