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02 – 꿈속의 그대 (298/306)


#외전 02 – 꿈속의 그대
2023.05.25.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앗, 차 헌터님!”

오피스텔 입구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박제휘였다.

“먼저 올라가 있을까 하다가 곧 마치실 시간인 것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아! 짐 주세요. 들겠습니다.”

영차! 하고 은하의 짐을 건네받은 제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늘 대표님이 급히 해외 출장을 가실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제가 대신해서 학원까지 모시러 갔을 텐데요.”

“그럴 필요 없어요. 가깝기도 하고.”

“그래도요. 전 헌터님의 매니저잖아요.”

박제휘. 그는 스스로를 담당 매니저라고 주장하며, 병원에 입원해 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은하의 주변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은하는 당연히 제휘에 대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기에 ‘이제 매니저 일은 됐다.’며 그의 조력을 사양했지만…….

‘이, 이제 제가 필요 없어졌다는 말씀이신가요……?’

눈물을 글썽이며 초라하게 어깨를 떨어트리던 그의 앞에서, 어떻게 더 사양할 수 있었겠는가.

이후에도 제휘는 은하의 일을 돕는 것이 인생의 큰 기쁨인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은하 역시도 그가 곁에 있는 것이 좋았다. 특히 제휘가 차린 밥상은 사 먹는 것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마치 은하가 좋아하는 메뉴를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언제나 은하의 입맛에 맞춰 식사를 준비해 주었으니까.

아직도 그가 자신의 담당 매니저라는 것이 실감이 나지는 않았지만…….

“매니저님.”

“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제휘가 힐끔 뒤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은하가 부드럽게 눈매를 휘었다.

“고마워요.”

“아…….”

제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더니 시큰한 코를 훌쩍였다.

“처음이네요.”

“뭐가요?”

“기억을 잃은 후, 저를 매니저님이라고 불러 주신 것 말입니다.”

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네요. 제휘는 은하에게 먼저 타라며 손짓했다.

두 사람은 늘 그렇듯 함께 17층으로 향했다.

“제가 열겠습니다.”

앞서 걸어간 제휘가 익숙한 듯 현관문 비밀번호를 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사이,

“……?”

은하는 현관 옆에 설치된 조그마한 무인 택배함 안에, 무언가 얇은 종이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그것을 확인해 보았다. 새하얀 봉투에 한자 두 글자가 선명하고 굵게 인쇄되어 있었다. 은하는 더듬더듬 그 한자를 읽어 보았다.

‘불…… 멸?’

그리고 그 순간,

찌릿─

날카롭고 미세한 바늘이 쿡,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이마에 손을 짚은 은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헌터님?”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가 있던 제휘가 무얼 하느냐는 듯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 가요.”

은하는 학원 가방 안에 흰 봉투를 슬쩍 집어넣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이후 제휘는 마법이라도 부린 듯 뚝딱 식사를 차렸고, 식탁 앞에서 은하는 어제 있었던 일을 제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어제 학원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신시우와 함께 C-급 게이트에 난입했던 일 말이다.

“네에?!”

밥을 먹다 말고 제휘가 수저를 툭 떨어트렸다. 놀란 듯 크게 확장된 그의 두 눈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어제 그 게이트에, 헌터님이 가셨다고요?”

“네. 마침 그쪽 대표와 함께 있었던 덕분에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거든요.”

아니, 대표님은 내게 그런 말씀은 하나도……. 입을 벙긋거리던 제휘는 이내 핫!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그럼…….”

제휘의 눈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서렸다. 그것을 알아챈 은하는 젓가락을 쥐고 있던 손을 살짝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가신 겁니까?”

“헌터라고 했잖아요.”

“네?”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해도…… 저는, 헌터였으니까.”

은하는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갔어요.”

“아…….”

그래, 헌터님은 그런 사람이다.

제휘의 입가에도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군요.”

기억을 잃었든 잃지 않았든 차 헌터님은 역시 차 헌터님이야. 그 사실에 안도가 되었다.

“기억을 찾는 것은 전혀 급한 일이 아니니까요. 무리하지 마세요. 아, 밥 더 드릴까요?”

“네, 한 공기만.”

“국도 더 필요하시면 말씀하시고요!”

오순도순 식사를 마친 뒤, 제휘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은하는 그를 도와 그릇 정리를 시작했다. 그동안 아까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매니저님, 혹시 불멸이라는 길드에 대해 아시나요?”

“불멸이요? 당연히 알죠.”

싱크대 앞에 서 있던 제휘가 슥 뒤돌아보았다. 헌터님 입에서 갑자기 불멸 이야기가 나오다니.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닐 테고…….

“불멸은 갑자기 왜요?”

“집 앞에 이런 게 와 있어서.”

“이건…….”

제휘는 고무장갑을 벗고 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벌써 시기가 그렇게 됐군요.”

“시기요?”

“제천대성의 기일 말입니다. 사실 제천대성은 남해안 게이트에서 전사했으니 따지고 보면 기일은 11월이 되어야겠지만, 제천대성의 사망이 확실시된 것이 1월이기 때문에 기일 역시 1월에 지내는 모양이더라고요.”

그의 생일이 1월이기도 했고요. 거기까지 말한 제휘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당시 그들에게 제천대성의 죽음을 알렸던 건 다름 아닌 헌터님이시랍니다.”

“……제가요?”

“네. 언노운 게이트에서 가져온 그의 도복 자락을 직접 불멸 길드원들에게 건네셨죠.”

“…….”

당연하게도, 기억나지 않았다.

제천대성.

은하는 제휘의 입에서 나온 그 이명을 나직이 되뇌어 보았다. 처음 입에 담는 이명인 만큼 낯설기도 했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도 들기도 했다.

“헌터님과는 그래도 꽤 인연이 있었던 자입니다. 특히 그분은 헌터님을 ‘아우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었죠. 처음에는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여겼지만,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달그락달그락.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이어지고 난 뒤, 제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시려고요?”

“……모르겠어요.”

은하는 흰 봉투를 식탁 위에 가지런히 올려 두었다.

불멸. 그리고 제천대성.

그들과 꽤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정작 은하에게는 기억이 없었다.

고인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자신이 기일제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 알 수 없었다.

“…….”

식탁 위 흰 봉투를 한참 물끄러미 쳐다보던 은하는 스윽 등을 돌려 다시금 찬장 정리를 시작했다.

* * *

그날 밤.

고요한 적막만이 감도는 쓸쓸한 공간.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그곳은 사방이 희뿌연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은하는 그곳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모를 그 공간을 정처 없이 떠돌던 중,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세웠다.

……아.

또 그 꿈이구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은하는 이끌리기라도 하듯 뒤쪽으로 힐끗 고개를 돌렸다.

“왔어?”

자욱하던 안개가 스르륵 걷히며 곱게 휜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훌쩍 은하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 일찍 자는 습관이 중요하다는 거 몰라?”

차랑─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차갑게 식은 금속음이 들려왔다. 그의 양쪽 손목을 감고 있는 금빛 쇠사슬로부터였다.

저 쇠사슬은 아주 먼 곳까지 이어져 있었는데, 고무처럼 늘어나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가 어디로 가든 기어코 따라와 그를 속박했다.

그것이 귀찮고 답답할 법도 한데, 그는 이런 것이 익숙하다는 듯 쇠사슬을 없는 것처럼 여기곤 했다. 은하는 그것이 신기했다.

신기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듯 허물없이 자신을 대했다.

“봐, 은하. 여긴 정말 재미없는 곳이야. 아무것도 없잖아?”

네가 하루라도 오지 않으면 난 심심해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 남자는 앓는 소리를 내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너도 이리 와서 앉으라는 듯,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손바닥으로 두드린다.

어차피 아침이 밝을 때까지 이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수차례의 경험으로 그것을 습득한 은하는 얌전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로부터 그는 은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오늘은 어떤 것을 먹었는지, 무슨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사실은 배다른 남매였고, 양쪽 부모님들까지 그 사실을 알았어.”

─심지어는 오늘 시청한 드라마의 내용이 어땠는지까지도 말이다.

그게 그렇게 궁금할까. 은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면서도, 왜 이런 시시한 것들을 궁금해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좋다.”

은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에단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좋다니 뭐가?”

“그냥. 이렇게 네 얘기를 듣는 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치 고양이가 갸르릉 소리를 내는 듯, 조금은 간지럽게 귓가를 울렸다.

──에단.

이 꿈속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가르쳐 준 이름이었다.

물론 은하는 에단에 대한 기억 따위 전혀 없었다. 눈앞의 이, 보통의 인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외모 역시도 말이다.

피처럼 새빨간 눈동자에 길게 찢어진 눈매는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데, 졸린 듯 나른한 눈빛 덕분에 사나운 기색이 중화되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특히 가볍게 곱슬곱슬한 분홍색 머리카락은…….

‘양털 같아.’

저를 바라보는 은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정면을 응시하던 에단의 시선 역시 그녀에게로 힐끔 옮겨 왔다.

“왜?”

“……머리카락이 꼭 양털 같아서.”

“아, 내 머리?”

에단은 제 손가락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빙글빙글 돌리더니,

“만져 볼래? 너라면 괜찮아.”

은하 쪽으로 머리를 슥 기울였다.

만지라니. 굳이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은하는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아니, 괜찮─.”

“얼른.”

그러나 에단은 은하에게 들이민 머리를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의 재촉에 결국 은하의 손이 쭈뼛쭈뼛 뻗어 나가 분홍색 머리카락에 닿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아니 생각 이상으로 보드랍고 폭신폭신한 감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이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이 처음인 것 같지가 않았다.

‘분명 이전에도…….’

찌릿─

기억을 더듬으려는 순간, 늘 그렇듯 두통이 찾아왔다. 마치 미세한 바늘로 뇌를 찌르는 듯한 두통 말이다.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던 은하의 손가락이 멈춘 것을 깨달았는지, 얌전히 머리를 맡기고 있던 에단이 흘긋 시선을 들었다.

“왜 그래?”

“아니, 잠깐 두통이.”

은하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건조하게 답했다.

“요즘 들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이래.”

“기억?”

기분 탓일까. 에단의 얼굴이 조금 굳는 것처럼도 보였다.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짧게 대답한 은하는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내리고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덧붙였다.

“별거 아냐. 금방 괜찮아지니까.”

그러자 에단이 문득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굳이 찾아야 하나.”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은하가 까만 눈동자를 옮겨 그를 바라보았다.

‘굳이’라니. 이곳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던 건데…….

“넌 내 기억이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아?”

은하가 솔직하게 묻자 에단이 “음.” 하고 턱을 괴었다.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난 네 기억이 돌아오든 그렇지 않든 크게 상관없거든. 오히려 그 지경까지 갔는데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하지만…….

말끝을 흐린 그가 얼굴을 가까이 훅 들이밀었다. 묘하게 익숙한 특유의 체취가 코끝에 닿았다.

“이대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기는 해.”

“어째서?”

“그편이 공평하니까.”

“……공평?”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에단은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네 주변 녀석들보다 내가 너를 늦게 만났다는 게.”

그의 붉은 두 눈이 은하를 담았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동자 속에는 오롯이 은하만이 담겨 있었다.

기억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매일 꿈에서 만나다 보니 에단과는 꽤 가까워졌다.

‘하지만…….’

에단은 종종 이런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곤 했다. 갈망하듯, 조르듯, 홀리듯.

그 앞에서, 은하는 늘 그렇듯 덜컥 말문이 막혀 버렸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은하는 그가 다가온 거리만큼 상체를 슬쩍 뒤로 뺐다.

그 순간 에단의 붉은 두 눈이 살짝 가라앉는 것이 보였지만, 곧 원래의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잠시간의 침묵 후, 은하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에단.”

“응.”

“너와 난, 무슨 관계였어?”

──도대체 어떤 관계였기에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거야?

은하의 물음에 에단의 움직임이 일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한참 뒤, 그가 한쪽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글쎄. 그런 건 모르겠지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웃었다.

차랑─

쇠사슬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살포시 미소를 띠었다.

“은하, 나에게 넌 유일한 존재야.”

“유일…….”

은하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쉬이이이…….

돌연 그들을 감싸고 있던 주변의 안개가 짙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따스한 물에 온몸을 담근 듯 나른하고 몽롱한 기분.

은하는 몇 번이고 이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벌써 아침인가 보네.”

주변을 가볍게 돌아본 에단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깨달았을 때에는 그도, 그리고 은하도 점차 안개에 둘러싸여 그 모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에단, 그 말은 무슨…….”

“내일 또 와야 해.”

안개가 짙어짐에 따라,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소리 역시 점차 멀어져 갔다.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계속.”

뿌옇게 번지는 시야 가운데,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뺨에 닿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결국 그 말의 의미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보지 못한 채, 은하는 늪처럼 저를 덮쳐 오는 수마에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었다.

“자나 깨나 개조심, 뱀조심. 알지?”

정신이 완전히 끊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에단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음.”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침실 창가로부터 이미 햇살이 부서지듯 쏟아지고 있었다.

“언니, 뭐 해! 이러다 늦겠다!”

통, 통, 통…….

솜처럼 가볍고 폭신한 것이 연신 배를 두드리는 듯한 감각.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배 위를 팡팡 두들기는 검은 고양이가 보였다.

자그마한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목에 달린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루시…….”

사람처럼 능숙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이 신기한 고양이는, 은하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이곳에 있던 고양이다.

과거에 은하와 계약했던 신수였지만, 지금은 신수의 힘을 잃고 평범한 고양이가 된 모양이다.

말을 한다는 시점에서부터 이미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다.

신시우의 말에 따르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은하가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고양이가 자신의 힘을 소진한 덕분이라고 했다.

“혹시 또 그 꿈을 꾼 거야?”

루시가 동그란 황금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물었다.

꿈…….

은하는 졸린 눈을 하고 스르륵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살짝 고개를 돌렸다.

침대 곁에 놓인 미니 테이블. 그 위에는 빨간 목도리가 곱게 접혀 있었다.

그 선명한 붉은색을 보고 있자니, 꿈에서 만났던 에단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언니, 이럴 때가 아니야! 오늘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고 했잖아.”

“……아.”

무심결에 목도리를 향해 손을 뻗던 은하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확인했다.

현재 시간은 오전 9시 33분.

루시의 말대로였다. 오늘은 모처럼 오후부터 수업이 시작되기 때문에, 오전 중에 꼭 가야 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꿈 때문인지 늦잠을 자고 말았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는 방문을 열고 얼굴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직행했다.

텅 빈 침실 안에 남은 것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새빨간 목도리와,

“흠냐아…… 언니 냄새…….”

흰 침대 시트 위에서 크게 하품을 하는 검은 아기 고양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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