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3 – 데자뷰(Deja vu)
(299/306)
외전 03 – 데자뷰(Deja vu)
(299/306)
#외전 03 – 데자뷰(Deja vu)
2023.05.26.
딸랑─
유리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꽃을 다듬고 있던 꽃집 사장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특별한 단골손님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어머, 또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이제는 꽤 안면을 튼 사이인지라 은하 역시 엷게 웃으며 목례했다.
기억을 잃은 후에도 기존에 다니던 꽃집을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꽃집이 은하 어머니의 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비록 은하는 이 꽃집에 대한 것도, 사장에 대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으나 꽃집 사장은 달랐다.
그녀는 눈앞의 이 검은 머리카락의 젊은 여자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헌터라는 것도, 그리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묘비를 한 달에 한 번은 꼭 찾는다는 것도, 그때마다 이곳에 들러 생전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하얀 작약을 사 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런데 어쩌죠. 오늘 오실 줄 알았더라면 작약을 남겨 두었을 텐데, 방금 전 어느 손님이 사 가신 하얀 작약 꽃다발이 마지막이어서요…….”
꽃집 사장은 죄송스러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렇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작약 개화 시기가 아니다 보니 매입하는 양도 한계가 있을 테고, 오늘 방문할 것이라 미리 알리지 않았던 것은 은하 쪽이었으니.
애초에 이 주변에 꽃집은 이곳뿐이라 이제 와서 하얀 작약을 찾기 위해 멀리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그렇지 않아도 에단의 꿈 때문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더욱 그랬다.
“그럼 어떤 것이든 괜찮은 꽃으로 한 다발 부탁드릴게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쁘게 만들어 드릴게요.”
꽃집 주인이 백색 꽃들을 곱게 묶어 꽃다발을 완성하는 사이, 은하는 잠시 가게를 둘러보았다.
벽면에는 은하의 친필 사인이 나무 액자에 큼지막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 은하가 꽃집 주인에게 건네주었던 사인이라고 했다.
현재 사인하는 방법조차 잊어버린 은하로서는, 벽에 떡하니 붙어 있는 제 사인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딸랑─
맑은 유리종 소리와 함께 가게를 벗어난 은하는 하얀 데이지와 리시안셔스로 조화를 이룬 꽃다발을 품에 안고 어머니의 묘비로 향했다.
“엄마, 나 왔어.”
휘이이잉.
싸늘하고 건조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은하는 차게 식은 묘비 앞에 꽃다발을 조용히 내려 두었다.
죽음의 기로에서 살아 돌아온 은하의 기억은 19살 이후로 뚝 끊겨 버렸다. 마치 누군가가 ‘헌터로서의 기억’만 깔끔하게 잘라 낸 듯이 말이다.
그로 인해 은하는 10대 시절의 기억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상기하게 되었다. 부서진 피아노 밑에 깔려 있던 어머니를 본 것이 바로 어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뿐인가. 아침 식사를 챙겨 먹으라거나, 밤에 일찍 자라거나, 가끔은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놀러 오라던 엄마의 잔소리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은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도 난 혼자 왔네.’
10대 시절의 은하는 단 한 번도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것은 1년에 한 번뿐인 생일 파티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제 딸이 혹시 따돌림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는 적당히 잘 어울렸으니까.
다만 어디까지나 ‘적당히’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 놀러 가거나 초대할 만큼 가까웠던 친구는 없었던 것 같다. 누군가를 데리고 오기에는 집이 좁기도 했던 데다, 친구의 집에 가서 자는 일은 엄마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은하는, 엄마한테 언제쯤 친구를 소개해 줄 거니?’
엄마의 말에 은하는 늘 ‘나중에.’ 하고 흘리듯 대답하고는 했었다.
그리고 결국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은하의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
현재에 이르러 돌이켜 보니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하나뿐인 딸이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그들과 잘 지내고 있는지, 친구들과 있을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궁금한 것은 부모라면 당연한 일이었을 테니까.
“……엄마, 미안.”
대답이 없는 비석을 향해 은하가 작게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멍!
가까운 곳에서 강아지가 짧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은하는, 저를 보며 꼬리를 펄럭이다시피 흔들고 있는 강아지를 발견했다.
곱슬곱슬한 흰 털에 풍선처럼 동그란 머리. 애견 미용을 공부하고 있는 은하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견종, 비숑 프리제였다.
‘웬 강아지가…….’
은하는 곧 그 비숑 프리제의 목에 목줄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까맣고 가느다란 목줄을 따라 시선을 천천히 올리자,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옅은 금발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살짝 벌어진 은하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느릿하게 퍼졌다. 이 사람이 견주인가?
베이지색에 가까운 옅은 금발에 은회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선이 얇고 수려한 이목구비 탓에 조금 중성적인 인상을 주는 듯도 했으나, 큰 키에 단단하고 넓은 어깨는 웬만한 성인 남성 이상이었다.
이상하게도, 은하는 이 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은하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고만 있자, 남자가 먼저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
은하는 그제야 남자가 흰 작약 꽃다발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꽃은…….”
‘어쩌죠. 오늘 오실 줄 알았더라면 작약을 남겨 두었을 텐데, 방금 전 어느 손님이 사 가신 하얀 작약 꽃다발이 마지막이어서요…….’
문득 꽃집 사장이 말한 작약 꽃다발을 사 갔다는 사람이 이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남자는 이곳에 오기 위해 저 꽃다발을 샀다는 소리가 되는데…….
“저희 엄마와 아는 사이신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 작약은 은하의 어머니가 좋아하던 꽃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 대답 없이 그저 빙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살짝 은하를 지나친 그는 어머니의 묘비 앞에 작약 꽃다발을 내려 두었다.
그런데.
‘손이…….’
남자의 왼손을 본 은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쇳빛의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저것은 분명 의수(義手)였다.
어째서일까.
저 손을 보는 순간 가슴 한편이 저릿하게 아려 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굳은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 동정? 그게 아니라면 당황?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죄책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은하는 왜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저기.”
그를 향해 은하가 살짝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멍! 멍멍!
얌전하게 꼬리를 내리고 앉아 있던 강아지가 돌연 은하 주변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꼬리를 어찌나 세차게 흔드는지, 저 꼬리를 프로펠러 삼아 곧 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쓰다듬어 주시겠어요?”
어느새 기도를 마친 남자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은하는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손을 뻗어 강아지의 머리를 만졌다.
헥헥헥…….
강아지는 기분이 좋은지 분홍색 혓바닥을 길게 늘어트리며 입을 벌렸다. 꼭 웃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래서인지 조금 긴장되어 있던 은하의 입가도 스르륵 풀렸다.
“……순하네요.”
“마음에 드는 사람에 한해서요. 늘 그렇지는 않아요. 원래는 꽤 말썽꾸러기인데, 그쪽이 마음에 드는 거겠죠.”
“저한테 개 냄새가 나나 봐요.”
은하의 말에 조금 놀랐다는 듯이 남자의 눈이 커졌다.
“……강아지를 키우시나요?”
“아뇨, 집에서 키우는 건 고양이…… 인데, 애견 미용 학원을 다니거든요.”
“아, 그랬죠.”
“네?”
“아니, 아닙니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원래의 부드러운 미소를 다시 입가에 띠었다.
“애견 미용을 공부하고 계시는군요.”
“네. 평소에 강아지와 접촉할 일이 많다 보니, 고양이 냄새보다는 강아지 냄새가 훨씬 더 많이 배어 있을 거예요. 이 아이도 그걸 알고…… 앗.”
대화를 하느라 손이 멈춰 있었던 탓인지, 강아지가 조르듯 은하의 손을 핥아 댔다. 은하는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후후 소리 내어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더 만지라는 거지?”
옳지, 착하다. 은하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강아지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벌러덩 배를 까고 잔디 위를 굴렀다.
은하는 녀석이 만족할 때까지 머리며 배며 뺨이며 비비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강아지에게 정신이 팔린 나머지 옆에 선 남자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채로.
“……학원, 재밌어요?”
“네?”
강아지와 놀아 주던 은하가 문득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 네. 정말 재밌어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은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남자가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것은 이전의 상냥하지만 형식적이기도 했던 그런 미소가 아닌…… 정말로 안심했다는 듯이 표정을 포근히 무너뜨린 미소였다.
강아지와 시선을 맞추느라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은하 곁으로, 남자 역시 자연스레 다가와 앉았다. 그러자 향수 같기도, 바디 코롱 같기도 한 특이한 체취가 코끝에 훅 다가왔다.
진하지만 결코 역하지는 않고, 어지럽기는 하나 불쾌하지도 않은…… 그런 신비롭고 묘한 향이었다.
“미국 유학은 생각 없으세요?”
“네?”
“예전에, 유학을 준비한다고 들었던 것 같아서요.”
“아아…….”
엄마가 이 사람에게 그런 것까지 얘기했던 걸까? 생각보다 가까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그럴 생각이 있다면 제가 도와줄 수 있어요. 미국에는 조금 연고가 있어서.”
“그러고 보니…….”
은하의 까만 시선이 살짝 위로 올라가 남자의 옅은 금발에 닿았다.
“금발이네요.”
“……!”
소리 없이 미소를 머금는 은하 앞에서, 남자가 멈칫 굳었다. 남자의 귓가로 그날의 대화가 선명히 재생되었다.
‘미국에서 왔다고 했지?’
‘어? 아, 응. 아버지가 미국인이거든.’
‘그래? 그러고 보니 금발이구나.’
솨아아아─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앙상한 나뭇가지에 애써 매달려 있던 나뭇잎들이 기어코 자리를 잡지 못하고 눈송이처럼 공중에 흩날린다.
나뭇잎들은 두 사람을 감싸듯 주변을 빙글빙글 춤추다가 이내 바닥 위에 사뿐히 가라앉았다.
어딘가 넋을 놓은 듯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던 이준은 이내 쿡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맞아요. 금발입니다.”
그가 웃는 이유에 대해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지, 은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살짝 눈매를 접었다.
“그래서, 대답은요?”
유학에 대한 이야기였다. 은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어머니의 묘를 쳐다보았다.
“지금은 생각 없어요.”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지만─.”
묘비를 응시하던 까만 눈동자가 이번에는 조금 더 너머, 서울의 풍경을 넓게 담았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서요.”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이곳 한국에서 기억을 되찾는 일 말고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은하의 대답에 남자는 “그렇군요.” 하고 짤막하게 답한 남자가 곁의 강아지를 느릿하게 쓰다듬었다.
“그럼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이 녀석도 미용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은하 입장에서는 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다. 정황상 어머니의 지인이라고 추정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은하에게 이 남자는 초면이었으니. 게다가 은하는 아직 정식 애견 미용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당혹스럽거나 싫은 기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네, 기회가 닿는다면.”
조금 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 보는 남자가 이토록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숙하고…… 어딘가 그립기까지 한 이 기분.
혹시 발아래에서 천진난만하게 배를 드러내며 꼬리를 흔드는 이 녀석 덕분일까?
“……이름이 뭐예요?”
강아지의 통통하고 따듯한 배에 손을 얹고, 은하가 물었다. 남자의 시선도 똑같이 아래로 떨어져 강아지에게 닿았다.
“……윌리엄.”
남자가 나지막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윌리엄은 약 30년도 전에 남자가 키우던 강아지의 이름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당시의 윌리엄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난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눈앞의 이 녀석의 이름은 ‘윌리엄 2세’ 정도 되겠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자질구레한 이야기 따위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뇨, 당신 이름이요.”
강아지, 윌리엄의 배를 쓰다듬고 있던 은하가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그녀가 알고 싶었던 것은 강아지의 이름보다, 남자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내 이름은…….”
남자는 망설이듯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다. 그러나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백이준이라고 합니다, 은하 씨.”
솨아아아─
다시 한번 아까와 비슷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나뭇잎들은 그날의 기억을 고스란히 싣고 이준에게 다시금 다가왔다.
낡은 군용 수송 차량.
가로등 하나 없던 비포장도로.
맛도 영양도 없는 비상식량을 손에 든 채 웃고 있었던…….
‘참. 내 이름은 백이준이야.’
──그 시절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