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헌터 차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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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헌터 차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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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헌터 차은하
2023.05.23.
강행욱 애견 미용 학원 3층.
다음 강의를 위해 자리를 옮기던 한 청년은 복도 모퉁이에 보이는 익숙한 그림자를 보고 걸음을 서둘렀다.
“앗, 유라…… 아니, 은하 씨!”
멈칫.
모퉁이를 돌던 은하가 제자리에 멈춰 스르륵 뒤돌아보았다. 빨간 목도리를 목에 두른 그녀의 두 손에는 짐이 가득했다.
“미안해요, 아직 새 이름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짐 들어 드릴게요, 주세요.”
한윤호. 한때 은하와 함께 애견 미용 수업을 들었던 대학생 청년은 이제 이 학원의 강사가 되어 있었다.
은하의 짐을 한 아름 껴안은 그는 조금 발그레해진 뺨으로 은하 곁에서 걸었다.
“은하 씨가 다시 학원을 등록할 줄은 몰랐는데, 정말 놀랐어요. 아! 나쁜 의미는 아니에요. 은하 씨는 이제 워낙 유명 인사니까…….”
힐끔.
곁눈으로 은하를 훔쳐보는 그가 짐을 들고 있는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였다.
설마 그 ‘유라 씨’가 흑염의 프린세스였을 줄이야.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녀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잘 믿기지 않았다.
“기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봐요.”
─그녀가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것 역시도.
“네, 아직.”
짧게 대답한 은하는 머리카락을 스르륵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검은 마스크 위로 비치는 그녀의 눈빛은 윤호가 기억하는 대로 차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 차은하.
그녀가 이 학원을 다니고 있다는 것은 학원 종사자와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간부진, 그리고 은하의 주변인 소수를 제외하고서는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가까운 시일 내로 세간에 자연스레 밝혀지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자격증 취득에 집중하고 싶다는 그녀를 배려한 행동이었다.
얼떨떨하기도 하겠지. 세상은 흑염의 프린세스니 영웅이니 추앙하고 있다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어…… 기억은, 어쩌다가 잃게 되신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앗,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잊어 주세요. 괜찮습니다.”
“곤란하지 않아요. 어쩌다가 기억을 잃게 됐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리 대답한 은하는 자연스레 처음 눈을 떴던 날을 떠올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새하얀 병실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은하 곁을 지키고 있던 한 남자는 은하가 눈을 뜬 것을 보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녀에게 뛰어들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헌터님! 정말, 정말로요……! 크흑.’
박제휘. 흑염의 프린세스의 유일한 매니저였다.
환자복 차림의 은하는 그런 그를 보며 얼떨떨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누구……?’
‘……네?’
그 당시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았던 제휘의 표정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으리라. 눈물에 콧물 범벅이 되도록 통곡하던 제휘는 거의 구르다시피 뛰어 의사를 찾았고,
‘심인성 기억 상실인 것 같습니다.’
은하를 본 의사는 그렇게 진단을 내렸다.
‘해리성이라고도 불리죠. 스트레스였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는 것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과거의 일정 기간까지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데바와의 전투를 마치고 병원에서 눈을 뜬 은하는 각성한 이후의 기억, 그러니까 헌터로서의 기억을 모조리 잊은 상태였다. 당연히 제휘는 물론 시우나 이준, 그 밖의 동료들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의 기억은, 세상이 뒤바뀌고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날에 멈춰 있게 된 것이다.
은하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지만, 주변인들에게 있어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억 상실이라니…… 어째서 우리 헌터님이…….’
‘그런 일이 있었으니 기억 일부가 날아갈 만도 합니다. 차 환자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거니까요. 뇌를 포함한 신체의 장기들이 한 번 리셋(Reset) 된 것이나 다름없죠.’
‘그, 그럼 헌터님은 이대로 기억을 평생 찾지 못하는 건가요?’
‘아직까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경과를 지켜봐야겠죠. 꾸준한 치료나 약물 복용도 중요하지만, 가족분들께서 일상에서 기억력 훈련을 도와주시는 것도 무척 중요해요.’
이후 은하가 입원한 병동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르르 찾아왔다. 병실을 나가지 못했던 은하는 창문을 통해 그들을 엿보았는데, 개중에는 방송국 사람들이나 현직 헌터는 물론 심지어 외국인도 더러 섞여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이 병원에 있는 겁니까?’
‘누나는 무사한 거예요?’
‘유럽 헌터 연맹에서 나왔습니다! ’
‘세계 헌터 채널 GHB입니다! 잠시 인터뷰 가능할까요?’
‘X발, 다 비켜! 언니! 은하 언니─!’
그들은 다짜고짜 은하의 병실까지 들이닥칠 기세였다.
제휘와 병원 관계자들이 환자의 안정을 위해 면회는 물론 병동 출입마저 철저히 금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슨 소동이 일어났을지 몰랐다.
이후 은하는 해당 병원에서 자그마치 6개월을 입원했다. 기억 상실은 물론 신체적으로도 많은 부상을 입은 그녀였기에 6개월 입원은 오히려 짧은 축에 속했다.
한편 제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은하에게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네, 미안해요.’
‘아뇨, 아닙니다! 아니에요, 헌터님! 사과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겁니다.’
하지만 정작 은하 본인보다 제휘 쪽이 더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을,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입원을 6개월, 재활 치료를 6개월 마치고 나니 순식간에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한편 은하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던 윤호는 어색한 침묵이 신경 쓰였는지 괜히 허공으로 시선을 옮기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도 마치고 그분이 데리러 오시나요? 그…… 늑대 길드장이요.”
늑대 길드장. 푸른 눈을 한 젊은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이름은 신시우라고 했다.
그가 직접 은하의 병실을 찾은 적은 두 번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면회 및 병동 출입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만은 비교적 자유롭게 병원을 오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그 병원의 주인이자 제휘의 상사라고.
그런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어째서인지 몰라도 지난주부터 은하의 학원 앞으로 꼬박꼬박 그녀를 데리러 오고 있었다.
“글쎄요. 오지 말라고 했으니 안 올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네요.”
“그, 그럼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랑 식사라도 어떠─.”
그때였다.
키야아아옹!
갑작스럽게 나타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윤호의 얼굴을 할퀴어 버릴 기세로 높이 점프하는 것이 아닌가.
“으, 으아악!”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짐을 후드득 떨어트려 버린 윤호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웨, 웬 고양이가…….”
“아, 죄송해요.”
“유, 유라 씨가 키우는 고양이인가요?”
“네, 그렇게 됐어요.”
은하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검은 고양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루시, 여기까지 따라 들어오면 안 된다고 했지?”
「언……! 미야아옹…….」
뭐지? 저 고양이 방금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수업 끝날 때까지 집에 가 있어.”
「냐, 냐아…….」
은하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검은 고양이는 목의 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귀와 꼬리가 축 처진 것이 어딘가 조금 토라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짐 들어 줘서 고마워요, 민호 씨.”
바닥에 떨어진 짐을 가볍게 들어 올린 은하는 꾸벅 상체를 숙이더니 강의실을 향해 사라졌다.
“아, 은하 씨……!”
뒤늦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난 윤호는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민호가 아니라 윤호인데…….”
어쨌든 오늘도 데이트 신청은 글렀구나.
하긴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는 해도, 나 같은 놈이랑 비교가 되는 사람이 아니다. 무엇보다…….
“…….”
윤호의 눈이 힐끔 복도 창문을 향했다. 건물 아래에 주차된 검은 차량. 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윤호가 보아도 억 소리 나게 비싼 차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차였다.
선팅이 어찌나 짙은지 내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저 차는, 은하가 이 학원을 방문할 때마다 꼭 함께 나타나고는 했다.
이제 윤호는 저 차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민호면 어떻고 윤호면 어때.”
어차피 나한테는 기회조차 없는데.
에휴, 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 윤호는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 * *
애견 미용 학원 건물 앞.
근처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 탓에, 시우는 맞은편 카페 건물 아래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수업을 마치고 건물을 빠져나오는 은하가 보였다. 옆에는 은하의 또래로 보이는 여성이 함께였다.
“내일은 원장님이 직접 모의시험을 연대요. 잘할 수 있을까 너무 긴장돼요.”
“괜찮을 거예요.”
“아! 내일은 조금 일찍 만날까요, 우리? 내친김에 점심도 같이 먹고, 학원에서 같이 연습하는 건 어때요? 나도 알바 끝나자마자 바로 올게요.”
쏟아지는 빗줄기 속, 시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응시했다. 또래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의 은하는 정말 평범한 20대 여성처럼만 보였다.
한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우가 찰박, 물웅덩이를 밟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선배, 수업은 잘 끝났습니까?”
그러자 두 쌍의 시선이 고스란히 시우에게로 옮겨졌다. 은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자는 시우를 보자마자 “어머…….” 하고 입을 막았다.
“그, 그럼 은하 씨! 내일 봬요.”
여자는 찡긋하고 의도를 알 수 없는 윙크를 하더니 후다닥 자리를 비켰고, 그곳에 남은 것은 은하와 시우 둘뿐이었다.
“갈까요? 가까운 곳에 차를 대 놨습니다.”
검은 우산을 펼치는 그를 보며, 은하가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안 바빠요?”
시우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은하였으나 그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늑대 길드의 마스터인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전에는 S급 헌터였고, 헌터의 구별 방식이 레벨 식으로 바뀐 지금은 한국 헌터 중 최고 레벨 80. 실시간 랭킹 1위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학원을 마치는 시간마다 꼬박꼬박 입구까지 데리러 온다니.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앙이 끝났다고는 하나 시스템도, 헌터도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 네뷸러와 지구를 잇는 언노운 게이트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으나 일반 게이트가 등장하거나 특정 구역이 던전화되는 일은 아직도 종종 일어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바쁩니다.”
짧게 답한 시우는 검은 우산 아래에서 힐끗 시선을 돌려 은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배를 데리러 올 시간 정도는 낼 수 있죠.”
“……아직도 날 선배라고 부르네요.”
“그럼, 누나라고 부를까요?”
남자, 시우가 조금 장난스러운 기색으로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은하의 핼쑥한 얼굴색을 보고는 눈빛을 달리했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습니까? 잠시 이쪽 좀 봐 봐요.”
시우가 은하를 향해 살짝 손을 뻗으려고 하자, 은하는 괜찮다는 듯이 손짓으로 그것을 저지했다.
“아니,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그래요.”
“나쁜 꿈이라도 꿨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최근 들어 자꾸 처음 보는 분홍색 머리 남자가 꿈에 나와서 잠을 좀 설치거든요.”
……분홍색 머리 남자?
허공에 우뚝 굳어 있던 시우의 손이 몇 초 뒤 스르륵 떨어졌다.
“그 남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은하는 꿈 내용을 떠올리려는 듯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그냥 평생 잠들어서 여기서 자기랑 같이 살자고 했던 것 같아요.”
“……그거 죽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시우 역시 미간을 좁혔다. 은하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그런 뉘앙스는 아니긴 했는데.”
까만 눈동자를 또르륵 움직인 은하가 시우와 눈을 마주했다.
“역시 그렇게 들리나요?”
은하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우산을 쥐고 그녀를 에스코트하던 시우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져 내리는 비가 일순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시우가 제자리에 우뚝 멈춘 줄도 모르고 한두 걸음 더 걸은 은하는 엉겁결에 어깨가 젖어 버렸다.
그제야 자신이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우가 황급히 그녀에게 따라붙고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잠자리가 불편하면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내일 수면에 도움이 되는 영양제나 아이템을 좀 챙겨 오겠습니다.”
‘사일러스의 숨결’이었던가. 분명 그 아이템으로 포션을 만들면 꿈 따위 꾸지 않을 정도로 숙면을 취한다고 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포션 자체를 대량 주문 제작해도 되겠다.
‘돌아가자마자 늑대 길드 창고를 샅샅이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던 도중,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예요?”
이번에는 은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네?”
“내가 세계에 큰 공헌을 했다는 건 알아요. 그…… ‘흑염의 프린세스’라고 불린다는 것도.”
흑염의 프린세스. 그 이명을 입에 담는 순간 은하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아직도 그 낯부끄럽고 오글거리는 이명이 입에 달라붙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이미 매달 보훈 연금으로 받고 있어요. 학원비를 대신 내준 것도 그쪽이죠?”
“아뇨, 그건…… 아마 다른 사람일 겁니다.”
은하의 학원비를 전액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취업할 그녀를 위해 근처에 대형 애견 미용 샵을 건설해 버린 그 남자.
“……백이준이라고, 선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또 한 사람이죠.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까?”
백이준? 은하는 처음 들어 본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시우는 한쪽 입꼬리를 스르륵 말아 올렸다.
“곧 그와도 만나게 될 겁니다. 지금은…… 회복 중이거든요.”
그 외에도 많은 사람이 은하를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당장 괴도나 트릭스터만 해도 그랬다.
그들이 지금까지 은하 앞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는 지금까지 그녀가 입원이나 재활 치료에 몰두했기 때문도 있으나, 아직 완전히 기억을 되찾지 못한 은하가 혼란스러울 것을 우려한 까닭이었다.
시우의 경우 은하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며 전 세계의 매스컴으로부터 당분간 그녀를 보호한다는 특권 아닌 특권으로 그녀 곁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하 입장에서는 헌터계의 유명인인 그가 제게 이렇게까지 해 준다는 것이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더 이상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미 충분하니까.”
“……민폐입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귀찮을 것 같아서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러 오고 바래다주는 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두 사람에게 드리워진 검은 우산 아래, 시우의 푸른 눈매가 조금 아래로 떨어졌다. 우산을 쥐고 있는 손에 작게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금방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렇지도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충분히 견딜 만했다. 이런 것쯤, 은하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충분히 각오했었으니까.
“난 정말 괜찮으니 내일부터는 오지 마요.”
“선배가 민폐라고 말씀하신다면 오지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매일 올 겁니다.”
“왜…….”
“아직 대답을 못 들어서요.”
“대답?”
“네, 선배가 제게 꼭 해 주기로 한 대답이 있거든요.”
“…….”
“괜찮습니다, 계속 기다릴 수 있어요. 3년이든 30년이든.”
물빛을 띤 푸른 눈동자를 곱게 접은 시우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참, 깜빡하고 있었네요. 실은 작은 선물을 하나 가져왔는데.”
……잠시만요. 그는 주머니에서 꺼낸 그 가느다란 물건을 은하의 팔목에 조심스럽게 감아 주었다.
“이건…….”
은하가 살짝 팔목을 들어 올리자, 팔목 선을 따라 푸른 실을 엮어 만든 가느다란 소원 팔찌가 스르륵 흘러내렸다.
“지난 전투 때 선배의 팔찌가 완전히 망가졌지 않습니까. 물론 선배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팔찌는, 무엇보다 소중한 선배의 보물이었으니까요.”
내…… 보물…….
은하의 입술이 슬그머니 떨어졌다.
“다 됐습니다.”
소원 팔찌를 깔끔하게 매듭지어 준 시우가 고개를 들어 은하를 응시했다.
“몇 번을 끊어져도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
은하는 푸른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똑같은 팔찌를 선물해 드리려고 했는데, 서울 전체를 뒤져 보아도 같은 디자인의 팔찌를 도통 구할 수가 없어서요.’
‘……여, 역시 기존의 것에 비해서는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지요?’
그것은, 마치 잔잔히 다가오는 기억의 파도가 머릿속에 끼어 있던 흐릿한 안개를 점차 몰아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살짝 미간을 좁힌 은하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이던 순간이었다.
삐릴리리리…….
뒷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시우의 단말기가 울렸다.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단말기를 힐끗 확인한 시우가 먼 곳으로 툭 시선을 던졌다.
“근처에 게이트가 출현했나 봅니다.”
좌표는…… 그들이 서 있는 건물의 바로 뒤편. 예상 난이도는 C-급. 출현한 게이트의 정보를 눈으로 슥 훑은 시우는 단말기를 다시 뒷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본부에 게이트 낙찰을 명령해 두었으니 곧 소식이 오겠죠.”
한편 손목의 소원 팔찌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던 은하가 까만 시선을 들었다.
“……어딘데?”
“네?”
시우가 눈을 깜빡이며 되묻자 은하는 코까지 가리고 있던 빨간 목도리를 스르륵 아래로 내리며 다시 물었다.
“게이트. 어디에 출현했냐고.”
“저기 보이는 빨간 간판 건물 뒤쪽인데…… 선배, 가려고요?”
“가야지.”
은하의 새까만 눈동자가 똑바로 시우를 향했다.
“그거 좀 빌려줘요.”
“네? 아…….”
시우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은하는 그가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을 가져갔다.
휘리릭, 탓!
우산이 아니라 마치 검을 다루듯이 그것을 거머쥔 은하는 시우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발뒤꿈치에 세게 힘을 주고 정면 건물의 옥상을 향해 날아올랐다.
“……하.”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시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 한 자락이 스쳤다.
……아무래도 조만간 바빠지겠다.
목이 빠져라 은하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모두에게 연락을 돌리려면 말이다.
* * *
“으, 으아아악!”
푸른 지붕의 낮은 상가 건물에서 한 남자의 비명 소리가 메아리쳤다. 균열의 여파를 직접적으로 받은 건물이었다.
1층에 있었다면 바로 피난할 수 있었겠지만, 하필이면 2층 공방에서 한창 작업 중이던 남자는 타이밍을 놓치고 그대로 균열 아래에 짓눌렸다.
“오, 오지 마─!!”
흰색 균열은 C급 게이트의 상징이었다. 가장 최하위 난이도로 분류되는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각성을 하지 않은 일반인에게는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한 현상이었다.
이대로 균열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꼼짝없이 게이트에 휘말리고 말 것이다. 남자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균열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으나,
파직, 파지직!
그럴수록 균열은 스파크를 더하며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제발, 누가 좀……!”
남자가 질끈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건물 창문이 산산조각이 나면서, 암흑으로 뒤덮여 있던 주변이 일순 환하게 밝혀졌다. 그에 따라 힘껏 찌푸리고 있던 남자의 눈매가 스르륵 펴졌다.
“아…….”
휘리릭, 탓.
검은 실처럼 가느다랗고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남자 앞에 가볍게 착지한 그녀는 물기가 묻은 검은 장우산을 익숙한 손길로 가볍게 털어 냈다.
넋이 나간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누…… 누구…….”
더듬더듬 뻗어 나간 목소리가 닿았는지, 그녀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창문이 깨지며 빗물이 들어와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그 위로 검은 우산을 거머쥔 그녀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쳤다.
그 순간 그녀에게는 과거의 기억도, 길고 긴 수식어도 필요 없었다.
그녀가 왜 이곳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저는─.”
그녀는 남자를 안심시키듯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헌터입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