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넘치는 생명의 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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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넘치는 생명의 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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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 넘치는 생명의 과실
2023.05.21.
화르륵!
그녀 주변을 칭칭 휘감고 있던 검은 불꽃이 한층 더 격렬하게 기세를 더했다.
“마스터……!”
뒤늦게 시우를 뒤따라온 하균 역시 은하의 상태를 보고는 멈칫 굳었다.
“데바는 죽었어, 은하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읏!”
이준은 호소하듯 은하에게로 또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은하의 흑염은 그것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준을 위협적으로 쳐 냈다.
제자리에 얼어붙은 시우의 눈에 혼란이 깃들었다.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선배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이것은 아마도 권능의 힘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권능……?’
이런 권능이 존재한다고? 시우의 입술이 멍하니 열렸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마치 자아를 잃고 흑염에 먹혀들어 가고 있는 걸로 보였다. 신수의 권능이 계약자의 본체마저 공격한다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그가 알기로 선배의 신수는…….
‘고양이.’
한때 조디악이었던 바로 그 존재다. 퍼뜩 고개를 든 시우는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근처 바닥에 주저앉아 파들파들 몸을 떨고 있는 고양이 인형을 발견했다.
“이봐, 손쓸 방법이 없는 건가?”
「몰라…… 이건 내 권능이 아니니까…….」
은하를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면 루시 역시 진즉에 실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아세팔리’란 쌍아궁의 권능, 조금 더 정확히 따지고 보자면 죽은 루나의 권능이었으니까.
“그래도, 뭐든 좋으니 떠올려 봐. 아주 작은 단서라도 상관없으니까.”
루시에게 따져 물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우는 또다시 재촉하듯 입을 열었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권능이 맞다면, 아마도 지금의 언니는 자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껍데기…… 인형이나 다름없는 상태일 거야. 루나 언니는 인형을 다뤘거든.」
루시가 기억하는 한, 루나가 인형에게 내렸던 대부분의 명령은 숨바꼭질이나 소꿉놀이 등 단순하고 아기자기한 것들이었다. 물론 때로는 적의 섬멸 혹은 침입자 감시 등의 전투적인 명령을 내릴 때도 있었지만.
「명령을 완수하면 자동으로 해제되어야 하는데…….」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황금색 눈동자가 또르륵 은하에게 굴러갔다.
만일 루나가 살아 있다면 권능을 일시 해제하여 현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시에게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명령, 이라고.’
한편 시우는 은하가 스스로에게 내렸을 명령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가 아는 선배라면 분명 이렇게 명령했을 것이다.
──데바를 쓰러트리고, 모두를 지키라고.
실제로 데바를 처치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시스템창이 그렇게 알렸으니 그것만은 확실했다.
그런데도 은하의 흑염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
시우의 푸른 시선이 루시 너머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헌터들에게 닿았다. 그중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자들도 있었다.
승리했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데바와의 전투는 끝이 난 후에도 기어코 커다란 상흔을 남긴 것이다. 이곳에도, 그리고 바깥에도.
‘만일 그 때문에 선배의 흑염이 멈추지 않는 것이라면…….’
시우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 갔다. 그의 두 주먹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차갑게 얼어붙은 듯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그럼, 이대로라면 선배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번 명령을 받은 인형은 몸이 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아.」
루시의 대답에 꾹 쥐고 있던 시우의 주먹이 스르륵 풀렸다.
‘몸이 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고?’
시우는 검은 불길에 휩싸인 은하 쪽을 돌아보았다. 그 말은 저 흑염은 은하를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멎지 않을 것이라는 소리였다.
“마스터.”
시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하균이 다가왔다. 그러나 이미 시우는 결심을 내린 후였다.
휘익……!
푸른 그림자가 흑염 속으로 뛰어들었다.
“형!”
민주가 경악하며 시우를 불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시우는 일렁이는 검은 불길을 거스르며 두 팔을 벌렸고,
“선배, 접니다.”
꾸욱…….
곧바로 품에 그녀를 힘주어 껴안았다.
은하를 휘감고 있던 흑염이 저항하듯, 밀어내듯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살갗에 닿은 흑염은 일반적인 불과는 달리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뜨겁고 공격적이었다. 마치 불에 달군 수천 개의 가시가 온몸을 꿰뚫는 듯한 고통. 지금 당장 기절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시우는 두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절대로.’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형, 미쳤어? 죽는다고! 해 볼 수 있는 건 우리도 다 해 봤어!”
그리 외치는 민주의 녹색 망토는 이미 흑염에 의해 반쯤 타 버린 상태였다. 바주카를 쥐고 있는 그의 손에는 선명한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
민주뿐만이 아니었다. 이준도, 아연도, 그리고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고양이 인형 루시도 마찬가지였다.
데바를 물리치고도 멎기는커녕 폭주해 버린 은하의 흑염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자아가 남아 있지 않은 지금의 은하로서는 그 흑염을 제어할 수 없었다.
파스스…….
은하를 껴안은 시우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백색으로 물들어 갔다. 은하와 닿아 있는 그의 피부로부터 새하얀 냉기가 사르르 피어오른다.
“─괜찮아요.”
서로 극명한 온도를 가진 두 색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섞여 들어갔다.
푸슈우우…….
은하를 휘감고 있던 뜨거운 불꽃과 시우가 피워 낸 얼음이 서로 맞닿는 순간, 진한 안개와 같은 수증기가 그들을 넓게 감쌌다.
온통 새하얀 풍경 속, 주변인들의 모습은 하얀 수증기에 먹히듯 점차 흐려져 갔다. 이윽고 그곳에 남은 것은 시우와 은하, 오직 두 사람처럼 보였다.
시우는 품속의 은하를 향해 다시 한번 입술을 달싹였다.
“모두 무사합니다, 선배. 싸움은 끝났어요.”
그런 시우의 목소리가 드디어 그녀에게 닿은 것일까.
움찔─
은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칠게 요동치던 흑염의 움직임이 점차 사그라드는 것은, 결코 기분 탓이 아니었다.
“으…….”
피딱지가 말라붙은 그녀의 입술이 힘없이 떨어졌다.
시우는 두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선배가, 지킨 겁니다. 그러니까…….”
그녀의 등에 커다란 손을 가져간 시우는 위로하듯 달래듯 손바닥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이제 다 괜찮아요.”
사아아…….
거짓말처럼 흑염이 잦아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비가 그녀를, 그녀의 흑염을 감싸 안기라도 하듯 땅 위에 활활 타오르던 흑염이 점차 꺼져 간다.
그에 따라 초점 없이 흐릿하던 은하의 눈 역시 조금씩 감겼다.
검은 하늘이 개고 먹구름이 밀려난다. 그녀의 눈동자가 품고 있던 황금 빛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새까만 밤하늘과 같은 눈빛이 어렴풋이 돌아왔다.
완전히 눈꺼풀이 감기기 직전, 은하는 이끌리듯 더듬더듬 눈길을 돌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있는 아연, 아랫입술을 터트릴 듯 세게 깨문 채 수현의 시체를 껴안은 준환, 반쯤 타 버린 녹색 망토를 입고 있는 민주와,
“은하, 야…….”
흔들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준을 눈에 담은 순간,
슈우우우…….
결코 꺼질 것 같지 않던 흑염이 완전히 소화되었다.
[입력한 명령이 완료되었습니다.]
검은 비는 어느덧 멎어 있었다.
점차 밝아지는 하늘과 그곳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아름답고도 찬란한 은하수 아래,
[권능 ‘아세팔리(Acephali)’가 해제됩니다.]
풀썩─
그들의 불꽃이 저물었다.
바닥에 겨우 남아 있던 불씨는 타닥, 소리를 내며 기어코 꺼져 들어갔다.
실이 풀린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품속에서 추욱 늘어진 은하를, 시우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두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늘 탓에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은하를 내려 두는 그 손이 떨고 있었다.
툭─
바닥에 닿은 은하의 검은 머리카락이 차갑게 식은 땅 위로 실타래처럼 넓고 부드럽게 퍼졌다.
“언니……!”
은하에게로 뛰어간 아연은 바닥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를 붙잡았다. 손에 닿은 은하의 피부는 차갑고 딱딱했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죽은 사람처럼 말이다.
“거짓말! 언니! 언니, 눈 좀 떠 봐요, 언니……!!”
아연은 미친 듯이 은하를 흔들었다. 그러나 은하는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은하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준은 은하만큼 창백한 얼굴로 몸을 휘청거리더니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의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던 은회색 눈동자에서 또르륵, 투명한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이 든 듯한 은하의 얼굴을 오랫동안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던 시우가 스르륵 고개를 들었다.
“이하균, 지금 당장 치유 헌터를 불러.”
“예? 하지만…….”
하균이 보기에 은하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된 상태였다. 아무리 뛰어난 치유 헌터라고 해도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우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터. 그러나.
“당장 부르라고!”
시우가 홱 고개를 돌리며 하균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시우의 푸른 눈매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본 하균은 제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젠장……!”
시우는 직접 치유 헌터가 있는 곳으로 움직이려는 듯 하균의 어깨를 밀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만……!”
준환의 당황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칫한 시우가 눈을 크게 떴다.
우우웅…….
은하의 몸이 아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다. 또다시 능력이 폭주하는 걸까?
……아니, 달랐다.
흑염에 검게 물들었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은은한 황금 빛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모두가 멍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과실.」
돌연, 은하 근처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던 루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언니의 인벤토리에, 그것이…….」
무언가 떠올린 듯한 루시는 축축한 뺨을 문지르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은하에게로 다가갔다.
「그것이라면 분명 언니를…….」
혼잣말을 이어 가던 루시는 곧 결심한 듯 손을 뻗었다. 고사리처럼 작고 통통한 손이 바닥에 쓰러진 은하의 배 위에 닿는 순간,
슈우우우……!
은하에게서 뻗어 나온 황금 빛이 마치 부드러운 물줄기처럼 흘러 루시에게로 이어졌다.
파아아…….
은하와 루시를 살며시 품은 황금 빛은 마치 공명하듯이 느릿하게 진동했다.
[인벤토리를 불러옵니다.]
[실패. 사용자 권한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권한 재확인을 요청합니다. ▶ ‘어둠을 방랑하는 고양이’ 영혼 결속 여부를 판단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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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를 제외한 이들에게 해당 시스템창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은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빛이 끊임없이 루시에게로 옮겨 가고 있는 것으로만 보였다.
멀거니 그것을 응시하고 있던 도중, 시우의 눈앞으로 띠링! 하고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그 화신에 그 신수라더니 정말 그렇다며 눈앞의 광경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저 아이는 지금 계약자의 인벤토리를 강제로 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정신을 잃은 각성자의 동의 없이 신수가 함부로 인벤토리를 오픈하는 일은 명확한 월권(越權).]
[더군다나 현재 둘은 결속이 끊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직접적으로 계약자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은 시스템 구조상 허용되지 않는 일이라 덧붙입니다.]
[이것은 신수이든 조디악이든 시스템에 묶여 있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모두 적용되는 규율임을 강조합니다.]
“그럼 저 고양이는…….”
[12신수 ‘깊은 밤을 수호하는 개’가 잠시 말을 내뱉기를 망설입니다.]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최소한 신수의 힘을 잃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합니다.]
“뭐……?”
시우의 입술이 힘없이 스르륵 벌어졌다. 지금 루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도 규율을 어기고 은하의 인벤토리에 손을 대고 있다는 소리였다.
아마도 선배의 인벤토리에 무언가 있는 것이다. 선배와 오랜 시간 함께한 루시는 그 ‘무언가’가 그녀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
──설령 자신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파아앗!
은하와 루시를 감싸고 있던 황금 빛이 폭발하듯 찬란하게 쏟아졌다.
“읏.”
시우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줄기의 세례에 반사적으로 눈매를 찌푸렸다.
밝게 번진 시야 속 그가 목격한 것은 은하를 꼬옥 껴안고 있는 작은 고양이 인형과─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강제로 불러옵니다.]
[‘넘치는 생명의 과실’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눈부신 빛무리 위로 두둥실 떠오른 황금빛 과실이었다.
* * *
‘아…….’
저를 감싸 안은 빛무리 속에서 은하는 아득히 정신이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곳이 어디인지, 무얼 하고 있었는지조차 모호했다. 전신이 타들어 가는 듯한 뜨거운 불길 속을 허우적대는, 그런 어렴풋한 감각만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몸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뜨겁다.
뜨거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방이 까맣게 물들어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지독한 어둠 속을 방황할수록 은하의 정신은 점차 더 심연으로 가라앉아 갔다.
‘─하야.’
그때, 어디선가 다정하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저를 부르고 있었다.
‘사람은 나무와 같아서, 큰바람이 불 때마다 하나씩, 또 하나씩 잎사귀를 떨어트리곤 한단다.
그래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차갑고 혹독한 겨울이 오면 앙상한 가지만 남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럼에도 뿌리가 그곳에 박혀 있다면, 그곳에 흔들림이 없다면.’
은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포근하고, 평온하고, 따듯했다.
‘──다음 봄에는 다시 피어날 것이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정신 속.
문득 누군가의 손이 그녀에게 닿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은, 뜨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