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1 – 기다림
(297/306)
외전 01 – 기다림
(297/306)
#외전 01 – 기다림
2023.05.24.
서울 강남구 수서동. 그곳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4대 길드 중 하나였던 불멸 본부가 위치해 있었다.
제천대성 유환의 죽음 이후 한번 기우뚱했던 불멸 길드. 비록 예전만큼 위용이 넘치는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새로운 마스터 도성윤의 통솔 아래 조금씩이나마 이전의 명예를 찾아가고 있었다.
가죽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성윤은 쥐고 있던 술잔을 홀짝였다.
“다음 주군.”
그 곁에서, 그의 절친한 동료이자 불멸의 부마스터를 맡고 있는 허재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시간이 참 빠르지.”
벌써 형님의 기일이 돌아오다니 말이야. 손목을 움직여 술잔을 느릿하게 돌리던 성윤의 입가에 쓴 미소가 걸렸다.
“그나마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너마저 없었다면 나는…….”
말끝을 흐린 성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거워진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민은 그의 등을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쳤다.
“표정 펴라, 자식아. 내가 죽기는 왜 죽냐?”
호통을 치듯 큰 목소리를 내는 그는 허세가 아니라 정말로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당시 유환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조디악에게 반죽음을 당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재민은 헌터 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까지 재활 치료를 이어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홀로 불멸 길드를 이끌 성윤을 생각하여 사무직을 담당하겠다며 부마스터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뭐, 위험하긴 했어도 멀쩡히 살아 있고 힘도 너보다 더 세니까 걱정 마라.”
“……확실히 그런 것 같네.”
성윤은 재민에게 맞은 등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재민 역시 그와 비슷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맞은편 소파에 털썩 기대듯 앉았다.
“이 방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말이야, 아직도 형님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것 같지 않냐?”
“뭣들 하냐, 다들 얼른 앉고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자! ……하고?”
“어, 딱 그거.”
킥킥 웃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쳐다본 방향에는 벽 전면에 술병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있는 술들은 하나같이 유환이 애지중지 아껴 가며 모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는 성윤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저 값비싸고 희귀한 술들은 유환이 직접 초빙한 손님이거나, 그가 특별히 아끼는 자만이 넘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명을 달리하기 직전의 유환은 저 귀한 술들을 어느 한 헌터와 함께 비우기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형님의 기일제에 그분께서도 꼭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분.
성윤이 말하는 ‘그분’이 누구인지, 재민은 단박에 눈치챘다.
“연락, 보냈냐?”
“일단은. 아직 아무 소식도 없는 걸 보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신 거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
“아직 기일까지는 일주일이나 남았고 어쩌면 그사이에 그분의 기억이 거짓말처럼 돌아올지도─.”
“그러고 보니.”
성윤의 말을 잘라먹은 재민이 테이블 위 술병을 집었다.
“오는 길에 내가 꽤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재밌는 이야기?”
“듣고 싶냐?”
“뭔데.”
성윤의 물음에 재민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털어 내듯 꿀꺽꿀꺽 술을 비운 그가 짓궂은 미소와 함께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 냈다.
“어제 반하동 근처에서 C급 게이트가 출현했다고 해.”
기대했던 종류의 답이 아니었던지 성윤의 굵은 눈썹이 꿈틀 떨렸다.
“C급 게이트가 뭐 어쨌는데?”
제주도 사변이 있고 약 1년이 지났다. 조디악과 그 수장 데바를 쓰러트리고 나서도, 게이트나 몬스터는 여전히 등장했다.
그러니 C급 게이트가 출현했다는 소식은 딱히 귀담아들을 만한 뉴스가 아니었다. 뭐 대충 소규모 길드가 낙찰받아서 토벌했을 테니까.
“게이트가 출현했던 곳이 상가였나 봐. 거기 건물 전체가 거의 무너졌다던데.”
“그래서?”
“상가 2층에는 도자기 공방이 있었는데, 거기 주인이 대피 타이밍을 놓쳐서 꼼짝없이 게이트에 휩쓸릴 뻔했다더라.”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지 않겠어? 재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한번 벌컥벌컥 술을 입에 털었다.
그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성윤은 미간을 좁혔다.
“하려는 이야기가 뭐지? 요점만 말해.”
“자식, 급하긴.”
재민은 탁 하고 빈 술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공방 주인이 게이트에 삼켜지기 직전, 그를 구한 사람이 있었다고 해.”
마지막으로 이어진 재민의 말에, 내내 시큰둥하던 성윤의 표정이 일순에 달라졌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는 젊은 여자였다더군.”
“뭐?!”
성윤이 벌떡 일어나자 그 반동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빈 술병이 바닥 위로 떨어져 쨍그랑! 깨졌다.
“차 헌터님이 복귀하셨다고?!”
“모르지, 그건. 공방 주인은 그냥 ‘검은 우산을 들고 있는 젊은 여자’라고만 했어. 그게 그 사람인지, 그냥 우산을 들고 있던 다른 헌터인지는 확인 못 했고. 하지만 그게 만약 그 사람이 맞다면…….”
소파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재민은 고개를 돌려 창 너머를 응시했다.
“어쩌면 이번 형님의 기일에는,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 * *
늦은 새벽, 경부 고속 도로 위를 달리는 고급 승합차 한 대. 밀리터리 무늬로 꼼꼼하게 래핑이 된 표면, 보닛에는 일곱 개의 별 마크가 큼지막했다.
그 외형은 마치 ‘이것이 대한민국의 4대 길드 중 하나, 군단 길드의 전용 승합차다!’ 하고 광고하고 있는 듯했다.
다만 현재 그 차에는 군단 길드원이 아닌 자가 한 명 타고 있었으니…….
“아, 멀미 나. 운전 좀 젠틀하게 해 줄 수는 없음?”
뒷좌석을 전세라도 낸 듯 두 다리를 뻗고 누워 있던 강아연이 투정을 부렸다.
“아, 예. 죄송합니다.”
군단 길드의 부마스터 배준환이 살짝 속도를 낮추며 핸들을 바로잡았다. 그러자 준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소년, 이 차의 주인이자 군단의 마스터 트릭스터 송민주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불만 있으면 내리든가.”
그리고 준환을 향해 “형, 그냥 편하게 운전해.” 하며 턱짓했다.
“너무하네, 3일 밤낮으로 같은 임무를 수행했는데 지금 나더러 혼자 걸어서 서울까지 돌아가라는 거?”
매정한 놈. 작게 중얼거린 아연은 흑흑 소리를 내며 우는 척을 했다.
“제주도에서 내가 네 목숨을 구해 준 건 벌써 다 잊었나 봐. 사람이 어쩜 그렇게 잔혹하니.”
“아, 시끄럽네.”
그러거나 말거나 민주는 손에 쥔 피규어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녀를 무시했다.
‘고속 도로 한복판에서 두 분이 갑자기 싸우시면 곤란한데…….’
운전을 하고 있던 준환은 룸미러를 통해 두 사람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다행히도 두 사람은 각자 할 일…… 이라기보다는 피규어, 모바일 게임에 빠져 다툼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약 1년 전, 제주도 사변이 있고 난 이후 아연은 적극적으로 헌터 활동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이득 혹은 금액에 따라 움직이던 괴도가 드디어 ‘헌터다운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사설 길드에 가입하고 싶지는 않았던지, 그녀는 곧잘 군단 길드와 함께 움직이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서울이 가까워질 무렵,
“헐!”
뒷좌석에 누워 모바일 게임에 열중이던 아연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놀라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동그래진 눈으로 휴대전화 액정을 응시하던 그녀가, 조수석과 운전석 사이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야, 꼬맹이. 너 알고 있었냐?”
“제천대성의 기일? 그거라면 가기로 했어. 다음 주였던가.”
“아니, 그거 말고. 어제 반하동에 출현한 게이트 말이야.”
그에 대꾸한 것은 민주가 아닌 준환이었다.
“아, 늑대 길드가 낙찰받은 C급 게이트 말씀이시죠? 들었습니다. C급 게이트치고는 오랜만에 고가에 입찰된 모양이던데요.”
“거기에 검은 우산을 든 여자가 나타났다는 것도 들었어?”
“……네?”
운전석의 준환이 멍한 얼굴로 뒤돌아보았다.
“형! 앞! 앞에 봐야지!”
“아.”
황급히 정면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으나 그의 눈동자는 극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실 그것은 옆에 앉아 있는 민주도 마찬가지였다.
“야,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알아야 자세히 말하든 말든 하지. 나도 그거밖에 몰라. 허재민이 메시지로 말해 준 거라서.”
“……그분께 연락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준환이 중얼거렸다. 시끌벅적하던 차 내부가 갑작스럽게 조용해진다. 그 순간 세 사람의 머릿속에는 같은 인물이 떠올랐다.
“아니, 됐어.”
오랜 침묵 끝에, 생각에 잠겨 있던 민주가 짧게 입을 열었다.
“됐다니요, 마스터?”
“만일 거기에 나타난 게 누나 본인이 맞다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겠지. 우리들이 누나의 기억이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건, 늑대 형이나 매니저 형이나 다 알고 있잖아.”
“하지만…….”
“무엇보다 정말 누나가 기억을 찾았다면, 지금까지 우리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을 리가 없어.”
민주는 멈추어 있던 손을 다시 움직이며 피규어를 만지작댔다.
뒷좌석에 누운 아연은 멍하니 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새까만 차 천장 가운데, 아연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은하의 모습이 떠올랐다.
제주도 사변 당시, 검은 불길에 휩싸여 고통스러워하던 은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고는 하지만, 거의 1년 내내 병원에 갇혀 있다시피 한 그녀를 만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연이 누구던가. 온갖 길드와 협회의 눈을 피해 돈이 될 만한 게이트를 취하던 괴도가 아닌가. 아무리 경비가 삼엄하다고 해도, 그깟 병원 하나 뚫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꼭 은하를 만나고 싶었던 아연은 그녀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아무도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했고, 염원하던 은하와 재회했다.
그런데…….
‘누구시죠?’
새하얀 병실 커튼이 흩날리는 아래서, 은하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긴 개인 병실이에요. 길을 잃은 거라면 사람을 불러 줄게요.’
‘아, 아니…… 언니, 나는…….’
그녀는 아연의 얼굴도, 이름도,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딸깍딸깍. 고요해진 차 안에서 피규어를 만지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나도 그러려고 했음.”
뒷좌석에서 몸을 뒤척인 아연은 벅벅 눈가를 훔쳐 냈다.
아, 보고 싶다. 우리 언니.
* * *
“희윤 씨 알죠? 그 왜, 얼마 전까지 우리 학원에서 2급 준비하던 분 있잖아요. 듣자 하니 지난주에 취업했다더라고요. 청담동에서 호텔이랑 훈련소를 겸하는 엄청 큰 애견 미용실이라던데…….”
강행욱 애견 미용 학원 근처 가로수길. 재잘재잘 떠들던 여자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내 말 듣고 있어요, 은하 씨?”
여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뒤돌아보았다.
솨아아아─
눈송이가 새하얀 꽃잎처럼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가운데,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은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희윤 씨가 어쨌다고요?”
“그 얘기는 이제 됐고, 요새 기운이 좀 없어 보이는데 괜찮아요? 시험 준비하느라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괜찮습니다.”
은하는 학원 가방을 어깨에 바로 메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발끝에서 눈이 밟히는 사각사각 소리가 일었다.
‘방금 분명 누가 날 부른 것 같았는데…….’
몇 걸음 걸어가던 은하는 다시 한번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인도 위에 깔린 새하얀 눈 위에는 다른 발자국 따위는 없었다.
“은하 씨? 뭐 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분 탓이었나.
은하는 걸음을 재촉하며 등원을 서둘렀다. 이윽고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뒤, 가로수 나무 뒤편에 숨어 있던 인영이 조심스레 드러났다.
“…….”
옅은 색소를 머금은 금발 아래, 가라앉은 빛의 은회색 눈동자가 은하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보스? 안 가십니까?”
왼쪽 눈에 안대를 쓴 덩치 좋은 남자가 그를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굳은 듯 제자리에 서서 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그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