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추락, 그 이후
(293/306)
293. 추락,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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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 추락, 그 이후
2023.05.20.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부 근처.
“X발, 끝이 없잖아!”
낡은 도복 차림의 남자가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퉤 뱉었다.
“공격을 멈추지 마라! 몬스터들이 이 구역을 넘게 만들어서는 안 돼!”
남자의 근처에서 불멸 길드의 현 마스터, 도성윤은 전선 선두에 선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하들을 이끌었다.
활대에 화살을 가져간 성윤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며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주도의 백색 성이 완성되며 재앙이 시작되었다. 하늘이 내려앉고 지반이 무너지면서, 전 세계 인류는 30년 전의 악몽을 다시금 겪고 있었다.
전선이 얽힌 채 도로에 쓰러진 가로등, 무너져 내린 건물, 끊이지 않는 비명 소리. 하늘이 새까맣게 물들어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일정하지는 않았다고는 하나 간격을 두고 출현했던 게이트가 어느 시점부터 봇물을 터뜨리듯 사방에서 열리고 있었으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몬스터에 면허를 보유한 헌터들은 랭크 따위 따지지 않고 너나없이 전선에 섰다.
그리고 지금, 성윤이 이끄는 불멸 길드가 선두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사부…….’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성윤의 눈이 힐끔, 무너진 협회 건물을 향해 옮겨 갔다.
헌터 협회를 덮쳤다던 조디악은 유환의 시체를 껍질 삼아 기생한 형태였다고 한다. 녀석에게, 불멸의 동료이자 친우인 허재민이 당했다.
그런데도 현재 성윤은 사부의 시체는커녕 재민의 상태조차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우선은 눈앞의 이 절망적인 사태를 막는 것만으로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피유웅─ 콰직!
성윤의 화살은 정면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던 몬스터의 눈알에 정확히 명중했다.
성윤은 등에 메고 있던 화살통에서 재빨리 화살을 가져왔다. 또다시 굳건하게 활시위를 당기는 손은 이미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했다.
부하 녀석의 말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기는 했다.
끊임없이 열리는 게이트, 그리고 그곳에서 쏟아지는 몬스터와는 달리 헌터들의 체력과 마력은 유한하다. 내색하지 않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미 성윤은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키에에에엑─!!
머리 위에 비행형 몬스터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는 것도 뒤늦게야 알아챌 정도로.
‘방심했다……!’
한 박자 늦게 활시위를 머리 위로 겨누었으나, 이미 몬스터의 발톱이 성윤의 양어깨에 갈고리처럼 박힌 뒤였다.
양발로 성윤을 단단히 부여잡은 조류형 몬스터는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려고 했다.
“크윽!”
안간힘을 쓰며 벗어나고자 했으나 그럴수록 몬스터의 발톱이 깊게 살갗을 파고들었다.
비행 준비를 마친 몬스터가 마지막으로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그렇게 성윤의 두 다리가 땅으로부터 둥실 떠오르던 그때.
촤아아악!
성윤의 뺨에 뜨거운 액체가 한가득 튀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발밑으로 거대한 고깃덩이가 툭 떨어졌다.
“발톱에 독이 있는 몬스터입니다.”
스릉…….
서늘한 칼날을 타고 몬스터의 보랏빛 혈액이 흘러내렸다.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린 그곳에는 푸른 한복 차림을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연하늘색 머리카락에 눈을 가린 검은 천. 그것을 확인한 성윤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였다.
“심안…….”
“가지고 있는 해독제가 있으니 드리죠.”
심안 은유엘이 선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허공을 두들겼다. 인벤토리를 열고 있는 것이다.
산군이 협력하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보고받은 바였으나, 이렇게 막상 눈으로 보니 잘 믿기지 않았다.
성윤은 어깨의 상처를 한쪽 손으로 감싸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산군, 너희는 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부끄러운 과거지요.”
짧게 답한 심안은 “여기 있습니다.” 하며 성윤에게 해독제를 건넸다.
성윤은 선뜻 그것을 받지 않고 우물쭈물 유엘을 살폈다.
도대체 산군에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과거와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걸까. 전 세계가 쑥대밭이 된다고 한들, 성윤이 알고 있는 산군이라면 모른 체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는 산군이, 그것도 그들의 우두머리인 심안이 버젓이 서 있었다. 몬스터들이 쏟아지는 전장 한복판에 말이다.
내밀어진 해독제를 순순히 받아 들지도, 그렇다고 거절하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몬스터……!”
다친 어깨를 한 성윤이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화살을 집었다.
피유웅─!
눈 깜짝할 사이 활시위로부터 날아간 화살은 심안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그 뒤편에 푹 꽂혔다.
“…….”
해독제를 손에 쥐고 서 있던 유엘은 대각선으로 살짝 턱을 비틀었다.
툭─
무거운 물체가 바닥에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눈은 보이지 않았으나, 유엘은 그것이 몬스터의 사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유엘의 실력이라면 저 정도 몬스터쯤, 성윤이 아니었더라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유엘의 실력은 이미 최초의 탑 봉쇄자라는 성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성윤은 다친 어깨를 하고서도 유엘을 위해 화살을 든 것이다.
“……듣기로는, 불멸 길드 사람들은 그들끼리만 똘똘 뭉쳐 팔이 안으로 굽는 것으로 유명하다던데.”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때는 그랬으니까.
호전적이고 다혈질적인 성향이 강한 불멸의 헌터들은 몬스터가 아닌 타 길드에 소속한 헌터들도 쉽게 적으로 돌리고는 했었다.
그들에게 아군이라고는 같은 도복을 입고 함께 땀을 흘린 불멸의 동료들뿐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같은 도복을 입고 있지 않아도, 함께 땀을 흘리지 않았어도 같은 전장에, 같은 이유로 서 있다는 것만으로 그를 감쌀 명분은 충분했다.
“……부끄러운 과거지.”
그래, 이제는 그것을 안다.
그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준 사람이 있었으니까.
성윤은 유엘의 손바닥에 놓여 있던 해독제를 향해 슥 손을 뻗었다.
“고맙다.”
검은 천 너머에 숨겨진 유엘의 눈이 스르륵 성윤을 향했다.
휘이이이…….
두 사람 사이에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 바람의 끝에 난초향을 머금은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저야말로.”
이후 산군과 불멸의 활약으로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부 부근의 몬스터 웨이브는 조금씩 안정화되어 갔다.
비록 몬스터 웨이브가 멎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멈추지 않고 싸웠고, 또한 지켰다.
그리고…….
“수령님.”
이윽고, 결코 보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종이 학으로부터 가뿐하게 몸을 던져 착지한 의영과 가란이 심안 앞에서 머리룰 숙였다.
몬스터의 시체 더미 가운데 우두커니 선 그들의 주인, 유엘은 보랏빛 피에 젖은 푸른 검을 조용히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래.”
스르륵─
눈에 두르고 있던 검은 천을 벗자 그 뒤에 숨어 있던 탁한 빛의 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오래전, 잔인한 별에 의해 빛을 잃은 두 눈이었다. 그날 이후 그의 시야에는 그저 짙은 어둠만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하늘을 향해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린 유엘은 마치 눈부신 빛을 마주한 사람처럼 가느다랗게 눈매를 좁혔다.
[별의 추락. 《Lv.99 흑염의 프린세스》에 의해 네뷸러 제2궁, 금우궁(金牛宮)이 봉쇄됩니다.]
“──끝난 것 같구나.”
* *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제21대피소.
특별 지정 재난 구역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일반인들과 파견 군부대, 그리고 민영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흐느끼는 소리와 연락이 닿지 않는 친지에게 전화를 거는 신호음으로 가득하던 그곳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돌변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루 씨?!”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쩌렁쩌렁하게 소리치는 제휘 탓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그루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였다면 목소리가 크다며 등짝을 후려쳤겠지만, 지금은 그런 그의 반응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겠지.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어……. 그, 그런 것 같아. 방금 시스템창이 떴으니까.”
얼떨떨한 기색으로 그루가 입술을 달싹이기 무섭게, 누군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 끝났다……!”
와아아아!
하나둘씩 터지는 승전보에 거무죽죽하던 대피소의 공기가 시끌벅적해졌다.
그루는 한 손을 들어 허공을 살짝 두드렸다. 그곳에는 제휘에게는 보이지 않는 시스템창이 자리해 있었다.
시스템창에 분명하게 명시된, 낯부끄럽고 오글거리는 이명. 그것을 눈에 담은 그루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제휘를 바라보았다.
“이겼나 본데, 네 영웅.”
“이, 이겼…….”
제휘의 두 눈에 한가득 눈물이 들어찼다. “윽, 우윽…….” 하고 울음을 꾸욱 눌러 삼킨 그는 벌게진 눈을 벅벅 비비고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중에는 그루처럼 각성은 했지만 헌터 경험도 전투력도 없는 이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비록 정식 헌터는 아니라고 해도 각성자인 그들 역시 시스템창을 보는 것은 가능했기에, 흑염의 프린세스가 제2궁 금우궁을 봉쇄했다는 사실은 대피소 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이겼다고? 진짜?”
“엄마아…… 우리 이제 집에 갈 수 있는 거예요……?”
“야, X발, 내가 뭐랬냐! 흑염의 프린세스가 다 씹어 먹을 거라고 했지?!”
“으어허엉…….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갑작스럽게 돌변한 공기에, 대피소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헌터가 확성기를 들었다.
“다들 진정하십시오! 아직 바깥 상황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지시가 있을 때까지 대피소를 벗어나시면 안 됩니다!”
“근처 몬스터 웨이브가 완전히 멈추었는지 확인 중입니다! 다들 착석 바랍니다!”
대피소는 눈물바다에 휩쓸렸다.
그러나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환호와 안도, 희망과 기쁨이 뒤섞인 울음소리 속에서 제휘는 기도하듯 두 손을 꼬옥 깍지를 끼웠다.
‘차 헌터님……!’
얼른…….
얼른 그녀가 돌아오기를.
돌아와서, 늘 그랬던 것처럼 무심한 듯 차분한 얼굴로 오늘 저녁은 뭐냐고 물어 주기를.
그러면 제휘 또한 늘 그렇듯이 똑같이 답하리라. 헌터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로만 준비해 두었다고.
그러니까, 꼭.
꼭.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헌터님……!’
* * *
“여기인 것 같습니다, 마스터.”
늑대의 ‘검은 톱날’. 한때는 전 길드 마스터 귀훈의 오른팔이기도 했던 하균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백색 성의 결계가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늑대 길드 인원을 끌고 내부에 진입했다.
데바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앙 탑으로 향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스터를 찾아 합류하는 일이었다.
다행히 백색 성에 진입하고 얼마 있지 않아 시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앙 탑 근처의 하늘을 뚫을 듯한 기세로 높게 솟아 있는 얼음벽이었다.
그것이 시우의 스킬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하균은 길드원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곳에는 얼음벽에 갇힌 시우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숨이 완전히 끊어졌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진 하균은 치유 헌터들을 한데 모아 그를 치료했고, 다행히 시우는 머지않아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결코 완벽한 회복은 아니었다.
하균은 시우의 몸 상태를 생각해 본부로 돌아가자며 그를 회유했으나, 시우는 그런 하균의 충언을 무시하고 눈을 뜨자마자 중앙 탑으로 이동한 참이다.
어쩔 수 없이 시우를 따라 탑으로 오기는 했는데…….
‘도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하균은 두꺼운 가면 너머에서 슬그머니 눈매를 좁혔다.
지금 서 있는 이곳은 분명 중앙 탑의 내부였다. 그런데도 눈앞의 풍경을 보자니 자신이 건물 안에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쓰러진 기둥에는 크고 거대한 이빨과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튄 핏자국은 아직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하균은 천장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원래는 돔 형태였던 천장이 뻥 뚫려 하늘을 오롯이 드러냈다.
마치 이 중앙 탑을 감싸고 있던 신비로운 빛을 하늘이 흡수하기라도 한 듯, 새까맣게 물들어 있던 하늘에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이곳, 데바의 네뷸러가 봉쇄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지점이 있었다.
‘……불에 탄 건가?’
마치 탑 전체가 거대한 불길에 휩싸였던 것처럼, 곳곳에는 타다 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흑염의 프린세스가 불을 다룬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불의 잔재는 그 여파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때에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히 움직여야 했다.
“……잔당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변 확인을 마친 하균이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회복 스킬 효과가 돌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무리하시면 안 됩─.”
“……선배.”
그런데 하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우는 그를 지나쳐 어딘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는 헌터들, 박살 난 회전 계단, 그 곁에 떨어진 흰색 로브……. 수많은 것들을 지나쳐, 시우는 쉴 새 없이 뛰었다.
“선배!”
저 멀리, 하늘 아래 거세게 일렁이고 있는 검은 불길이 보인다. 지금 이 순간, 시우의 푸른 눈은 오직 그곳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 불길 근처에 굳은 얼굴로 서 있던 민주가 시우를 알아보고는 “백랑……?” 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안 돼! 그 이상 다가가면!”
“……!”
눈앞의 광경을 가까이서 목도한 시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 흑색 비단 드레스. 그리고 배에 깊숙이 박힌 저것은……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였으나 분명 은하의 양산이었다.
그렇다.
눈앞에 이건, 틀림없는 선배였다.